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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어 옷소매가 짧아지기 시작하면 여성들에겐 과제가 하나 주어진다. 여름옷을 입다 실수로라도 드러내기엔 민망한 겨드랑이의 체모나 각선미를 뽐내는 데에 장애가 되는 다리의 체모 등, 몸의 '털'들을 처리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수단도 각양각색이다. 눈물을 머금고 족집게로 한 올씩 뽑아내는가 하면, 여성용 면도기, 제모크림 혹은 왁싱 제품 등을 구매하기도 하고, 좀 더 비싸지만 피부과에서 레이저 제모 시술이나 모낭파괴 시술을 받기도 한다. 여성들이 제모에 들이는 수고와 정성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겨지는 제모에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자.

길고 긴 제모의 역사, 여성 수난의 역사

제모의 역사는 상상 외로 길다. 그 기원은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 문화는 비잔틴 문화로 이어져 이슬람 문화권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슬람권에서 제모는 여성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는데, 여성의 신체가 성인으로 자라났음을 의미하는 체모를 제거함으로써, 여성을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존재로 남겨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모의 문화는 중세시대까지 유럽과 중동에 만연해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남성에게 있어서 털은 때로는 권장되기도 때로는 터부시되기도 하며 시대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하였던 것과 달리, 여성에게는 언제나 수치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긴 세월동안 예술 작품들 속에서 여성의 신체가 언제나 대리석을 깎아 조각해 놓은 듯 털 한 올 없이 매끄럽게 묘사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제모는 길고 긴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역사학자 다니엘라 마이어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자신의 체질과는 상관없이 체모 면도라는 고문을 감당해왔고 또 그래야만 하는 쪽은 오로지 여성들이었다"라며, 제모를 '고문'으로까지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조개껍질로 털을 뽑는가 하면, 위험한 성분이 든 화장품으로 털을 제거하는 등 제모가 여성의 평균 수명을 줄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여성들에 비해 조금 더 편리하게 털을 관리할 수 있게 된 현대의 여성들은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가부장적 억압에서 기업의 상술로

20세기 초반에야 여성의 체모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이 등장한다.
▲ 팔짱을 낀 소녀의 누드 20세기 초반에야 여성의 체모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이 등장한다.
ⓒ 에곤 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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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부터 여성 해방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여성들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술계에서도 금기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쉴레는 여성의 음부와 겨드랑이의 체모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제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무렵 각종 화장품 회사들은 여성의 겨드랑이 털이 위생상 좋지 못하다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고, 20세기 초 질레트 사는 미국의 여성지 하퍼스 바자에 여성의 겨드랑이 털은 아름답지 않다는 캠페인을 벌인다.

아마도 이 회사는 인류의 절반인 남성 고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집요한 상술 덕분에 '여성의 털은 아름답지 않다'는 관념이 살아남아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털을 밀게 하는 주체가 '가부장적 남성의 권력'에서 '기업의 논리'로 바뀌었을 뿐, 제모의 문화는 여전히 억압적인 것이 아닐까?

남자들은 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왜?

미국화된 미의 기준은 잡지, 영화 산업을 통해 전 세계로 확장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서구화된 사회라면 대게 여성의 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개그 프로 등에서 민소매를 입은 여성이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화화 하곤 한다.

털 미는 것 하나 가지고 유난 떠는 것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레즈비언이면서 여성 운동가인 미국의 뮤지션 베스 디토는 "남자들은 밀지 않는데 우리는 왜 밀어야 하나?(Why should we shave? Men don't)"라며 당당히 제모 반대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그녀의 바람대로 톱모델 케이트 모스가 여성들의 롤모델로서 제모 반대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또 모를 일이다. 주입식으로 교육된 미의 기준에 반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나타나, 언젠가 여성들이 '뽑고, 붙였다 떼어내고, 지지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지도.


태그:#제모,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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