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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영재원 시험을 보러간다고 해서 반일 휴가를 내고 안양의 한 초등학교에 가 있던 며칠 전 오후, 우체부의 전화가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 택배가 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
"아, 부피가 작은 거면 문앞 양수기함에 좀 넣어주실래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모님…"

우체부는 뭔가 미안한 일이라도 있는 양 다음 말을 망설입니다.

"네 뭔데요 ? 말씀하세요."
"저, 부산지법에서 등기가 하나 있는데요, 이건 어떻게 하지요 ? 본인이 꼭 받으셔야 하는데…"

 부산지법에서 온 서류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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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법? 그러니까 법원에서 나에게 등기가 오다니… 우선 무슨 내용인지조차 모르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불쾌해집니다. 부산에 연고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습니다. 씁쓸하게도 처음 떠오른 생각은 '나는 희망버스도 안 탔는데...' 그 생각이었습니다. 선량한 시민들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김진숙을 응원하러 몇차례 희망버스에 올라 부산에 갈 때에도 저는 가보지도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는데, 혹시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에게 법원에서 서류가 온 것인가, 나도 거기 간 것으로 오인되었나 하는 상상을 한 것입니다.

아이 시험 끝나자마자 서둘러 우체국에 가서 직접 받은 법원 서류를 열어보았습니다. 어렴풋이 집히는 것이 있긴 했는데 역시 거기였습니다. J 정수기 회사. 그리고 파산한 그 회사의 채권추심회사라는 W회사, 그리고 또 W 대표가 채무가 있어서 채권양도양수를 받았다는 S 회사. 이들은 수년째 잊을 만할 때마다 출몰하여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2002년에 지인의 부탁으로 정수기를 임대했습니다. 수돗물을 끓여먹는 것이 더 익숙한 저였지만 가까운 지인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렌탈을 하게 된 것이지요. 정수기 회사는 이듬해 2003년에 부도가 나고 파산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정기적으로 정수기를 소독관리해주는 직원이 더 이상 방문하지 않고 연락도 끊기자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정수기를 사용도 하지 못하고 주방에 한참 방치했습니다. 그러다가 1년여가 지나서 이사를 가게 되자, 정수기를 폐기하고 이사를 떠난 것이지요.

어느날 정수기라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용증명이 날라왔습니다. W 회사에서 정수기 값으로 50여만 원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도 기가 차서 전화를 걸고, 회사가 유지관리도 안 하고 회수도 안 하는 정수기를 어느 소비자가 언제까지나 보관할 것이며, 1년도 더 지나서 갑자기 채권자라고 주장하며 돈을 내라면 누가 내겠냐는 게 제 주장이었습니다. 그 회사에서는 무조건 돈을 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그후 법원서류는 아닌데, W에서 협박에 가까운 문서를 종종 보내왔습니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재산을 가압류하겠다거나 하는 식의 무시무시한 말들…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일개 사기꾼 같은 회사가 보낸 문서라서 무시했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제작년에는 드디어 법원을 통해 또 돈을 내라는 문서가 왔습니다. 저는 그 주장이 부당하다는 답변서를 보냈더니 그 역시 잠잠해졌습니다.

법원에서 온 지급명령의 내용
 법원에서 온 지급명령의 내용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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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몇달 전에 독촉 전화가 오고 그를 무시했더니, 또 이번엔 부산지법을 통해 지급명령을 구한 모양입니다. 저는 절차에 따라 이의신청서를 내고 다투어 볼 생각입니다. 포털사이트에서 W회사에 대해 검색을 해봤더니 이들의 횡포에 대해 여러 기사가 이미 났고 이에 대항하는 소비자들의 카페, 소비자보호원의 결정 등등 여러 내용이 있습니다. 선의의 소비자들을 겁박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이들의 횡포에 저도 한푼도 줄 수 없습니다. 좋은 일에 기부하라면 이보다 더한 돈도 내겠지만, 이들의 횡포에는 끝까지 대응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계기로 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법도 모르고 살 사람'이라는 표현은 준법정신이 강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하는 칭찬이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법을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낍니다. 사법 적용이라는 것이 가만히 혼자서 착하게 산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요, 지금의 법이라는 것도 허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엉뚱하게 최근에 고발을 당한 방송인 김제동씨와 조국 교수님 생각도 났습니다. 우리 사회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인데, 엉뚱한 고발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화가 나실까요. 아무리 단련된 사람이라도 송사는 피곤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니까요. 아이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오며 괜히 아이에게 한마디 합니다.

"너 변호사 해볼 생각은 없니?"  


태그:#정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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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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