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 알 수 없다."그랬다. 2003년 7월,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내가 맡게 되었음을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처음 '장준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3년 3월 어느 날이었다.
노태우 군사정권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방송과 언론 역시 과거 '잊혀진 의혹'에 대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때 우연히 시청하게 된 방송이 문성근씨가 진행하던 서울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였다.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던 '재야인사 장준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신선한 감동이었다. 장준하는 무소불위의 유신 독재 권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고 '밀수 왕초'라며 공개 집회에서 서슴없이 비판했다. 결국 그 대가로 장 선생은 '국가원수 모독죄'로 잡혀갔다.
독립운동가로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서, 그리고 다시 <사상계>를 펴낸 언론인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우던 중 37번 체포되고 9번 감옥에 가야 했던 장준하. 어떻게 저런 분을 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장준하 선생의 그 굽히지 않는 민주주의 열망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유족에게 사건 발생 알려준 '괴전화'의 정체는?그런데 그런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아 숨졌다는 것이다. 방송을 보는 내내 정확한 사실을 잘 모르는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 당시 내 심정은 당연히 안타까웠고 너무나 답답했다.
"이제 우리는 장막에 가려진 장준하 사건의 한 구석을 조금 열어보았을 뿐입니다. 그 속에는 왜곡된 사실과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진실이 뒤엉켜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곳에서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들께서도 이제는 그 침묵을 깨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진실은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얻은 사회는 역사 앞에 언제나 떳떳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진행자인 문성근씨가 장준하의 의문사를 다루는 2부작을 모두 마치면서 남긴 이 말은, 그래서 오랫동안 젊은 나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 누군가가 반드시 꼭 밝혀줘야 할 억울함이니 꼭 밝혀져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 10년. 놀랍게도 내가 그 사건의 조사관이 되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우연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발족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공채 시험에 응시한 후 일정한 수습기간이 끝나 나에게 배당된 사건이 바로 그 '재야인사 장준하 의문사 사건'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에게 다가온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10년 전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서서 장 선생의 억울함을 규명하고 밝혀주기를 기대했던 그 간절한 심정처럼 부족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이 의혹을 밝힐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 하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편, 퍼즐 조각을 찾듯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던 우리 조사팀이 제일 알고 싶었던 진실은 하나였다. 누구나 궁금해 했고 지금 역시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 바로 사건이 발생한 1975년 8월 17일 오후, 장준하 선생의 집에 걸려왔다는 '괴 전화의 실체'였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당일 오후 3시경,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한다. <여성 동아> 1983년 12월호에 실린 김희숙 여사의 진술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어요. 집에는 저와 두 딸, 그리고 막내아들만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건 막내였어요. 한 1분 정도나 통화를 했을까요. 산에 올라 가셨다가 떨어지셨는데 서울서 사람들이 많이 와야 모셔올 수 있다고 하더래요. 목소리는 처음 듣는 사람이었구요."유족이 처음 장준하 선생 사건에 대해 의혹을 품게된 시작 역시 이 전화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975년 당시 전화는 지금처럼 흔한 때가 아니었다. 실제로 조사 과정에서 확인해보니 사건 당시 장 선생이 사망한 포천 약사봉 인근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는 단 한 대였다. 바로 이장 집에 설치된 행정 전화가 유일했다.
그런데 이처럼 전화가 흔치 않던 그 시대에 누구인지 자신도 밝히지 않은 이가 장 선생의 사고를 집에 알려준 것이다. 더구나 그 시각은 아직 장 선생의 사고가 경찰에 접수도 되지 않았으며 시신 역시 추락한 사고 현장 부근에 그대로 안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중 누구도 이런 전화를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문제는 유족의 입장에서 매우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일부 협조받은 중앙정보부 문서를 꼼꼼히 확인하던 그때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전에도 수없이 봤는데 그전에 보이지 않던 문서가 있었다. 놀랍게도 문제의 괴 전화를 한 이가 누구인지를 기록한 1975년 8월 17일자 중앙정보부 생산 '중요 상황 보고서'였다.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장준하는 8. 17 08:30 호림산악회(서울운동장 앞 소재) 회원 일행 41명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으로 출발 등반 도중, 동일 14:40분경 동 운악산 약사봉 계곡에서 실족으로 추락,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음. 시체는 검사 지휘를 받기 위해 사고 현장에 보존중이며 현지 경찰 3명이 현장을 경비 중에 있는데, 동 일행인 김용환(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30경 현장에 도착하였음."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 상황보고'라는 제목으로 1975년 8월 17일 오후 9시 작성했다는 이 한 장의 문서를 보면서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그 충격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이름을 한자 한자 읽고 또 읽었다.
김․용․환
목격자였다. 장준하 선생의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며 그동안 주장해 온 바로 그가 그동안 유족에게 전화하여 사건을 알려온 그 괴전화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중앙정보부 문서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직접 확인한 우리조차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했다. 정말 이 문서에 적혀 있는 이 김용환이 정말 목격자라는 그 '김용환'인지부터 명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용환'이라는 이름은 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만 보더라도 이들이 동명이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안에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냥 이름 석자만 있었다면 장담할 수 없겠으나 대상자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는 주소 덕분이었다. 중정 문서에서 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이름 옆에 '동대문구 이문동 거주'라고 주소가 적혀 있었는데 이는 목격자 김용환씨의 1975년 당시 주소와 일치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동 일행인 김용환'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바로 그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보한 이 중정 문서가 정말 신빙성 있는 자료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 당시 중정에 근무했던 관련자를 찾았다. 문제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부서의 책임자였던 H였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 "반정부, 반체제 인물에 대한 24시간 감청을 통한 정보 수집"이었다고 밝히면서 문제의 문건에 대해 "문서에 기재되는 실명은 사실로 확인된 것이며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면 보고서에 정확하게 기재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답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진술 역시 줄을 이었다. 또 다른 중정 관계자의 진술이었다. 그들은 "8월 17일자 '중요상황 보고' 내용 중에 장준하의 집에 전화했다고 적혀 있는 것은 해당 국에서 감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렇다면 김용환이라는 사람이 전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진술했다.
"중앙정보부 문서의 기재 내용이 정확한 사실이며 그렇지 않으면 실명을 기재하지 않는다"는 중정 관계자의 진술을 통해 마침내 괴전화의 실체가 누구인가를 확인한 그날, 우리는 이 새로운 의혹에 대해 김용환씨가 뭐라고 답변할지 궁금했다.
중정 문서에 대해 묻자, 김용환 "모두 조작이다""장준하의 집에 전화하여 사고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중앙정보부 문서에 제가 전화했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김용환'씨를 상대로 중정 문서에 기재된 내용을 토대로 사실 여부를 묻자 그는 부인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부인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의 반응은 더 강렬했다. 이 문서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역시도 잘 알기에 그의 반응은 절박했다.
나아가 그는 아예 "중앙정보부 문서는 조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정보부가 왜 진술인이 하지도 않은 행위를 했다며 보고서를 조작했겠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라고 답하며 거듭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랬다. 어쩌면 그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전화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앙정보부의 문서가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중정 생산 문서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으면 그것은 사실'이라는 중정 관계자 진술을 복수 이상으로 확보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용환씨는 사건 발생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진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파출소에 있었다고 하는 사건 발생 당일 오후 그를 당연히 봤어야 마땅할 파출소 경찰관 4인은 입을 모아 그를 본적이 없다고 분명히 확인했다. 또한 포천경찰서에서 밤을 새웠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사건 현장을 방문한 의정부지청 서돈양 검사 등은 8월 18일 오전 1시경, 전혀 다른 장소인 사건 현장에서 목격자를 분명히 만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이들의 진술 역시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같은 사례는 차고 넘쳐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모든 기록과 증언이 괴전화의 실체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있는데 그 혼자 또다시 아니라고 부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목격자'이며 '참고인'이었다.
2004년 1월 14일. 의문사위는 '장준하 사건 중간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은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국가정보원측에 협조되지 못한 추가 문서를 공개하도록 거듭 촉구했다. 그 날로부터 어느덧 만 8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김용환씨에 대한 나의 감정이 그렇다. 적어도 15번을 만나면서 나는 그와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몇 번은 그와 같이 밥도 먹었다. 조사가 늘 날카롭게 대립하며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연세가 많은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 어느 순간에는 그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언행이 안타까워 부질없는 말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이 사건이 왜 이렇게 복잡해졌는지 아세요? 정말 제가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한 축은 바로 선생님 책임입니다. 왜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신있게 설명을 못하세요? 내가 본 것은 무엇이고 내 행적은 이거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하셨으면 이 사건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정말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게 말씀 좀 해주세요."'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이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2004년 8월호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용환씨가 한 말이다. 그는 <월간 조선>과 이렇게 인터뷰하기 전에 여기서 말한 그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초면 끝날 진실'을 우리에게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조사관인 내가 '머리가 둔한 때문'이라면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겠다.
그래서 그가 <월간 조선> 인터뷰 후 다시 8년이 지난 2012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장준하 사건은) 사실상 종결된 것 아니냐. 두 번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를 했으니 이미 결론이 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둔한 조사관 고상만은 다시 묻는다.
1975년 8월 17일, 그날 장 선생과 포천 약사봉에서 당신이 본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만난 이들은 누구이며 장 선생의 집에 전화를 걸어 사고 사실을 알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장준하 사건, 김용환 위해서라도 재조사 이뤄져야
이 글을 쓰기 전, 솔직히 많은 고심을 했다. 혹여 이 글로 인해 그에게 무리한 비난이 쏟아지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심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첫 번째는 '숙명'이었다. 조사관으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양심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을 직접 조사한 조사관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고 알려주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독배'라고 판단했다.
특히 "장준하의 실족사를 목격한 사람이 있고 과거 의문사위에서 명백하게 조사하여 진실이 다 밝혀진 것임에도 또다시 무고한 이를 억울하게 몰아간다"며 비난하는 이들에게 왜 우리가 목격자라는 그의 주장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씨를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반드시 재조사 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었다. 터놓고 말해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장준하 선생 사건을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한 타살'로 믿을 것이다. 반대로 김용환씨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매우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굳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김용환씨에게 그가 진실을 밝힐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진짜로 무고하다면, 억울하다면 이것이 밝혀질 수 있는 방법은 이 모든 의혹에 대해 재조사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적 진술과 다르게 말하는 전직 검사와 경찰,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문서가 그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된 것이라며 바로 잡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지난 2004년 8월호 <월간 조선>과 김용환씨가 나눈 인터뷰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주장을 보고 매우 기뻤다.
"난 차라리 국정원이 장준하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사실도 없겠지만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그렇다. 이 모든 의혹을 규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그의 주장처럼 지금 존안되어 있는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의 '존안 문서 확보'다. 장 선생 사망 후 현재까지 장 선생의 사망을 전후한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는 이 글에서 언급한 김용환씨 관련 문서, 단 '한 장'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1975년 8월 17일 오후 9시 이후 '추가 보고' 문서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처럼 판단하는 것은 우리만의 추측이 아니다. 이 건과 관련해 조사했던 중정 관계자들은 "이같은 중요 상황 보고가 있었다면 당연히 이후 사건 현장을 방문한 검사, 그리고 검안했던 의사 등과 관련한 추가 상황 보고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이 사건 조사관으로서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많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재조사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끝내 장준하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다면 나에게 맡겨진 또 다른 '숙명'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장준하 선생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는 반드시 재조사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