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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마지막 밤에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29부에서는 '덕만의 도약'이라고 평가할 만한 큰 변화가 있었다.

임박한 일식을 앞두고 '기상 캐스터' 미실(고현정 분)의 '오보'를 유도해 미실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한 덕만(이요원 분)이, 이런 상승세를 놓치지 않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것이다.

이로써 드라마 속의 덕만은 죽은 언니인 천명공주(박예진 분)를 대신해서 왕위에 가장 근접한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개 낭도에 불과했던 덕만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일대 도약을 이룬 셈이다.

천명공주 사후에 왕권도전을 선언한 후로부터 덕만의 도약을 이룩하는 데에 기여한 드라마 속의 원동력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덕만의 의지와 기지였고 또 하나는 유신·알천·비담 등의 '외조'였다. 그중에서도 미실을 꼭 꺾고야 말겠다는 덕만의 '의지'와, 일식과 관련해서 허위 정보를 미실에게 교묘히 흘린 덕만의 '기지'가 가장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평왕이 후계구도를 수정한 이유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픽션에 불과하다. 고난 극복과 비범성을 바탕으로 한 영웅의 이야기에서는 으레 주인공의 의지와 기지 등이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기 마련이다.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덕만(이요원 분).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덕만(이요원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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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의 역사에서도 덕만의 개인적 자질이 돋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에서는 덕만의 성품이 관대하고 명민하며 예지력이 풍부하다고 했고, 위작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서는 덕만이 제왕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객관적 정황을 놓고 보면, 단순히 위와 같은 주관적 자질 때문에 덕만이 언니를 제치고 제1공주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물론 성품이나 예지력 혹은 외모도 부분적으로 한 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국제정세가 덕만의 도약에 더 중요한 몫을 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등을 종합하여 덕만의 도약에 기여한 당시의 객관적 국제정세를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년)은 무려 53년간이나 왕위를 유지한 군주다. 반세기를 넘는 그의 치세를, '대외관계의 안정성 여부'를 기준으로 나누면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집권 1기는 대외관계가 안정적이었던 579~601년이고, 집권 2기는 고구려·백제의 일상적인 침공에 시달리던 602~632년이었다.

신라가 602년 이후로 고구려·백제의 침공에 시달린 것은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와 밀접한 상호 연동성을 갖는 현상이었다. 북중국과 남중국이 상호 대결하던 남북조 시대(4~6세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개편을 시도함에 따라 역내 정세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고구려·백제가 602년부터 만만한 신라를 상대로 영토팽창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나라가 '요절'하고 당나라가 건국(618년)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579년에 즉위한 진평왕은 사반세기가 다 되도록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집권 1기의 22년 동안에 후계자 지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백제의 침공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602년 이후 즉 집권 2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후계자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앞의 <화랑세기> 용춘 편에 따르면, 603년경에 진평왕은 자신의 사촌이자 폐주 진지왕(재위 576~579년)의 아들인 김용수(화랑세기에 따르면 용춘의 형)에게 왕위를 물려줄 목적으로 용수와 천명공주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용수를 자신의 사위로 만들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용수-천명의 후계구도가 매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의 대외관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602년에 아막성(지금의 전북 남원)을 침공해온 백제군을 물리친 데에 이어, 603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막느라 진평왕이 직접 북한산성까지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고 돌아온 후에 용수-천명의 후계구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국사기> 권4 '진평왕 본기'에서는 진평왕이 북한산성까지 올라갔다고 한 데에 비해 <화랑세기> 용춘 편에서는 진평왕이 한수(한강)까지 올라갔다고 했지만, 한수보다는 북한산성이 보다 더 구체적인 표현이므로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표현을 따르기로 한다.

서라벌에서 북한산성까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 용수-천명 커플을 중심으로 후계구도를 짰다는 점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와 싸우는 과정에서 진평왕이 후사(後嗣)의 불안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폐주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가 천명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후계자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급박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도성에 있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전방까지 출정한 사실은 왕이 용맹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만큼 대외관계가 급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적군을 막으려면 왕의 주변에 있는 군대라도 동원해야 했고, 그러자니 자연히 왕 자신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급하다고 하여 도성의 군대만 전방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서라벌에 남을 경우에는 고구려가 아닌 내부의 적으로부터 쿠데타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아들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후계자 지정을 미뤄온 진평왕은, 위와 같이 직접 전쟁터까지 나가서 적군을 막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위기 상황을 겪은 뒤에야 용수-천명을 중심으로 후계구도를 급히 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여러 해 뒤에 진평왕은 후계구도를 전면 수정했다. 이번에는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줄 목적으로 덕만과 용춘의 '결합'을 성사시켰다. 여자인 덕만을 용춘이 잘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조합을 구상해낸 것이다. 결혼이 아니라 결합이란 표현을 쓴 것은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살림만 차렸기 때문이다. 이로써 용수-천명 중심의 기존 후계구도가 취소되고 덕만-용춘 중심의 새로운 후계구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용수-천명'에서는 남자인 용수를 앞에 쓰고 '덕만-용춘'에서는 여자인 덕만을 앞에 쓴 것은, 각각의 조합에서 용수와 덕만이 후계자이고 천명과 용춘은 '도우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만들어놓은 용수-천명 중심의 후계구도를 뒤집고 덕만-용춘 중심의 후계구도를 새로 짜려면 어떤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수십 년간 왕권을 행사한 노련한 군주가 아무런 정치적 명분도 내세우지 않고 후계구도를 갑자기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의 <화랑세기> 용춘 편에서는 덕만이 제왕의 면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덕만을 후계자로 세웠다고 하지만, 단지 그런 모호한 사유만으로는 후계구도를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후계구도를 바꿀 만한 객관적인 정치적 상황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는 게 이치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602년부터 갑작스레 불어 닥친 고구려·백제의 침공 위협 앞에서 603년에 사촌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언한 왕이 그로부터 여러 해 후에 갑자기 자기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할 때에는, 크게 2가지 경우 중 하나가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2가지 경우란 무엇인가? 하나는 고구려·백제의 침공이 잠잠해지면서 대외관계가 안정되어 603년의 결정을 취소해도 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경우이고(제1경우), 또 하나는 고구려·백제의 침공이 한층 더 격화되면서 대외관계가 더욱 더 불안정하게 되어 603년의 결정을 무시해도 될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경우다(제2경우).

이 둘 중에서 진평왕 집권기의 실제 양상을 반영하는 것은 제2경우다. 진평왕 사망 3년 전 즉 서기 629년까지도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에 항상 시달렸다. 진평왕은 대외관계의 안정을 조건으로 한 제1경우를 배경으로 후계구도를 바꾼 게 아니라, 대외관계의 불안정을 조건으로 한 제2경우를 배경으로 후계구도를 변경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해 오는 고구려·백제로 인해 신라의 대외관계가 한층 더 불안정해지던 때에, 진평왕은 용수-천명에서 덕만-용춘으로 후계구도를 변경했던 것이다.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국제정세와 덕만의 제왕다운 면모를 명분으로 진평왕이 집권 2기의 어느 시점에서 후계구도를 다시 손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외관계가 한층 더 불안정해지던 때에 "이런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덕만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명분으로, 진평왕이 후계자 지위를 사촌에게서 자기 딸에게로 옮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안정의 심화라는 객관적 국제정세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사촌에게 주려 했던 왕위를 자기 딸에게 넘겨주겠다는 '속 보이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덕만 자신의 개인적 자질에 더해 불안정한 국제정세도 덕만의 일대 도약에 한 몫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백제의 계속되는 위협이 신라 후계구도 교체의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덕만의 도약에 고구려·백제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덕만이 주관적인 의지와 기지를 발판으로 제1공주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이와 같이 덕만의 개인적 역량에 더해 객관적인 국제정세까지 함께 작용한 덕에 덕만이 언니를 제치고 제1공주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덕만, #덕만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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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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