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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무개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 왜 난 핫메일로 온 이 메일을 의심하지 않을 걸까.
 윤아무개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 왜 난 핫메일로 온 이 메일을 의심하지 않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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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방 분실했다고 분실물 센터 같은 데 올린 적 있어? 이놈 전문사기꾼인데.'

지난 27일 오후 남자친구로부터 날아온 문자 메시지에 난 그만 좌절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포맷됐고, 그간 내 머릿속에 물음표로 남아 있던 모든 궁금증들이 한꺼번에 답을 와르르 쏟아냈다.

그렇다. 난 설 연휴가 시작된 25일, 사기를 당했다.

사건은 내가 가방을 잃어버리면서 시작됐다. 24일,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생일이었고 그 친구를 비롯해 10여 명이 홍대 앞에서 술을 마셨다. 주사가 곧 자는 것인 나는 뒤늦게 술자리에 합류한 남자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술을 마실 땐 얼굴색 하나 안 변하지만, 다음 날이면 거의 시체가 돼 버리는 나. 속사포처럼 빠른 엄마의 잔소리가 희미해질 즈음인 오후 1시경 정신을 차렸고 평상시처럼 가방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언제나 침대 아래쪽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던 내 가방이 없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왼쪽 머리를 짓누르던 숙취로 인한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울렁거리던 속도 순간 괜찮아졌다. '아, 너무 당황하면 이렇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엄마와 집에 데려다 준 남자친구,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내 가방의 행방을 묻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내 가방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럼 택시에 놓고 내린 게 확실하군'이란 결론을 내렸다.

으악! 가방이... 가방이... 사라졌다

이후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오후 2시 40분경 서울택시조합 홈페이지 유실물센터에 '택시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몇 시쯤 탔고 어디서 어디로 갔으며 어디서 내렸고 가방에는 지갑과 회사출입증, 명함 등 여러 가지가 들어 있다고.

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30분도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메일 확인하세요.' 난 '어떤 이메일을 말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핫메일'에 접속했다. 거기엔 신아무개란 사람이 보낸 메일이 도착해 있었고, 내용인즉슨 자신이 내가 내린 택시를 탔는데 가방을 주웠다는 것이다.

아니, 이런 기쁜 일이. 난 혹시나 늦을세라 문자를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신아무개가 아닌 윤아무개였다(전화를 받은 이는 자신은 신아무개가 아니고 윤아무개라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당시 난 그 사람이 윤아무개건 신아무개건 상관  없었다. 이내 난 가방을 언제 받을 수 있느냐, 사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등등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사람, 사례는 필요 없고 밥이나 사달라는 거 아닌가. 이렇게 착할 수가. 역시, 세상이 삭막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할 즈음, 윤아무개는 "지금 설을 맞아 멀리와 있다"고 했다.

26일 설날 회사 당직 근무를 서야 하는 내겐 무엇보다 그 가방이 필요했다. 부모님은 설을 맞아 큰댁이 있는 평택에 내려갔고 지난해 결혼한 언니도 시댁인 일산에 가 있었다. 출근을 하려면 가방 안에 있는 열쇠와 지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 외에도 그 가방 안엔 열흘 전 지름신이 강림했을 때 3개월 할부로 질러버린, 아직 할부금을 한 번도 안 낸 MP4와 휴대전화 충전기 등이 들어 있었다.

친절했던 그가 보내준다던 가방은 감감무소식

25일 오후 택시조합 유실물센터 게시판에 내가 올린 글.
 25일 오후 택시조합 유실물센터 게시판에 내가 올린 글.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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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사람에게 빨리 가방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윤아무개는 집 주소를 알려주면 고속버스택배+퀵을 이용해서 보내주겠다고,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해줬다. 그러면서 택배비 3만5000원을 자기 계좌로 보내달라고 했다. 가방분실 직후 신용카드와 직불카드, 보안카드 등 지갑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 놓았던 터라, 친구에게 부탁을 해 윤아무개 앞으로 돈을 송금했다.

그러나 돈만 보내면 바로 나가서 가방을 부쳐줄 것 같던 이 사람,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적어도 몇 시에 부치는지는 알아야 내가 기다릴 것 아닌가. 조바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4시30분경 다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 가방은 언제 부치실 거예요?"
"5시 차로 부칠 겁니다."

그렇게 30년 같았던 30분이 지났는데도 윤아무개에게는 연락이 없었고 참다못해 6시에 다시 한 번 핸드폰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헉…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밤 10시, 11시가 되도록 윤아무개가 부쳤다는 가방은 도착하지 않았다.

가방이 도착하지 않음과 동시에, 지병인 '걱정병'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평소 난 쓸 데 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내가 탄 버스가 고가다리나 강을 지날 때면 '혹, 이 버스 고가 아래로(혹은 강 아래로) 떨어지는 건 아닐까', 밤에 잘 때도 '혹, 도둑이 들지 않을까', '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 난 눈이 나빠서 앞이 잘 안 보이는데…'라는 쓸데 없는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날 걱정병이 도지면서 '혹시 그 사람 우리집 주소도 알고 우리집 열쇠도 들고 있는데… 혹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한 번 시작한 걱정은 잦아들지 않았고 결국 새벽 5시가 돼서야 잠이 들었다. 회사에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으니 달랑 1시간 잔 것.

이틀동안 시달렸는데... 뭐? 사기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해서 어느 정도 바쁜 일이 끝났을 때 다시 한 번 전화를 해봤다. 신호가 갔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아무개가 아니라 윤아무개 동생이란다. 이 동생, 처음엔 가방에 대해 모르는 척 하더니 나중엔 형이 자기한테 부치라고 시켰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동생, 윤아무개와 목소리가 비슷했다. 혹, 가방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의 심기를 건드릴까, "혹시 윤아무개씨는 아니시죠?"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아닙니다, 형제니까 당연히 목소리가 비슷하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부쳐달라고 했더니, 돈이 없어서 못 부친다고 다시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통화 도중 뭔가 횡설수설하는 게 석연치 않았고 더 이상 이 사람과 상대하기 싫어 나보다 4살 많고, 나보다는 산전수전을 더 많이 겪었을 것 같은 남자친구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리고 오후 4시쯤 남자친구가 통화해 본 결과, 돈을 요구하더란다. 그것도 5만 원을. 난 이틀 동안 시달린 게 너무 분해서 "그냥 가방 버리라고 해, 돈 주지마!"라고 해버렸다. 남자친구도 그닥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어서 "가방이 확인되면 돈을 보내주겠다, 계속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윤아무개는 "내일 오전에 연락드릴게요"라는 문자와 함께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더라는 것.

그렇게 '민족 대명절' 설날이 지나갔고 27일이 밝았다. 그런데 이놈, 오전에 연락주겠다고 해놓고 오후 6시가 돼도 연락이 없었다. '그냥 버렸다고 치자'라고 체념하고 있던 찰나에 날아든 남자 친구의 문자 메시지.

'그 놈 가방 안 가지고 있나봐. 포털 검색창에 윤아무개라고 쳐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컴퓨터를 켜 검색창에 '윤아무개'를 써 넣었다. 역시나, 그에게 당한 사람들의 글들이 화면을 메웠다. 인터넷을 찾아본 결과, 윤아무개는 전문 사기꾼이었다. 주로 사용하는 수법은 공연 티켓을 이용한 사기였다. 공연 티켓 이외에도 그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분실물 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고 접근해 자신이 물건을 습득했다며 사례금과 배송비를 요구하고, 송금을 받은 즉시 연락을 끊어버리는 수법을 쓰는 듯했다. 일명 '소액사기'인 것인데, 윤아무개에게 당한 사람들은 적게는 1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 정도를 사기 당했다.

이렇게 인터넷상에서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정보공유차원에서 만든 '더치트'라는 사이트에선 이름이나 전화번호, 계좌번호 등으로 사기꾼을 가려낼 수 있다. 이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로 윤아무개는 국민은행, 씨티은행, 우체국, 농협, 기업 등 많은 계좌와 8개 정도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잘난 척이 원수... 무슨 일이든 당황하지 말자

인터넷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정보공유 차원에서 만들어진 '더치트'라는 인터넷 사이트.
 인터넷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정보공유 차원에서 만들어진 '더치트'라는 인터넷 사이트.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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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난 가방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돈을 송금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틀을 꼬박 시달린 것이다. 그것도 남들은 맛있는 음식 먹고 친척들 만나는, '민족 대명절' 설날에.

사실 난 평소에 보이스피싱 등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기인 거 딱 티 나는데, 대체 왜들 당하는 거야' 이러면서 일전에 집으로 걸려온 보이스피싱 전화에 대고 "아저씨 이거 사기인 거 알거든요, 그만하시죠?"라고 말하는 등 잘난 척 아닌 잘난 척을 해왔다. 결국 잘난 척 하다가 된통 당한 것.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 지갑에 분명 돈이 들어 있는데 윤아무개가 돈이 없다며 택배비를 부치라고 한 것 ▲ 윤아무개는 내가 먼저 말한 것 이외에는 가방 안의 내용물에 대해선 단 한 가지도 알고 있지 못했다는 것 등등 분명 의심할 만한 상황을 그냥 넘겼다는 점이다. 작은 핑계를 대자면, 너무 너무 당황해서 내가 택시조합 홈페이지 유실물 센터에 글을 올렸던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아무개는 굉장히 교묘했던 것 같다. 우선 '사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나를 안정시켜 자신을 믿게 만든 뒤 배송비 명목으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나의 경우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배송비만 요구한 것인데, 몇몇 피해자들을 보면, 잃어버린 물건의 종류에 따라서 택배비와 사례비 금액이 달라진다. 한 가지 더 주의할 점은 간혹 택배를 보낼 때도 있는데, 택배를 보낸다고 해서 믿어선 안 된다. 상자 안에 광고지만 들어 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가방이 어디 있었는지, 궁금하세요?

상품권 사기나 콘서트 티켓 사기 등에 대해서는 종종 뉴스를 통해 들어왔지만, 유실물센터에 올린 글을 보고 사기를 치는 경우는 처음 본다. 그래서 난 28일 오전,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를 했다. 약 한 페이지 분량으로 상세하게 내용을 적어서. 나 이외에도 윤아무개에 대해 신고한 사람들이 많아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더 이상 안 나왔으면 좋겠다.

혹, 긴 글을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가방은 어딨냐'는 건데…. 말하기 부끄럽지만, 가방은… 24일 갔던 홍대 앞 술집에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던 중 바닥에 떨어진 듯하다. 당분간 주변인들에게 '민폐 유진'으로 불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태그:#인터넷사기, #유실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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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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