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한 사형수의 형 집행이 전격 단행된다. '박정희 살해' 사건으로 전두환이 이끄는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부쳐진 지 7개월, 사형 판결을 받은 지 4일 만이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그렇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권력찬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대통령 암살 사건"이라며 김재규 전 부장에게 내란음모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김 전 부장은 재판 내내 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1980년 1월 24일 최후진술에서 "대통령이 될 야심에서가 아니라 유신의 심장을 쏘았을 뿐"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같은 달 28일 항소이유 보충서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박 대통령을 제거했다"고 주장, 정치적 소신에 따른 양심범임을 거듭 피력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추모식지난 19일 김 전 부장의 셋째 여동생 김단희(69)씨는 미국 뉴욕 플러싱의 한 사무실 뒤편에 앉아 있었다. 정면 벽에는 흰색 천 위에 검은색 글씨로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회'라고 쓰인 횡단막이 내걸렸고, 향이 피워진 제단 위에는 김재규 전 부장의 액자사진이 놓여 있다. 김 전 부장을 기리는 32주년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20년째 열리고 있는 행사이지만 참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김단희씨를 포함해 7~8명 정도. 그러나 김씨는 오빠의 얼굴과 참석자들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고 있었다.
김단희씨는 김 전 부장의 박 전 대통령 살해 사건에 대해 "미국의 사주설은 유언비어이고, 차지철(경호실장)과의 권력 암투설은 합수부에서 발표한 내용인데, 사람들이 다 그것을 믿고 있다"며 "먼 훗날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오빠는 유신의 핵만 제거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부연했다.
3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김 전 부장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박근혜씨는 현재 가장 강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박근혜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친일 세력과 과거부터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매한 국민이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박근혜씨가 자신의 오빠를 향해 '패륜아'라고 말한 것을 내내 가슴에 담은 채 살고 있었다. 그는 "오빠는 당시 부마항쟁 등을 민란으로 봤다"면서 "(박)근혜와 (박정희)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안타까워했는데, 근혜는 (오빠에 대해) 패륜아라고 입에 잘 올리더라"고 안타까워했다.
김단희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9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김씨와의 일문일답 요지이다.
"추모제 한다는 소식에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이..."- 미국에서 살게 된 이유는?"1985년 남편이 유학 오면서 같이 왔다가 주저앉았다. 미국 오기 전까지 치안본부 대공수사과에서 아파트 수위를 통해 우리를 계속 감시했다. 미국 오기 직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에 간다는 것을 안 직후부터 밤낮으로,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다. 별 내용도 없이 그냥 '어떻게 지내느냐' 그런 식으로 감시를 하더라."
- '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제'에는 언제부터 참석했나?"20년 전 첫 행사 때부터 참석하고 있다. 처음 추모제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보다 경계심이 앞섰다. 사람들은 중앙정보부장의 가족이니 당연히 부정한 돈으로 재산을 많이 모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육군 중령이었던 남편의 월급에 내가 직장 생활해서 모은 돈이 전부였다. 미국에 와서도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휴일도 없이 하루에 13시간씩 일했다. 돈이 많았다면 누구한테 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었겠나. 그렇게 22년을 일했다.
한편으로는 오빠를 기리는 행사에 과연 몇 명이나 나올지 궁금했다. '우리가 추모제에 안 나타나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순수한 뜻을 지닌 분들이 모여서 행사를 하시는데, 가족들이 참석하면 외부에는 마치 가족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했다. 그래서 매우 소극적이었다."
- 32년 전 10.26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기억하나? "처음에 라디오를 통해서 소식을 들었다. '김재규가 대통령이 되려고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합동수사본부의 발표 내용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믿지 않았다. 오빠가 그렇게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큰언니가 면회를 갔는데, 오빠는 '권력 싸움 때문이었다'는 언론 보도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오빠에게 '첫 재판 때 내외신 기자가 많이 오니까, 오빠가 하신 일을 소신껏 잘 말하라'고 당부했다. 그 뒤 저는 계속 법정에 가서 오빠의 모습을 지켜봤다. 당시 남자 형제들은 가택연금 상태 비슷하게 있었고, 여자들은 별로 간섭하지 않아서 언니, 여동생과 셋이서 계속 법정에 갔다."
- 김재규 전 중장정보부장이 왜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했다고 생각하나?"오빠가 '자생 빨갱이' 얘기를 했다. 올바른 얘기를 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만들어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들었다. 이북에서 넘어오는 빨갱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게 문제라는 것이었다. 또한 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인재들을 모두 죽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박 대통령에게 얘기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하자는 대로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차지철이 말한 대로 박 대통령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서라도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오빠가 확고하게 결심했다고 하더라. 다른 사람들이 '왜 직접 총을 쐈느냐? 누굴 시켜서 하면 될 일을'이라고 했지만 오빠는 '그것은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 사주설은 유언비어"- 10.26사건은 김 전 부장과 차지철의 권력 암투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오빠는 재판 때 '차지철은 버러지여서 취급도 안 했다. 단지 차지철이 총을 가지고 있어서 먼저 쐈다'고 말했다. 오빠는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 문제를 포함한 여러 치부가 세상에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서실장이었던 박선호씨가 법정에서 그 얘기를 하려고 하자, 오빠가 '하지 말라'고 제지했다. 나중에 변호사가 설득해서 그 얘기가 나온 것이다. 오빠는 박 대통령을 많이 좋아했다."
- 10.26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가설이 많다. (핵 문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미국의 사주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들었다. 그것은 우리 오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가까이서 아는 사람은 그런 얘기를 절대로 안 할 것이다. 미국의 사주설은 유언비어이고, 차지철과의 권력 암투설은 합수부에서 발표한 내용인데, 사람들이 다 그것을 믿고 있다. 어쩌겠나. 먼 훗날 진실이 밝혀지지 않겠나. 재판 당시 법정에는 각 신문사에서 나온 내외신 기자들이 많았다. 오빠의 최후진술을 듣고 난 뒤 기자들의 얼굴이 상기가 되었더라. 너무 감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를 보고 <한국일보> 기자가 '이제 후련하시죠' 하더라. 그런데 당시 모든 신문은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기사를 마음대로 못 쓰는 상황이었다. 내가 '신문에 내지도 못하면서 취재를 하면 뭐하느냐'고 했더니, 그 기자가 '검열에 통과할 만한 내용만 싣고, 나머지는 저희들이 다 보관한다'고 하더라.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오빠의 최후진술 녹음테이프 등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상이 더 많이 바뀌지 않겠나. 기자들이 모두 기록한 게 있는데, 그걸 휴지통에 버리겠나? 어떻게든 남아서 세상에 드러나리라고 믿는다."
- 김 전 부장이 남긴 유품이나 박정희 정권의 비리 등이 담긴 자료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나?"없다. 오빠는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는 일절 비난하지 않았다. 오빠는 자기 부인에게도 그런 얘기를 안 했다. 오빠가 쓴 일기장이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10.26사건이 나자, 오빠의 아내가 겁이 나서 오빠가 기록했던 일기장을 모두 없애버렸다고 하더라. 그것을 어디에 감추기라도 했다면…. 너무나 평범한 가정주부였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감당할 수도 없었고, 남편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 김 전 부장의 박정희 살해 계획을 사건 이전에 전혀 눈치 채지 못했나?"당시 우리 형제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오빠를 찾아가서 시간을 뺏는 일은 거의 안 했다. 10.26사건 나기 2주 전 쯤에 꿈을 꿨는데, 오빠가 큰 방에 누워 있고 헌병 둘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지키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깨고 통곡을 하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서 다음날 어머니를 모시고 오빠를 만나러 갔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꿈 얘기를 하니까, 오빠가 '네가 하도 (오빠에게) 안 오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 꿈을 꾸었나보다'고 하더라. 그게 사건 이전에 마지막으로 오빠를 본 것이었다.
그런데 재규 오빠가 지금은 고인이 된 둘째 오빠(김항규)에게는 미리 말을 했다고 하더라. 10.26사건 이전에 큰 오빠가 둘째 오빠에게 '박정희를 쏴야겠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큰오빠는 유신의 핵만 제거되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둘째 오빠는 18년 독재 세력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박정희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라며 오빠의 결심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큰오빠는 '국민의 희생을 막을 방도가 없다'면서 자신은 거사 이후에 박정희의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했다더라."
"대통령 한 사람과 국민의 수많은 생명을 맞바꾼 것인데..."- 김 전 부장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본인은 어떻게 했을것 같은가. "물론 말렸을 것이다. 나는 군인의 아내로만 살았지, 오빠가 고뇌했던 것과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오빠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했다. 자기가 야수가 된 것이다. 대통령 한 사람과 국민의 수많은 생명을 맞바꾼 것인데, 많은 사람은 국민의 생명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대통령 한 사람의 생명은 지금까지도 그 딸(박근혜)을 떠받들 정도로…. 한국에서는 독재에 항거하다가 빨갱이로 몰려서 고문당하고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을 옛날 임금처럼 생각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 과실이 가려지지 않겠나. 이제는 그런 평가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 결과적으로 김 전 부장은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당했고, 현재까지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불명예는 계속되고 있다. 회한이나 원망은 없나?"오빠의 행동으로 우리 가족이 많은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오빠에 대한 원망은 정말 없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오빠는 부당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너무나 당당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모습만을 봤다. 우리 형제들이 오빠로부터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빠를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가 '이 집 식구들은 혁명가 가족들로 손색이 없다'고 했을 정도다.
다만 안타까운 마음은 있다. 오빠는 당시 부마항쟁 등을 민란으로 봤다. 그러면서 '(박)근혜와 (박정희) 아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내쫓기는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민란이 일어나면 대통령 가족들을 그냥 두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처참한 모습까지 상상하면서 오빠는 그(박정희) 가족들을 걱정한 것이다. 그런데 근혜는 (오빠에 대해) '패륜아'다, 뭐다 하면서 입에 잘 올리더라. 사실 오빠는 너무나 그 아이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는데."
- 32년이 흐른 지금, 박근혜씨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됐다."박근혜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친일 세력과 과거부터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매한 국민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다. 물론 아버지가 독재자였지 박근혜가 독재자는 아니었다. 다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오빠의 진의가 세상에 좀 더 환하게 드러날 기회를 박근혜가 막지 않을까, 우려된다. 오빠는 박 대통령에 대한 개인감정 때문에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한 것이다. 우리도 희생자이고, 박근혜도 희생자다.
어머니께서는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 좋은 일을 한다고 했지만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오빠를 살려달라고 기도한 게 아니라 그(박정희)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그 입에서 오빠에 대해 '패륜아'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물론 아버지를 잃었지만 본인도 아버지가 당시 어떻게 했는가를 자신이 정치를 하면서 더더욱 잘 알 것 아닌가."
- 김 전 부장의 진심을 몰라주는 국민이 원망스럽지는 않은가?"지금은 담담하다. 마음이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더 많은 사람이 오빠의 정신에 대해서 알아주면 좋겠지만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형집행일 직전에 면회 갔을 때, 오빠는 '민주주의의 봇물을 터뜨렸다. 조금은 시끄러워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2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20년이나 걸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민주화가 됐다. 200만 명의 무고한 국민도 죽지 않았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몰라줄지언정,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