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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병원에 마련된 고 강희남 목사의 빈소.
 전북대병원에 마련된 고 강희남 목사의 빈소.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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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 : 7일 새벽 2시 30분]

6일 오후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 전환을 요구하며 목숨을 끊은 강희남 목사는 지난 달 같은 취지로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 강희남 목사의 가족들에 따르면 강 목사는 지난달 1일 자택에서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단기 4342년 5월 1일 강희남'이라는 글을 쓴 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 글귀에는 강희남 목사의 낙관까지 찍혀 있어 사실상 이날 마음의 결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 목사는 이후 5월 9일까지 가족들과 주위의 만류에도 단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않는  극단의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쓰러져 5월 말까지 인근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몸이 채 회복하기도 전에 퇴원했고 6일 서울에서 열린 6.10항쟁 관련 시국회의에 참석한 후 이날 오후 전북 전주 효자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이에 따라 작정하고 마지막 서울행을 한 후 결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이 남긴 마지막 유서에 '6월 민주항쟁'을 언급하며 '제 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이명박을 내치자'고 밝힌 것도 이날 시국회의를 통해 급박한 정세에 인식을 같이하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남 목사의 부인인 주정수 여사는 "결행을 할 당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며 "가족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던지겠다는 결심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한상렬 목사 등 지인들이 달려와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빈소입구에는 강희남 목사가 남긴 유서가 걸려 있다. 

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낸 강희남 난산교회 명예목사가 6일 오후 전북 전주 효자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사진은 지난해 5월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낸 강희남 난산교회 명예목사가 6일 오후 전북 전주 효자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사진은 지난해 5월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 이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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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 보강 : 6일 밤 10시 50분]

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낸 강희남(89) 난산교회 명예목사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 전환을 요구하며 6일 오후 전북 전주 효자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다.

황재우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조직국장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 30분께 강희남 목사가 자택에서 목을 매 숨져있는 것을 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오후 5시 30분께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강 목사는 유언으로 "지금은 민중주체의 시대다, 4.19와 6월 민중항쟁을 보라, 민중이 아니면 나라를 바로잡을 주체가 없다, 제2의 6월 민중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는 글을 남겼다.

강 목사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을 촉구해왔다. 그는 지난해 가을에는 7일 동안, 올해 5월에는 9일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 황 조직국장은 "5월 단식을 할 때, '이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현재 강 목사의 시신은 자택에 안치돼 있다. 강 목사의 시신은 자택에서 이뤄지고 있는 난산교회 목사들의 임종 예배가 끝난 후, 이날 밤 11시께 빈소가 마련될 전주 전북대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고 강희남 목사가 남긴 유서.
 고 강희남 목사가 남긴 유서.
ⓒ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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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재야 통일운동의 산 증인

고인은 1990년 1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를 결성해 10여 년간 통일운동을 이끈 90년대 재야 통일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강 목사는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조문을 시도하다 구속되는 등 90년대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강 목사는 1980년대 반독재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7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됐고, 4·13 호헌에 반대하며 옥중에서 40일간 단식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2003년 이라크파병저지 목포~서울 천리도보행진과 청와대 앞 단식 투쟁을 벌였다. 최근엔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등과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를 만들어 활동했다.


태그:#강희남, #범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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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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