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도, 명일이도 썼네. 용식이형도… 동근이형도…, 아…."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이하 노조) 기획부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노조 사무실에서 생산직·사원급 사무직의 1차 희망퇴직 신청자 명단이 뜬 모니터 화면을 빤히 바라보던 그의 눈은 연방 낯익은 이름을 찾아냈다. 그리고 탄식. 이내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한 노조 간부는 "우리 팀 52명 중에 8명이 썼다"며 "이래서 라인 돌아가겠어? 신규 채용해야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신희균 노조 총무부장은 "회사가 가족을 통해서 희망퇴직을 종용했으니…"라며 말을 흐렸다. 이날 4500여 명의 생산직 중 659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일 찾은 경기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는 21일 비바람을 앞둔 것처럼, 폭풍전야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6월 8일로 예정된 정리해고 명단 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데다, 이날 1차 희망퇴직자 명단 공개로 공장은 한숨과 탄식이 가득했다.
"차도 살리고 사람도 살려야 한다"
이날 쌍용자동차 공장 앞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공장 정문에서 회사 관계자들이 노조 관련 차량의 출입을 막아서면서 노조와 승강이를 벌였다. 인근에서는 한 보수 성향 시민단체가 노조의 희생을 촉구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들은 "노조는 회사가 직원들의 총고용을 보장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라, 회사가 살아야 노조가 있는 것 아니냐"고 외쳤다. 또한 "나중에 회사가 좋아지면 다시 들어오면 된다, (정리해고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정문 앞 도로변에는 '차도 살리고 사람도 살려야 평택경제 살아납니다', '우리 아빠의 일자리를 지켜주세요' 등의 펼침막이 빼곡히 들어차 회사의 회생만큼 노동자들의 삶도 중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장 내부에 들어서자 기자를 맞은 건 렉스턴과 액티언이 아니었다. 야적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한쪽에선 카 캐리어(자동차운송차량) 몇 대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신 노동자들의 농성 천막과 단결·연대를 강조하는 펼침막이 공장 들머리를 지켰다.
무엇보다 지난 13일부터 3명의 노조 간부들이 농성하고 있는 70m 높이의 굴뚝이 눈에 띄었다. '정리해고 분쇄 없이는 살아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쓰인 펼침막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각오를 대신 보여주고 있었다.
정리해고에 희망퇴직까지... 뒤숭숭한 공장
이날 낮 렉스턴·카이런·액티언을 만드는 3라인을 찾았다. 이곳에 들어서자, 조립공구에서 나는 '드르륵'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라인에 실린 차체는 노동자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노후차량을 신차로 교체할 때 자동차 개별소비세와 취득·등록세를 70%씩 감면해주는 혜택이 지난 1일부터 시행된 후, 렉스턴 등의 주문량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오랜만에 라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만, 라인에 선 노동자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생산직 노동자의 45%가 정리해고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명단 발표는 다음달 8일이지만, 이미 공장 안에는 '살생부'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차체3팀의 박현식(가명·34)씨는 "개인적으로 알아봤다거나 팀장이 귀띔해줘 명단을 안다는 동료가 있다"며 "다들 그쪽으로 마음이 쏠려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밝혔다.
박씨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 오늘 희망퇴직자 명단이 발표돼 더욱 어수선하다"고 말했다. 박씨가 포함된 작업조 15명 중 4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그는 "함께 싸우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해한다"며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참 안타깝다"고 전했다.
지난 3월부터 임금 600여만 원이 연체돼 대출을 받아 생활하는 그 역시 희망퇴직에 마음이 흔들렸다. 정리해고자는 70일치의 임금을 위로금으로 받지만, 희망퇴직자는 9개월 치 임금에 상응하는 위로금을 받을 수 있다.
희망퇴직자 장기덕(38)씨는 "회사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가 너무 강경하다, 노동자에게 막무가내로 강요한다"며 "내가 정리해고자 명단에 포함 안 됐다는 보장이 없다, 당장 생계가 급해 희망퇴직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5월 30일 그는 15년간 일한 직장을 떠난다. 사실 이날 오후부터 파업으로 공장이 멈추고 다음 주엔 그의 근무조가 쉬는 탓에 기자와 대화한 10분이 그의 마지막 근무였다. 그에게 소회를 말해달라고 하자 장씨는 "섭섭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동료들이 인터뷰에 집중하라며 조립공구를 뺏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차체를 향하고 있었다.
7살 딸의 외침 "아빠 일자리를 지켜주세요"
이날 오후 멈춘 공장을 지킨 것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아내들과 아이들이었다. 아내들이 결성한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원회' 천막 앞에서는 펼침막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아빠 힘내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남편들의 모습이 하나씩 그려졌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천막 주위에서 장난치며 즐거워했다.
가족대책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정아(35)씨는 "남편에게 힘을 주기 위해 아줌마 100여 명이 가족대책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7살 딸과 5살 아들이 있고 현재 임신 4개월째다. 그는 "임신한 건 힘들지 않지만, 회사가 어려워지고 남편 월급이 줄면서 일상이 깨진 게 힘들다"고 말했다. 지난 2월 각종 보험과 함께 5년 든 청약통장을 깼다는 그는 말을 이었다.
"7살 딸이 '아빠 일자리 지켜주세요, 돈 안 주면 유치원 못 다녀요'라는 피켓을 만들었다. 회사는 그렇게 밥줄을 끊고 싶나. 노조에선 총고용만 보장하면 다 양보하겠다고 했다. 왜 '구조조정=정리해고'인가. 일자리도 나누면 된다. 회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것 같다.""집에 가고 싶다"는 네 살짜리 아들을 안고 있던 권지영(35)씨 눈에 물기가 맺혔다. 권씨는 "살림만 하기 어려워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했다"면서 "현재 살림으로는 어린이집 보내기도 부담스러워 일도 못하고 있다, 답답하고 속상하다"고 밝혔다.
막노동하는 쌍용차 노동자들... "더 이상 못 참겠다"해가 기울자, 공장 한가운데서 파업가가 울려 퍼졌다. 휴업 상태인 노동자들이 집회를 위해 공장을 찾은 것이다. 렉스턴·액티언 등을 조립하던 1라인은 현재 올해 출시 예정인 신차 'C200'을 조립하기 위해 라인을 개조·증설하고 있는 터라, 이곳에서 일하던 노동자 800여 명은 석 달 가까이 휴업 중이다.
휴업수당으로 한 달에 약 60만 원을 받는 장대철(37)씨는 "막노동을 하거나 공장에서 알바로 일한다, 살림하던 아내는 피자가게 주방에 알바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참지만은 않겠다고 말한다. 우보식(36)씨는 "노동자들이 화가 많이 났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 20년 이상 일한 사람이 희망퇴직 신청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울면서 나가더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그분이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느냐. 그분이 무슨 죄가 있느냐. 쌍용차 채권단과 법정관리인은 당사자가 아니라고 정리해고를 쉽게 말하고 있다. 노동자를 뿔났다. 동료들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 이겨서 살아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