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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출판사에서 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표지.
 금성출판사에서 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표지.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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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사회주의가 정통성이 있는 것같이 돼 있는 교과서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아 놓겠다." (10월 8일 이명박 대통령)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는 북한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10월 6일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근현대사 교과서 중 일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치고 있어 반드시 고쳐야 한다." (10월 6일 안병만 교육과학부장관)

고교 역사교과서인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총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총대를 멘 이들은 다름 아닌 권력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과 집권 여당 의원, 그리고 교육과학부장관이다.

이들의 지침에 따라 교육과학부는 오는 30일 좌편향 교과서로 지목된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등에 대한 사실상 '강제 수정 지시'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의 발상은 뉴라이트 계열 단체와 일부 경제단체, 그리고 보수신문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북한의 시각에서 만든 좌편향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200만 학생이 본 교과서, 북한 교과서 베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2003년부터 5년 동안 문제의 역사교과서들을 배운 전국 고교생들이 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교생에게 이런 역사를 가르친 교사들의 최대 모임인 전국역사교사모임(회장 윤종배)은 최근 대통령과 정부여당 관계자의 발언에 대해 "언급할 가치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 모임의 한 임원은 "좌편향 교과서라고 말하는 분들이 과연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읽어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국역사교사들은 왜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책인 금성출판사가 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직접 들춰봤다.

'북한 것을 그대로 베끼고 북한 사회주의가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서술됐다'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말이 맞으려면 이 교과서엔 북한에 대한 비판 내용은 거의 없고 찬양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

물론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전체 368쪽의 교과서 가운데 북한 부분을 다룬 내용은 실제로 4단원 1장의 6·25 전쟁을 다룬 8쪽 분량(268쪽~275쪽)과 4단원 3장의 '북한의 변화와 평화 통일의 과제' 부분 중 10쪽 분량(298쪽~307쪽) 등 전체를 합해 봐도 겨우 18~20쪽 분량이다. 같은 민족인 북한을 다룬 부분이 전체 분량의 5%도 되지 않는 것이다.

"심각한 식량난... 김정일 신뢰도 낮아"

한국전쟁을 다룬 교과서 270쪽 화보.
 한국전쟁을 다룬 교과서 270쪽 화보.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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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또한 사실 전달과 함께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 시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특히 일부에서는 '북한 김일성의 6·25 전쟁 남침 사실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달랐다.

교과서 270쪽 첫 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북한 남침을 서술한 대목은 269쪽에도 표를 통해 자세히 나온다. '1949년 (북한이) 소련,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은 뒤, 1950년 3~4월에 김일성이 소련을 비밀 방문해 스탈린의 통일 과업 개시(전쟁) 동의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교과서는 또 272쪽 '전쟁이 남긴 것'이란 항목에서는 "3년여에 걸친 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하였고, 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넘쳐났다"고 적는 등 전쟁의 참화에 대해 사진을 곁들여 소개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대한 책임론을 강조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김일성 북한 전 주석과 김정일 현 국방위원장에 대한 비판 내용도 곳곳에 담겨 있었다. 다음은 이런 내용 가운데 일부다.

"김일성 1인체제의 확립-김일성과 함께 유격대 활동을 하던 군부 강경파가 경제 건설을 우선시하는 온건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남한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여러 차례 무력 도발을 하였다." (300쪽)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대중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301쪽)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 지도 체계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도구였다. 김일성 개인숭배를 합리화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302쪽)

"주체에 대한 강조는 쇼비니즘에 가까운 북한 주민의 강렬한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러한 자부심의 논리적 결과는 사고방식에 있어서 편협함과 외부 세계와의 접촉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났다." (302쪽)

김정일을 실랄하게 비판한 교과서 307쪽 내용.
 김정일을 실랄하게 비판한 교과서 307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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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주체 사상에 대한 해석을 독점함으로써 자연히 후계자의 자리를 굳혀 나갔다. …김일성뿐 아니라 김정일에 대한 개인적 숭배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304쪽)

"경제적 어려움과 개방 정책-그러나 주로 대중 동원에 의존하였을 뿐, 자본의 축적과 기술 발전이 뒤따르지 않아서 경제의 질적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농업 부문의 부진과 생활 필수품 부족은 북한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305쪽)

"김정일 체제는… 만성적인 식량과 에너지 부족, 공장 가동률의 저하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통치 조직의 효율성도 떨어지고 있다. 특히 심각한 식량난으로 탈북자가 늘어나고, 김정일에 대한 북한 주민의 신뢰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07쪽)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인 "북한의 사회주의가 정통성이 있는 것 같이 돼 있는" 부분은 책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에 김일성, 김정일 1인 체제와 식량난 등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 정통성·발전상 강조 대목 수두룩

교과서 306쪽 화보.
 교과서 306쪽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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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나라 발전상을 강조하는 대목도 부지기수로 많다. 교과서 뒷부분인 4단원 4장 내용(경제 발전과 사회 문화의 변화)은 대부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 발전 모습 또한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꾸준히 발전하였다. 경제 개발 계획의 추진으로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발전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각종 국제기구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6쪽)

"광복 이후 한국의 경제는 남북 분단과 6·25 전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 개발 계획은 높은 경제 성장을 가져왔다. 수출이 크게 늘어나고 국민 소득이 높아졌으며, 대부분의 국민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20쪽)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과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을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는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형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327쪽)

"수십 년간의 경제 발전으로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10위권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다수 국민들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도 이전보다 풍요로워졌다." (331쪽)

이밖에도 교과서에는 새마을운동의 성과, 사회보장제도의 발전, 스포츠 부문의 발전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런 점에 비춰봤을 때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는 북한의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란 한 의원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필진엔 교수·교사에 교육과학부 과장도 포함... 전교조 없어

이 교과서의 필진은 모두 6명.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등 대학교수와 현직 교사가 각각 3명이었다. 현직 교사 3명 가운데 전교조 소속 교사는 단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반면, 한 교사 출신 인사는 현재 교육과학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의 타 출판사 집필진 가운데엔 교육과학부의 교과서 관련 과장급 인사도 들어가 있다. 역사교과서 필진은 좌편향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 교과서 제작에 참여한 한 교사는 27일 이 대통령의 '북한 정통성 옹호 교과서' 발언에 대해 "언급할 가치도 없는 말씀이며 사실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일부 단체와 정부여당, 보수언론의 역사교과서 '멱살 잡기' 시도에 깔린 이데올로기는 과연 무엇일까? 금성출판사에서 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그 해답이 적혀 있는 듯하다.

"남한 안에서도 북한을 보는 시각이 상당한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을 화해와 협력의 대상보다는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보는 시각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316쪽)

"언론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구미에 따라 정보를 적당히 취사선택하거나 편집함으로써 여론을 조작하는 일도 흔히 일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언론의 정화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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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교육희망>(news.eduhope.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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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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