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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춘길씨 사망진단서. 3월 6일 입대한 이씨는 불과 13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들을 만나야 했다.
 고 이춘길씨 사망진단서. 3월 6일 입대한 이씨는 불과 13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들을 만나야 했다.
ⓒ 한국워치타워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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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을 찬 인사장교와 실탄띠를 두른 기간병 4명이 저를 차에 싣고 어딘가로 갔습니다. 무릎까지 물이 차는 웅덩이에 저를 세우고 손을 뒤로 묶어 두고 눈에는 검은 띠를 묶어 둔 채 '사형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김교형씨 증언)

지난 16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군사정권 시절 군에서 사망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 군의문사위 조사 결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대다수를 차지해 온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비인간적인 구타와 수모, 살해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군의문사위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이춘길·정상복·김선태·김종식·김영근 등 5명의 청년들은 모두 입대한 지 한 달도 안 돼 조직적인 폭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군의문사위 결정문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이 겪었던 '잔혹한 시간'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눈 가린 채 손 뒤로 묶고 '총살하겠다' 협박" 

지난 1976년 2월 21일 방위병으로 입대한 정상복(당시 22세)씨는 입소 다음날부터 총기 수령을 거부해 동기생들이 보는 앞에서 총기 개머리판과 워커발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눈도 못 뜰 정도"로 얻어맞은 정씨는 군 영창을 거쳐 교육대로 복귀한 뒤 "손이 퉁퉁 붓고 얼굴에 맞은 흔적이 남아" 퇴근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정씨는 다음 기수 후배들과 훈련을 마치고 퇴소했다가 다음날 새벽 동해병원 입원실에서 피를 토하고 숨졌다.

같은 해 3월 6일 방위병으로 입대한 이춘길(당시 25세)씨는 집총거부로 군 영창에 들어가자마자 곤봉으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발바닥을 맞은 것으로 돼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빨갱이"라고 욕을 퍼붓던 헌병들은 '원숭이 철창타기' 등 가혹행위를 하며 '경봉'이나 '대나무 뿌리'로 고문을 가했다.

군의문사위에서 조사를 받은 헌병 김아무개씨는 "근무자가 술을 마시고 오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일단 매질부터 했다"며 "근무 교대할 때마다 모두 구타로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배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하루 전체 밥량이 보통 한 움큼 정도 밖에 안 됐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영창 복도에서 폭행 당하던 도중 주저앉아 의무실로 옮겨졌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입대한 지 불과 13일 만인 3월 19일 세상을 등졌다.

집총거부 뒤 물고문과 얼차려를 받다 숨진 고 김종식씨.
 집총거부 뒤 물고문과 얼차려를 받다 숨진 고 김종식씨.
ⓒ 한국워치타워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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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23일 훈련소에 입소해 20일 만에 숨진 김종식(당시 20세)씨는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씨와 훈련소에서 같이 생활한 행정병 동료는 "당시 소대장 정아무개 중위가 샤워실로 끌고 가 물탱크(가로 3m, 세로 1.5m, 깊이 0.7m)에 머리를 수차례 담갔다 빼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또 영하의 날씨에 속옷만 입고 연병장에 서 있는 얼차려를 받았다고 한다. 반복된 구타와 얼차려를 받던 김씨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쳐 사망했다.

이 밖에도 밖으로 끌고 가 눈을 가린 채 "총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방독면을 벗긴 채 가스실에 집어넣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빈 드럼통에 집어넣고 언덕에서 굴리는 고문도 당해야 했다. 사망한 김영근씨와 같은 시기에 입대한 여호와의 증인 교우 허아무개씨는 "어떤 대위가 저를 아무도 없는데 끌고 가더니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 안 받지, 너 묶어 놓고 강제수혈 시키겠다'고 협박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왕국회관 급습... 구속 기다리는 숫자만 500명

군의문사위가 집총거부를 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5명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한 이유는 이런 비인도적 행위가 조직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군의문사위 조사결과 여호와의 증인들은 훈련소 입소 직후부터 기간병, 초급지휘관(소대장, 중대장), 헌병에게 차례로 인계되면서 무차별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지휘계통이 아닌 '타 중대 중대장'까지 나서 잔혹하게 폭행했다.

5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은 당시 군사정권의 방침 때문이었다.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병무청을 신설하고, 1973년 "병역기피자와 부모가 이 사회에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한 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국방부와 병무청의 '검거 대상'이 돼 버렸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병무청 직원, 검찰, 경찰은 1975년 3월 9일 부산시내 19개 왕국회관(여호와의 증인 집회 장소)를 급습해 63명을 강제입영 시키기도 했다(3.9 사태). 

특히 군은 "여호와의 증인을 한 순간도 놀리지 말고 재복무하도록 하라"는 지침을 따로 내려 이들을 집중 관리했다. 상급부대의 지침을 받은 장교와 기간병들은 '실적'을 위해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학대했다는 게 군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다.

군의문사위가 국가 책임을 인정한 여호와의 증인 사망사건은 모두 군사정권 아래 벌어진 일이지만,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정부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나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한국워치타워협회.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체복무가 인정되지 않으면 앞으로 500여명의 청년들이 더 구속수감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한국워치타워협회.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체복무가 인정되지 않으면 앞으로 500여명의 청년들이 더 구속수감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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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여호와의 증인 413명... 대체복무 도입 요원

한국워치타워협회(여호와의 증인 한국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8년 11월 현재 종교적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해 구속 수감된 여호와의 증인들은 413명(재판 종결 수감 399명, 구속 재판 중 14명)에 달하고 있다. 병역거부 발생 건수도 지난 1990년 373건에서 2005년 819명까지 늘었다가, 최근 3년에 들어서야 조금씩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국방부가 '시기상조'라며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혀 줄어들던 여호와의 증인 구속 수감자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국방부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7년 9월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1년 만에 태도를 바꿨다.

한국워치타워협회 관계자는 "국방부의 대체복무 허용 검토 발표로 군 입대를 미뤄온 교우들이 약 500명가량 된다"면서 "대체복무가 허용되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헌법재판소에는 대체복무 허용과 관련한 2건의 헌법소원이 심판청구 돼 있다. 하지만 헌재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다. 여기에는 빠르게 보수화되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하고 있다. 헌재마저 이들을 외면한다면, 또 다시 500명에 달하는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감옥으로 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태그:#여호와의 증인, #양심적 병역거부, #집총거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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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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