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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역모기지', 프랑스엔 '비아제'

 

정년퇴직자 루이는 월말이 다가올수록 지갑을 여는 회수가 높아진다. 하루가 다르게 부피가 줄어드는 지갑 속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돈을 헤아려가며 장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물가가 하루가 멀다 하게 치솟고 매달 날아드는 각종 납부서에다 세금까지 내고나면 매달 받는 연금이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루이만이 아니다. 루이는 그나마 본인 소유의 집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아내를 잃고 자식 없이 혼자 사는 그는 집을 처분해서 양로원에 들어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전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만만치 않은 양로원의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이는 집을 팔아 좀 더 작은 아파트로 옮겨갈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지금 나이에 이사를 갈 생각을 하니 어디선가 짜증이 몰려오는 듯 했다. 결국 루이가 생각해 낸 방법은 '비아제'로 집을 파는 것이었다.

 

비아제(Viager) 방식으로 집을 파는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사망 시까지 살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집의 소유권은 계약과 동시에 구매자에게 넘어가지만 집의 사용권은 판매자에게 소속되어 구매자는 판매자의 사망 이후에나 집의 사용권을 획득하게 된다.

 

판매자는 계약 체결 시 일정 금액의 계약금을 수령하고 매달 구매자로부터 일정액의 연금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사망 시까지 이어진다. 루이처럼 가진 것이라곤 집밖에 없고 턱없이 부족한 퇴직연금으로 한 달을 채우기 어려운 노인층에게 요새처럼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으로 이처럼 좋은 시스템도 없다.

 

비아제는 원래 집을 물려줄 자손이 없는 노인들이 집을 담보로 생전에 매달 일정금액의 수입을 챙길 수 있는 편리한 시스템이었으나 요새처럼 살기가 각박해진 현실에서 자식이 있어도 자신의 생계가 더 급한 노인들에게 사망 때까지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 준다는 면에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비아제는 한국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역모기지와 거의 비슷한 원칙을 갖는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역모기지가 은행에 집을 담보로 잡히고 은행에서 돈을 받아쓰는 것이라면 비아제는 자신의 집을 구입한 개인에게 매달 연금을 받는 것이다.

 

집을 주고 계약금·연금을 받는다

 

비아제 계약으로 집을 판매하는 자는 일종의 계약금 (bouquet, 부케)과 매달 일정금액의 연금(rente, 랑뜨)을 받는다. 계약금이 많아질수록 연금이 적어지고 계약금이 적으면 연금이 많아지는 원리를 갖는다.

 

이 계약금과 연금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합의로 결정되는데 이 금액 산출시 고려되는 사항은 매매가 이루어질 당시 매물의 시가, 매물 상태, 판매자의 나이와 기대되는 평균 수명, 주택자금 융자율 등으로 매우 엄밀하고 구체적인 방식이 적용된다.

 

현재 비아제 매물 시장에 나와있는 아파트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파리 19구에 사는 75세 남자노인의 경우 :

   시가 40만 유로의 아파트 대신 11만 유로의 계약금과 매달 720유로의 연금

2) 파리 12구에 사는 87세 여자 노인의 경우 :

   시가 21만 유로의 아파트 대신 10만 3천유로의 계약금과 매달 300유로의 연금

3) 파리 13구에 사는 노인 커플 (남자 73세, 여자 72세)의 경우 :

   시가 82만유로의 아파트 대신 10만유로의 계약금과 매달 1460유로의 연금

 

결국 계약금과 연금을 평균 수명까지 받는 걸로 계산하면 시가 판매금액이 나오는 원칙이다. 당연히 판매자의 나이가 많을수록 가격이 올라가고 나이가 적으면 그만큼 받을 기간이 많으므로 가격이 내려간다.

 

판매자는 여생 보장, 구매자는 헐값에 집 생겨

 

비아제의 장점은 판매자의 경우 집을 팔았어도 사망시까지 집에서 살 수 있고 종신연금이 보장된다는데 있다. 이 보장은 법에 의해 확실히 이루어지며 물가 인상에 따라 연금의 금액도 정기적으로 새로 산출되어 판매자가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되어있다.

 

비아제 매매는 계약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소유권이 구매자에게 돌아가므로 주인은 지세나 건물 수리비의 비용부담에서도 제외되어진다. 또한 비아제의 계약금은 일시불 현찰지급도 가능하지만 분할 지급도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구매자가 분할 지급의 이행을 끝까지 시행하지 못하면 주인은 다시 집의 권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계약금 수익은 세금공제 대상이 되고 매달 받는 연금도 세금 공제혜택이 따른다. 세금 공제율은 나이에 따라 상이한데 50세 이전의 공제율은 30%, 50세에서 59세 사이는 50%, 60세에서 69세 사이는 60%, 69세 이상은 70%의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

 

비아제의 장점은 판매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구매자에게 해당되는 장점은 우선 장기적인 비용 투자로 거액의 부동산 구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구입 건물에 대한 세금 공제 혜택이 이루어지는데 평균 수명과 판매자의 나이에 따라 공제율이 다르다.

 

또한 주인이 일찍 사망 시에는 거의 헐값에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의 수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변수가 작용해 판매자와 구매자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비아제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는 집을 사는 비아제(매물의 90%에 해당)와 주인이 살지 않아 비어있는 비아제(매물의 10%)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 주인의 사망과 동시에 집을 소유할 수 있는데 비해 후자의 경우는 비아제 건물이 비어있으므로 구매자는 계약과 동시에 들어가 살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어도 된다.

 

두 경우 다 구매자에게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는데 본인이 들어가 살 경우 주인에게 주는 연금이 결국은 월세가 되는 셈이지만 집이 사실상 자신의 집이므로 월세가 헛나가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세를 줄 경우에는 그 세를 받아서 주인에게 연금을 줄 수 있으므로 자신의 수중에서 돈이 하나도 안나가면서 (계약금은 제외하고) 집을 구입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판매자가 나이 들어도 사망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비아제가 그러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한 개인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거래기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 역모기지가 대중화되지 않는 이유가 죽어서 집 하나 정도는 자식에게 남기고 싶어하는 한국인의 정서적인 면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비아제 시스템을 다룬 영화로 <르 비아제(Le Viager)>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다. 1972년에 피에르 체르니아 감독에 의해 제작된 영화로 시대배경은 1930년대이다.

 

1930년 파리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레옹 걀리포는 병색이 완연한 환자를 발견한다. 59세의 독신자 루이 마르티네가 기껏 살아야 2년 이상을 살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내린 이 의사는 이 환자가 프랑스 지중해 지방인 셍-트로페(50년대에 브리짓뜨 바르도에 의해 유명한 장소가 되지만 당시에는 무명의 해변가)에 별장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마르티네는 얼마 남지 않은 퇴직 후에 파리를 떠나 그 별장에 정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레옹 걀리포는 동생인 에밀에게 이 별장을 비아제로 구입할 것을 권유한다. 한 2년만 연금을 내면 집주인이 될 것이라는 형의 말만 믿고 에밀은 이 집을 구입한다.

 

그러나 2년밖에 못살거라는 마르티네의 건강이 악화되기는커녕 따뜻하고 기후 좋은 지중해 연안에서 살게 됨으로써 오히려 건강이 양호해지게 된다. 해마다 마르티네에게 지불하는 연금액이 증가하여 점점 생활이 어렵게 된 걀리포 가족은 궁리 끝에 마르티네를 죽게할 여러 함정을 판다.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1949년 마르티네 노인을 파리로 초대하여 여러 군데로 끌고 다녀 보았으나 마르티네는 끄떡없는 대신 레옹의 부인인 마거리트가 오히려 경색으로 사망하는가 하면, 이듬해 20년 동안 물었던 연금의 끝이 보이지 않아 절망한 에밀이 마르티네를 바다에 빠트려 죽일 계획으로 배(페달 보트)를 타고 오다가 오히려 자신이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집 주인인 에밀의 사망 후에 연금부담은 가족들에게 넘겨졌다. 걀리포 가족은 마르티네 집의 계단을 왁스로 반질반질하게 닦아놓고 혹시나 마르티네가 떨어져 사망하지 않을까 했지만 노인네는 교묘하게 함정을 피해나갔다.

 

1970년, 레옹은 마르티네 침실 창가의 난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함정을 팠지만 마르티네 대신에 엘비르(동생 에밀의 처)가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결국 비아제 계약을 체결한 지 40년이 지난 후 의사인 레옹 걀리포도 심장병으로 죽고 조카인 노엘 걀리포도 교통사고로 죽음으로써 걀리포 가족이 모두 사라지지만 99세 노장인 마르티네는 여전히 건재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이다.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영화는 모파상의 단편소설에서 따온 것으로 체르니아 감독과 유명한 만화제작가 르네 고시니에 의해 시나리오가 작성되었다. 프랑스의 유명 배우 미셀 세로가 마르티네역을 맡았는데 여러 함정을 피해 나오는 그의 순진성이 관객을 사로잡는 요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비아제 판매자가 평균 수명 이상을 살아 구매자의 재정을 곤란하게 하는 경우가 이처럼 영화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일어나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로 잔 캴망을 들 수 있다.

 

잔 캴망은 얼마 전까지 세계 최고령자로 122세에 사망했다. 이 분이 1965년 90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을 비아제로 팔았다. 그러나 캴망은 이후 32년을 더 버티면서 계속해서 연금을 받았고 캴망의 집을 구입한 공증인은 31년 동안 연금을 붓다가 결국 캴망이 사망하기 1년 전에 먼저 사망했다.

 

남은 1년 동안은 그의 자손이 계속 연금을 부어나가야 했다. 대니 드비토 감독의 미국 코믹영화 <3인을 위한 2층 아파트(원제목 '뒤플렉스')>는 이 실화에서 내용을 딴 영화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를 당해 피해를 보는 사례를 줄이기 위해 최근에는 새로운 시스템이 연구되었다. '기한 매매(la vente a terme)'라 불리는 이것은 계약 초기에 상환할 연금 기간을 미리 정해놓는 경우로 주로 10년에서 15년에 해당한다. 그 이후의 기간에는 판매자가 생존해도 구매자가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경제위기가 비아제 매매 활성화하나

 

비아제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서기 846년 샤를르 르 쇼브 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시대와 중세기에도 비아제를 이용한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비아제'라는 용어는 구프랑스어 '비아즈(viage)'에서 나왔는데 '수명'이라는 뜻이다.

 

비아제는 프랑스의 유명 인사들도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콜롱베에 있는 드골 대통령의 저택도 비아제로 구입한 것이고 지스카르 대통령 소유의 성도 비아제로 구입한 것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비아제는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로 한다는 원칙으로 인해 지금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한 비아제 전문 부동산업자는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현 경제 위기 속에서 비아제로 집을 판매하려는 65세에서 75세에 해당하는 연령층의 노년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평균수명 연장과 물가인상, 퇴직자의 생활수준 저조가 지속되는 한 비아제 부동산 매매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게 그의 의견이다. 더욱이 판매자의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기한매매의 출현으로 이 방식의 매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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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비아제, #프랑스,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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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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