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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주점 건물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경찰조사에서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진술했고, 언론은 이를 '묻지마 범죄'라고 진단했으며 경찰과 정부는 남녀 화장실 분리를 대책으로 내세웠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에는 '페미니즘 리부트(reboot, 재가동)'가 일었다. 많은 사람들이 젠더 폭력과 여성 혐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미투' 운동과 2023년 게임업계 사상 검증을 거쳐 2024년 시민들은 다시 강남역에 모였다. 불과 일주일 전, 한 여성이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교제살인을 당한 곳이었다. 어느 시민들은 이 모든 걸 잊지 않고 마침내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꽁꽁 얼어붙은 백래시 위로 페미가 걸어다닙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8주기 추모행동 현장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8주기 추모행동 현장
ⓒ 이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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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8주기 추모행동'이 열렸다. 34개 여성단체,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의 공동 주최로 많은 시민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함께했다. 현장은 무거웠지만 희망찼고 동시에 두려운 공간이었다. 페미니즘을 향한 지나한 광분이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이다.

지난해 게임업계에선 '페미니스트'라고 지목된 이들이 부당해고를 당했고, 기업들은 사과문을 올렸다. 또한 페미니즘 관련 기사 보도나 콘텐츠를 제작한 이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신상 털기'가 이뤄졌다. 페미니즘이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금기어가 된 요즘, 현장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스태프는 재차 "카메라에 찍히길 원하지 않는 시민은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손팻말로 얼굴을 가려달라"고 공지했고 마스크를 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맨 얼굴로 손팻말을 들던 참가자가 촬영 시간에 황급히 얼굴을 가리거나 마스크를 착용하는 모습이 보였다. 집회 입장 전 안내문 배포처에선 누군가 손팻말에 적은 "꽁꽁 얼어붙은 백래시 위로 페미가 걸어다닙니다"가 놓였다. 요즘 유행하는 밈을 풀어낸 문구였다. 참가자의 센스에 웃다가도 씁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각오는 들끓었다. 이날 추모 행동의 슬로건은 '지금 우리가 반격의 시작이 될 것이다'. 참가자들은 손팻말에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적었고 이를 모아 글자 '반격'을 채워 넣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두 글자 앞에선 참가자들은 휴대폰 플래시와 함께 "강남역에서 다시 반격하겠다"고 외쳤다. 그들은 한국의 페미니즘을 정비했고, 다시 탈환을 노리고 있다.

"우리가 힘차게 연대해 세상을 바꾸자"
 
행사 주관처 '서페대연(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의 참가자들
 행사 주관처 '서페대연(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의 참가자들
ⓒ 이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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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추모행동에는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했다. 현재 '서페대연'에서 활동하며 현장 스태프로 함께한 A씨는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참여했다"고 밝히며 "현장 스태프로서 일하면서 당당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경험을 했다. 오늘의 기억을 갖고 앞으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 살아갈 것"이라 다짐했다.

요즘은 페미니스트이지만, 정체성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이들이 많다. 이에 "그들의 마음이 정말 공감된다. 하지만 꼭 한 번 현장에 나왔으면 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온라인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에 진짜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현장에서 참가자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것'이란 편견을 깨는 이도 존재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에서 활동 중인 B씨는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고, 개인의 삶도 바꿀 수 있다. 그 개인 안에 분명 남성들도 있다. 남성들이 이 문제에 참여하면 자신들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에 더 힘을 보탤 수 있다"며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페미니즘을 외치는 현장은 뜨거웠고, 따뜻했다. 공동 주최 단체명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열띤 환호를 보내고, 사회를 풍자하는 참가자의 발언에 웃음을 터트리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참가자들은 '우리'가 되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에 적힌 문구가 떠오른다.

"네가 바뀌었고 내가 바뀌었다. 우리가 힘차게 연대해 세상을 바꾸자."

태그:#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서페대연, #강남역살인사건, #페미니즘, #백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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