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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의욕이 넘치는 날이 있다. '잘해보자'며 집을 나섰는데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만큼 추웠다. 칼바람이 불고 빠른 속도로 눈이 내렸다. 붐비는 신도림역에서 인파를 뚫고 전철을 갈아탔다. 천안행 지하철은 늘 만원인데 인천행은 거의 여유롭다. 잔뜩 늘어선 줄을 보고 한숨을 쉬다가도 막상 인천행에 같이 오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 안도한다. 그날도 그랬다.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건너편의 빈 의자를 보고 있었다.

지하철은 재밌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소리와 동작을 분출한다. 빈 자리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 '다음 역에서 누가 탈까? 어떤 사람이 저기 앉을까?'

할머니 4인방이 전철에 올랐다. <꽃보다 누나>에 나올 것 같은 유쾌한 할머니들이다. 노인분들의 이야기는 귀를 쫑긋하게 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엿들을 수 있어서다. 건너편에 앉은 할머니들이 소리를 내자 추위에 죽었던 의욕이 다시 살아났다. 레이더 풀가동이다.

이날의 주제는 시집살이와 살림이었다. 어느 집의 막내아들과 결혼한 듯한 할머니가 뒤늦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내가 막내였잖아. 형님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바보처럼 내가 혼자 다했어. 지금 같았으면 나도 안 해버리던가 같이 하자고 했을텐데."

옆에 있는 할머니가 받아쳤다.

"옛날에는 그런 생각도 못하지. 시어머니를 어떻게 감당할거야."

그 말을 듣던 또 다른 할머니가 한 마디 얹는다.

"옛날에는 뭣도 모르고 그냥 다 그런가보다 했지 뭐."

한 할머니가 눈이 온다며 말을 꺼냈지만 이야기는 또 옛날로 이어졌다.

"우리 때는 얼마나 눈이 많이 왔어. 요즘은 정말 따뜻해졌어."
"맞아. 그때는 그렇게 추워도 고무장갑 없이 다 설거지 했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흥미진진했다. 극의 필수요소는 역시 악역이다. 끝에 앉은 할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했는데, 할머니들의 수다가 마뜩잖았는지 기어이 큰 소리를 냈다 .

"아이, 거 참 더럽게 시끄럽네. 더럽게 시끄러워."

호탕했던 수다가 소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유별난 할아버지에 대해 그냥 웃어 넘기시는 듯 했다.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다. 옛날 여느 마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을 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에 주름은 좀 덜했겠지만.

할머니들이 내렸다. 지팡이를 잡고 옷깃을 여미고 소녀처럼 걸어갔다. 그 모습이 무척 초록이라 나도 모르게 일흔의 내 모습을 그려봤다. 지금이야 서른 언저리에서 앞날을 걱정하며 끙끙 앓지만 언젠가는 나도 돌아볼 날이 더 많은 노인이 되겠지.

고령화 시대니 실버 산업이니 말은 많은데 정작 스스로의 노년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뭘 먹고 살지도 막막한 날들 가운데 어떻게 늙어갈지에 대한 고민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의욕에 넘치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금세 무기력해진다. 휴대전화 사진첩을 넘기다 할머니 4인방에 멈춰섰다. 열심히 웃으면서 살고 싶어지게 하는 사진이다. 일흔의 내가 오늘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사진 속 할머니들처럼 과거를 유쾌하게 회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태그:#지하철, #고령화, #노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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