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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선제와 같은 권력 구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렸던 1987년 9차 개헌 당시 경제 분야에 한국 재벌들의 눈엣 가시와 같은 조항이 새로 생겼다.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헌법 119조 2항이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 시장에 대한 규제와 조정을 명문화한 이 조항은 대기업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재벌 규제 정책의 버팀목이 됐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든 사람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119조2항을 저지하려 했지만 김 전 수석은 "자본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며 전두환 대통령까지 설득해 관철시켰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재벌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됐다.

 

부유층에 대한 감세와 규제 완화 등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충실하게 따르던 이명박 정부마저 격차를 줄이는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공생경제'를 천명하고 나선 최근 119조 2항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대중소기업 상생과 친서민 정책 추진의 근거로 이 조항을 들고 있고 민주당에서는 아예 헌법119조 경제민주화 특위를 당내에 만들었다. 현재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당 강령에 넣자는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16일 김종인 전 수석을 부암동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전 수석은 헌법119조 2항이 다시 주목받는 것에 대해 "재벌들, 경제적 강자들의 논리만 시장에서 관철되면 극한 대립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자본주의 자체가 망가진다"며 "시장경제를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탐욕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조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은 이 대통령이 공생발전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이 정부 들어와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다 풀었다, 시장에서 탐욕을 절제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없앤 것"이라며 "정부가 헌법대로만 하면 우리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 공생발전이니 공정사회니 번지르르한 말을 만들 필요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이 헌법을 한번 읽어 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자유 확대를 추구하는 보수측에서 119조 2항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업에 언론이 장악돼 있고 대형 로펌이 법률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보수적인 헌법재판소 판사들은 모두 기업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우려했다.

 

미국과 그리스의 재정위기를 '복지 포퓰리즘' 탓으로 돌리는 청와대의 인식에 대해서는 "복지를 하지 않겠다는 핑계"라며 "복지 수준이 가장 높으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독일이나 북유럽의 예를 들지 않는 것은 그런 정책을 펼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김 전 수석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복지 포퓰리즘'이 재정 위기 원인? 복지 않겠다는 핑계"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생발전'을 임기 말 국정운영 비전으로 제시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그게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부가 시장 경제의 모순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자연스럽게 따뜻한 시장이 된다. 그런데 공정이니, 공생이니 말만 앞세우고 뭐 딱부러지게 제시한 게 없다.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 이 대통령은 미국과 그리스의 재정위기가 복지 포퓰리즘 때문이라는 언급도 했다.

"복지를 하지 않겠다는 핑계에 불과하다. 그리스 재정위기는 복지 때문이 아니다. 경제 역량이 부족하면서 재정 통계를 속이면서까지 유로존에 가입한 탓이 크다. 유로가 아니라 자국 통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평가절하해서 수출을 늘리는 등의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유로에 묶여서 불가능했다.

 

미국은 금융 거품을 해소하는 데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다 위기를 맞아 신용등급이 강등된 것이지 복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복지가 문제라면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지 지출을 많이 하는 나라인데 왜 문제가 없나. 잘 하고 있는 나라의 예를 들지 않는 것은 그런 정책 능력이 없다는 소리다. 특정한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복지가 재정위기를 초래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전개해서는 안된다. 재정 능력을 초과하는 복지는 할 수도 없다."

 

- 미국의 재정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뭐라고 보나.

"2008년 미국이 초래한 금융위기는 월가에 대한 지나친 규제 완화로 탐욕이 무한히 발휘될 수 있도록 놔둔 게 원인이었다. 특히 미국은 유럽과 달리 사회 정책적으로 복지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한 나라가 아니다. 주로 금융정책을 써서 돈을 풀고 가난한 사람들도 자기 집을 갖게 해줬다. 그런데 사람들이 집 값 거품을 자산 증가로 착각하고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했고 거품이 붕괴하고 말았다. 금융 거품 해소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다 재정에 위기가 왔고 신용등급까지 하락했다. 그동안 달러가 기축통화라고 마구 찍어낸 것도 재정 적자를 심화에 한 몫했다."

 

- 이 대통령이 이런 국내외적인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2013년까지 균형재정 달성을 목표로 하겠다고 했는데 가능하다고 보나.

"균형재정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과도한 정부 부채는 문제지만 정부가 쓸 돈을 쓰지 않는 것도 문제다.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 대비 부채비율이 34%정도인데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숨겨진 부채가 걱정이다. LH공사만 해도 무슨 능력이 있어서 100조가 넘는 부채를 졌겠나. 전부 국가가 보증하니까 그렇게 빚을 진 것이다. LH공사에 문제 생기면 전부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돈이다. 균형재정 한다고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통계치에 연연할 게 아니라 공기업 부채 떠넘기기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 재정건전성을 위해서라면 감세를 철회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감세는 절대 해서는 안된다. 미국 재정이 그 꼴이 된 게 감세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오늘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과 같은 (슈퍼)부자들에게 증세하라고 했다. 자본소득세율이 39.9%에 달했던 1970년대 중반에도 세율 때문에 합리적인 투자를 중지하는 투자자들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참 잘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감세 효과를 측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감세 때문에 소비가 늘고 투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조세이론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SSM 규제 위헌이라는 대통령, 헌법 한 번도 안 읽었다는 이야기"

 

- 정치권에서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대통령도 자본의 자유보다는 자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시장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고 했는데.

"2년 전쯤 이 대통령이 서울의 한 재래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상인들이 장사가 안 된다며 대형마트를 규제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법을 만들더라도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면 정부가 진다는 답을 했다. 이 대통령이 헌법을 한 번도 안 읽어봤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국회에서 만든 기업형슈퍼마켓(SSM) 관련법에 대해 헌소가 제기된 적이 있나. 헌소를 제기해도 119조 2항 때문에 위헌 판결이 나올 수 없다. 대통령이 먼저 헌법을 한번 읽어 봤으면 좋겠다. 정부가 헌법대로만 하면 우리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 그게 바로 따뜻한 시장경제다. 공생발전이니 공정사회니 번지르르한 말을 만들 필요도 없다."

 

- 청와대에서는 대기업의 소모성 자재구매대행(MRO) 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등에 과세 방침을 밝히는 등 구체적인 규제 움직임도 보이고 있는데.

"선거 앞두고 민심이 좋지 않으니까 하는 립서비스처럼 들린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다 풀었다. 시장에는 탐욕이 작동하는데 지나칠 경우 시장 자체가 망가진다. 그래서 탐욕을 절제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그걸 다 풀어 놓고 이제와서 세금으로 다스리겠다고 하니 진정성이 와 닿지 않는다."

 

- 대중소기업 간 격차와 더불어 사회적 양극화 심화가 심해지면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헌법 119조2항이 주목받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 같은 권력 구조 문제가 초점이었던 1987년 개헌 때 이 조항을 넣은 이유는 뭔가. 

"1970년대 재벌 위주의 성장 전략을 펴면서 재벌의 힘이 커 갔다. 아무런 견제 장치 없이 이대로 가면 재벌의 힘이 정부를 압도하면서 견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 시점을 6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는 1990년대 초쯤이라고 예상했다. 재벌들, 경제적 강자들의 논리만 시장에서 관철되면 극한 대립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자본주의 자체가 망가진다.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돼 있는데 이 조항만 가지고는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권력구조나 국민의 기본권 조항을 명문화 해놓은 것이다. 시장경제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기업의 창의를 존중한다'(119조1항)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시장경제를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실패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조항이 반드시 필요하다."

 

- 당시 대기업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1987년 헌법 개정 때 내가 국회 헌법특위 경제조항 분과위원장을 맡으니까 전경련이 난리가 났다. 헌법 개정 관련 홍보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예산도 20억이나 배정했다. 당시 정주영 전경련 회장과도 두 시간 넘게 자본주의가 뭔지를 놓고 토론한 적도 있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탐욕에서 나오지만 제도적 장치를 통해 어느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본주의 자체가 망가진다'고 말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왜 119조 2항을 넣었으냐고 묻길래 '자본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119조 2항 없으면 보수적인 판사들 모두 기업편 들 것"

 

- 국가 규제 최소화를 추구하는 보수나 전경련과 같은 이익단체들은 119조 2항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규제를 싫어하는 보수쪽에서도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도) 법률만 아는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한다. 공공복리를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한 37조 2항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항에는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라고 돼 있다. 119조 2항이 없다면 헌법재판소에서 논쟁하기 좋은 조항이다.

 

기업에 언론이 장악돼 있고 대형 로펌이 법률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지식인들까지 그러면 보수적인 헌법재판소 판사들이 어떻게 판결하겠나. 전부 기업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1935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 제동이 걸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 119조 1항이 원칙이고 2항은 예외적으로만 적용된다는 해석도 있는데.

"1항만 가지고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2항이 있어야만 시장경제가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두 조항이 따로 놀 수 있겠나. 둘은 한몸이다."

 

- 119조 2항이 있음에도 현재 재벌의 힘이 정부를 앞질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박형준 대통령 특보가 언론 인터뷰에서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가 망할 수 있다고 했더라. 정치인들이 그런 이야기하는 게 내년 선거를 의식한 측면도 있는데 우리 경제가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안정과 경제발전에 큰 장애가 생길 것이라는 '각성'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미국도 19세기 말에 독과점 문제가 심각했었는데 20세기 초에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화당 대통령인데도 독점을 깨고 기업의 횡포를 막는 정책들을 시작했다. 이게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면서 미국사회가 발전과 안정의 토대를 쌓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걸 미국의 3차 각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도 정부 혹은 정치가 지나친 탐욕과 경제력 집중을 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부는 작지만 강력해야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 정부의 힘은 경제 권력과 이익집단을 넘어서야한다. "

 

"박근혜,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성숙, 대권에 가장 근접"

 

- 본인은 부인해도 박근혜 전 대표의 멘토로 불리고 있다. 박 전 대표는 대선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보나.

"박 전 대표는 2007년 경선에서 패한 후 승복하고 인내해 왔다. '줄푸세'를 주장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고의 변화도 경험했다. 말도 조심하고 정치인으로서는 굉장히 성숙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보장법 개정안에 대해서 세미나도 하는 등 복지에 대한 구상도 다듬어 가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려면 탐욕스럽지 않고 주변(관계)가 간단해야 하다. 친인척 등 주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대통령과 비슷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힘들다. 또 이익집단이나 경제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지금 거론되는 후보들 중에서는 박 전 대표가 가장 (대권에) 근접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필요한 준비는 다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야 대권구도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정도의 수준이다. 한나라당은 선택의 여지가 없고 (본선에서) 정권 심판론을 극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 박근혜 전 대표가 "자립·자활이 우리가 해야 할 복지"라고 말했다.

"국가가 제공해야 할 복지 중에 자활·자립 지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책임지고 (현금 이전 형태로) 관리해야 할 계층이 있고 국가가 조금만 다리 역할을 해주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계층이 있다. 복지는 복합적으로 작동해야지 한 쪽만 강조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태그:#김종인, #헌법, #119조2항, #공생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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