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내용의 혈서를 썼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이다.
박정희 혈서설은 "1938년 5월경 학교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편지와 함께 만주군관학교에 보냈다"는 문경보통학교 동료교사 유증선의 증언(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다가 연령 초과로 1차 탈락하자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군관에 재차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만주신문>은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며 박 전 대통령의 편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밝히는 등 만주군 임관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만주신문>은 이어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만주국 군관 지원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세 번째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등 '꿈'을 이룬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군 중위로 활동했다.
지만씨, 배포금지 가처분신청 추가... 법원결정 따라 사전발간 무산될 수도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지난 10월 26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며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연구소에 끊임없이 욕설·폭언을 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박지만씨는 4일 서울북부지법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 사유를 추가해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법원이 지만씨 측의 결정을 받아들일 경우 인쇄가 이미 끝난 친일인명사전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게 돼 8일로 예정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법원은 앞서 국민보고대회 전까지 심리를 끝마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