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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22일) 우진이 숙제할 때 엄마가 가르쳐 줬어요?"
"아니 왜?"
"나하고 할 때처럼 똑같이 틀려서."
"얘는 우진이가 숙제하는 동안 제방에 못 들어오게 하더라. 모르는 것만 날 불러서 물어보던데. 왜 너무 잘해서? 그런 일로 전화까지 하고."
"엄마가 할머니 되고 나니깐 혹시 가르쳐 줬나 해서. 옛날 아빠처럼…."

'옛날 아빠처럼'이란 말에 나와 딸은 웃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 애 아빠한테 아이들 숙제 봐주라고 부탁을 하고 외출하곤 했다. 산수(지금은 수학) 문제에서 쩔쩔매던 딸아이가 어느새 문제를 다 풀어놓곤 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더니 언제부터인가 딸아이는  제아빠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소리를 자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이었던가? 시장에 갔다 왔는데도 두 부녀는 책상에서 고개를 숙이곤 한참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모르고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 하고 책상으로 갔다.

세상에, 맙소사. 그 당시 아이들은 주로 전과와 수련장을 가지고 공부를 했을 때였다. 산수숙제를 하는데 전과의 답을 보고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남편은 "엄마 오기 전에 얼른 해"라고 한다.

난 시치미를 딱 떼고 뒤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숙제를 다 했는지 딸아이가 "아빠 이제 다했어"하면서 둘이 책상에서 일어나다 뒤에 서있는 나를 보고 둘 다 기절할듯이 놀란다.

"어, 엄마 언제 왔어?"
"언제 온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둘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다. 잠시 후 남편이 입을 연다.

"애가 너무 어려워 해서…"
"그래도 그렇지 아빠라는 사람이 답안지를 보여주면 어떻게 해? 내일 모레 경시대회도 있는데."

남편도 조금은 미안했나보다.  아빠와 공모를 한 것이라 더 이상 야단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부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경고를 한 뒤 수련장 답안지를 오려 전과와 함께 감추어 놓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산수뿐 아니라 거의 전 과목을 다 답안지를 보고 썼다고 고백을 했다. 그때서야 딸아이가 제 아빠와 숙제를 하겠다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이젠 이유를 알았으니 그런 일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이들한테 정말 무섭게 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단 숙제를 다 해놓고 다음날 책가방까지 챙겨 놓아야 나가서 놀 수 있었다. 나가서 놀다가 저녁 5시30분~6시 사이에는 들어와 씻고, 저녁 먹고,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할 정도까지 습관을 들여 놓았다. 딸아이가 하는 것을 보고 아들 아이는 제 누나 하는대로  따라했다.

그런데 언젠가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할머니, 할머니는 왜 딸을 저렇게 무섭게 낳아 놨어?"한다. 난 뜻밖의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그렇게 무서워?"하니깐 옆에서 듣고 있던 딸아이가 "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무서웠어"라고 한다. 손자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다는 듯이 "할머니,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착해"라고 묻는다.

내가 무서웠다는 말에 한동안 생각을 한 뒤 손자에게 "그러게 할머니도 젊어서는 네 엄마처럼 무서웠나봐. 그런데 이제는 할머니가 나이를 먹고 늙어서 기운이 없으니까 무섭게 하기 싫어졌어. 그리고 할머니가 무섭게 하면 우진이가 힘들잖아. 엄마한테 야단맞으면 할머니가 우진이 편 들어줘야 하는데"하니깐 그제야 아이의 의문이 풀렸나 보다.

그러면서 "그럼 할머니, 왕 할머니는 할머니보다 더 무서웠어?"하고 묻는다. 옆에서 딸아이가 "그럼, 왕 할머니는 할머니보다 더 무서웠지. 아주  많이"라고 대답하니 손자가 한숨을 내쉰다.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딸아이는 정말 많이 변했다. 내가 하던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받아쓰기 꼬박 꼬박 시키는 것도, 책가방이나 준비물을 자신이 알아서 미리미리 챙기게 하는 것도 아주 똑같이 하고 있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예전에 내가 한 것을 잠시 잊고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손자가 제 엄마를 왜 무섭게 낳았냐고 묻는 말에 웃음이 나오면서 옛생각이 난 것이다.

내가 정말 아이들한테 그렇게 무섭게 했나?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란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대로 하니 말이다.


태그:#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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