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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재보선 결과로 '심고'를 겪는 국민 중 한 사람이다. 나라와 고장의 진정한 명예를 위해 야당 후보 선거대책본부 상임고문이라는 직함으로 적극 선거운동을 했던 사람인만큼 충격과 허탈감이 크다. 세월호 유족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나는 올해 7월부터 실시된 기초연금 지급이 새누리당 압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여당의 압승과 야권의 참패에 관한 갖가지 분석과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 지급이 선거운동을 하는 내게 위력적으로 다가왔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기초연금 20만 원 받고 뿌듯해 하는 노인들

7.30보궐선거 투표가 실시되는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 팔달구 율촌초교 내에 설치된 수원병 화서2동 제 6투표소에서 한 시민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 '소중한 한표' 투표함 속으로 7.30보궐선거 투표가 실시되는 30일 오후 경기도 수원 팔달구 율촌초교 내에 설치된 수원병 화서2동 제 6투표소에서 한 시민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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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일을 5일 앞둔 7월 25일 농협에 가서 내 노친의 통장을 자동인출기에 넣어보고, '20만 원'이 찍혀 나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새누리당의 승리를 예감했다.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재보선을 치르는 15개 선거구 전체에서 기초연금 20만 원이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리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긴장했다. 노년층 유권자들을 대할 때는 지레 기가 죽었다. 나도 이미 노인 연령으로 접어들었지만, 내 또래들을 포함해 노년층을 대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가뜩이나 노년층 앞에서는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기초연금 20만 원이 '살포'된 다음부터는 더욱 막막했다. 

투표 전날 성당에서 만난 한 자매님은 내게 스스럼없이 말했다. "20만 원을 받고 보니 마음이 뿌듯해진다"면서 "내일 열 일을 제쳐두고 투표장에 가서 1번을 찍겠다"고 했다. 70대인 형제님 한 분도 "누가 뭐래도 1번을 찍는 게 도리"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야당 후보를 위해 헌신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내게는 전혀 미안한 마음도 없는 듯했다. 그저 20만 원(또는 부부 합해 32만 원)을 받은 사실이 그들에게 오롯이 뿌듯함을 안겨준 듯했다.

나는 지난 대선 때 기초연금 공약은 박근혜 후보만이 아니라, 문재인 후보도 했다는 걸 설명하려 했지만, 그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한 초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 표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술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생고를 해결하고 경제를 발전시킨 덕에 그 딸이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20만 원씩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그는 내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진영 정책위 의장 여의도 당사에서 제18대 대선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진영 정책위 의장 여의도 당사에서 제18대 대선 정책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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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 원씩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당선 후에는 그 공약을 철회했다. 정부는 소득 하위 70%에 속하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최고 20만 원까지 차등 지급한다는 내용의 최종안을 마련했다.

보건복지부는 2013년 9월 26일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택적 복지 방향으로 기초연금제도를 수립하고, 2014년 7월부터 시행됐다.  

호남인들의 이정현 선택이 고도의 정치 의식? 글쎄

7.30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17일 오후,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순천 연향동 거리에서 자전거를 끌고다니며 시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7.30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 시작일인 17일 오후,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순천 연향동 거리에서 자전거를 끌고다니며 시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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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로 불리는 새누리당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전남 순천·곡성 선거구에서 당선한 사실을 놓고 갖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지역감정을 극복했다는 말도 있고, 호남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이 진보했다는 분석도 있다. 호남 유권자들의 그런 선택이 영남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을 견인할 거라는 비약적인 논법도 등장했다.

이정현의 '예산폭탄' 공약 덕이라는 말이 특히 내 신경을 자극한다. 누적된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지역발전을 절실히 소망해 이정현을 선택했다는 논법도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곳 유권자들이 대의를 저버리고 소리(小利)에 집착했다는 얘기가 된다. 국회의원은 일차적으로 국정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지역발전을 위해 뛰는 사람이 아니다. 지역발전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우선은 국정 쪽에 가치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

나는 순천·곡성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을 스스로 극복하는 고도의 정치의식으로 박근혜의 복심인 이정현을 선택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현 정권의 실세라는 점, '예산폭탄'의 내용들과 관련하여 볼 때, 7월 25일 기초연금 첫 지급 이후 닷새 뒤 치러진 선거에서의 돈의 영향력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될 뿐이다.

"20만 원을 찾아서 손에 쥐니 아주 뿌듯해요. 내일 열 일을 제쳐두고 투표장에 가서 1번을 찍을래요."

한 노인의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누가 뭐래도 1번을 찍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속내를 드러낸 70대 선배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유권자들의 시민정신, 올바른 주권의식의 확립은 요원하다는 비감 어린 생각도 든다.


태그:#7.30국회의원 보궐선거, #기초연금, #6.8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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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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