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6 14:59최종 업데이트 24.04.0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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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학생운동은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서양문명이 유입되던 19세기 후반에는 현대적 감각의 학생운동이 신식 학교에서 나타났다.

그런 풍경 중 하나를 1896년 11월 30일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배재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내부 토론회를 열고 거리 집회를 하며 기관지 <협성회보>를 발간하는 등의 방식으로 민주공화정 운동을 벌이고 고종 정권을 비판했다. 이들이 거리 집회를 여는 방식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9권: 학생독립운동사>에 묘사돼 있다.


"처음 그들은 연단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갔으나 청중이 없었다. 그래서 회원들은 편을 갈라 일부러 싸움을 벌였다. 그때 몇십 명이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모여들였다. 협성회 회원들은 싸움을 가장한 난투극을 멈추고,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열변을 토했다."

일제시대의 학생운동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한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 있는 아우내 만세운동 기념공원 조형물. 2019.2.14 ⓒ 연합뉴스

 
이런 에피소드까지 낳은 학생운동의 경험이 축적되다가 결실을 맺은 것이 도쿄 유학생들이 일으킨 1919년의 2·8독립선언, 유관순을 비롯한 국내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3·1운동이다. 종교인들이 사전 준비를 하고 일반 대중이 즉석에서 참여하는 형태로 시작된 3·1운동에서는 학생들의 집단적 참여도 두드러졌다.

원호처(국가보훈부) 산하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사업을 위해 설립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또 다른 서적이 <독립운동사자료집 제4권: 삼일운동사자료집>이다. 이 책은 3·1운동의 특징 중 하나를 이렇게 기술한다.

"또 하나의 데모의 특징은 많은 미션스쿨 소녀들이 두드러지게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대부분의 소녀들은 데모 장소까지 시간에 딱 맞게 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가 파한 후에 거리 모퉁이에 그룹별로 모여서 자유의 노래를 불렀다. 일본인들이 즉각 그 현장에 나타나서 손으로 소녀들을 이리저리 밀었다. 이것이 소녀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해산시키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총과 곤봉을 사용하며, 민족적 함성을 외쳤다고 그들을 잔인하게 때렸다."

3·1운동 이후에는 항일을 모토로 학생운동이 조직화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교내의 독서회 서클을 기층 단위에 두고 전국 규모의 조직화를 지향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1920년 5월에 등장한 전국학생대회, 1923년의 2월의 조선학생회, 1925년 5월의 조선공학회 등이 이런 흐름에서 조직됐다.

세상을 뒤흔든 '적색 삐라' 배포 사건

1929년 11월 3일 발생해 전국적으로 확산된 광주학생운동은 학생 항일운동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2010년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5집에 실린 윤선자 전남대 교수의 논문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의 변화'는 "광주학생운동을 겪은 일제는 특히 학생운동 조직의 적발·와해를 위해 노력했다"라며 "그 결과, 학생 조직은 대부분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었다"라고 설명한다.

학생운동이 지하로 숨어드는 추세 속에서, 피의자가 24명이나 나온 대형 사건이 압록강변의 신의주에서 발생했다. 1932년 5월 중학교급인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서 '적색 삐라'가 배포된 사건은 1930년대 학생운동이 박정희·전두환 치하의 학생운동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음을 보여준다.

'적색 삐라'는 이 시대 언론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일제는 한국 독립운동가와 일본 공산주의자들을 똑같이 아카(あか, 빨갱이)로 간주했다. 양쪽 다 일왕(천황)의 지배체제에 도전했으므로 그 둘이 일제 당국의 눈에 동일 부류로 비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1932년 5월 6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에 따르면, 운동권 학생들이 전날 오전 10시경 신의주고보에서 200여 장의 격문을 살포하는 일이 있었다. 이 기사는 "모종 적색 삐라를 동교 교실에 산포하고"라고 한 직후에 여덟 글자나 아홉 글자를 공란으로 비워뒀다. 전단 살포 뒤에 일제 비판이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구호를 외쳤다는 등의 내용이 기사에 있었기에 글자가 지워졌으리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언론 탄압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운동권 학생들은 전단을 살포하고 모종의 행동을 한 직후에 "학생 중에 스파이가 있다"며 학생 몇을 곤봉으로 때렸다. 프락치로 의심되는 학생들을 집단 공격했던 것이다. 총독부 기관지인 6월 3일 자 <매일신보> 7면 상단에는 프락치 학생들이 '밀정 생도'로 표기돼 있다. 수사가 상당히 진척된 뒤에 나온 이 보도에서도 그들이 밀정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운동권 학생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현장에서 붙들린 2학년 김인호(17세)나 3학년 김아무개가 언론에서 거명됐다. 신의주경찰서가 전교생 360명을 조사한 뒤에 보도된 5월 7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에는 김인호를 비롯해 4학년 리혜용·김봉오가 거명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5학년 아무개가 "수모자"로 언급됐다.

그러나 사건 발생 1개월이 다 돼가는 시점에 발행된 6월 3일 자 <동아일보> 2면 좌상단에는 3학년 박병상이 핵심 인물로 등장했다. "주범 박병상·정택신·백봉우·리태현·강영식·백봉우·김인호·전종식 등"이라는 대목이 기사 첫 문장에 나온다. 전교생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했을 때는 박병상이 부각되지 않았다. 그랬다가 수사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박병상이 핵심 주역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동맹휴학 주도, 프락치 공격... 박병상의 항일운동
 

1932년 6월 3일자 <동아일보>,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난 '학생 격문 살포 사건'을 보도한 내용.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에 정리된 사건 내막에 따르면, 박병상은 1년 전인 1931년 3월경부터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서클 활동을 시작했다. 공산주의가 좋아서보다는 제국주의가 싫어서 제국주의의 반대편인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것이 이 시대 학생들의 풍토였다.

서클 활동이 이어지던 중에 4학년생 박일봉·김일규 등이 누군가의 밀고로 퇴학 처분을 당했다. 그러자 박병상은 그해 12월 24일 자신의 방에 서클 회원들을 모아놓고 동맹휴학 방안을 모색했다. 이 모임에서 나온 결론은 선천의 신성중학교와 정주의 오산학교 등과 연대해 동맹휴학을 일으키는 한편, 프락치 학생 및 교직원들에게 타격을 가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격문 작성을 위해 등사기를 구입한 서클 회원들은 1932년 2월 5일에는 박병상 방에서, 4월 7일에는 백봉우 방에서 원고를 작성한 뒤 4월 25일 백봉우 방에서 등사기를 돌렸다. 그런 뒤 "5월 5일 오전 10시에 적긔를 들고 곤봉과 단도 등으로 스파이 학생과 직원을 란타 부상시키엇든 것"이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사건 직후에 검거 선풍이 일자 박병상은 서울로 피신했다. 바로 위쪽에 압록강이 있기는 했지만, 만주사변(1931.9.18)으로 만주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간 뒤였기 때문에 압록강을 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남쪽으로 달아난 그를 체포하고자 서울까지 출동한 일제 경찰이 평안북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김덕기(1890~?)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덕기 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격문 살포 사건'의 주모자인 이종림·박병상 등을 체포하기 위해 평안북도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 계난수 등과 함께 형사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출장하여 체포 활동을 전개했다."

김덕기가 친일청산기구인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고 1개월 뒤에 보도된 1949년 3월 11일 자 <경향신문> '김덕기의 악질 죄상'은 "그가 검거한 사건 수는 무려 1천 건"이라고 전했다. 독립운동가를 잘 잡기로 소문난 일제 경찰 김덕기가 박병상을 잡으러 서울까지 출동했던 것이다.

유명한 항일운동 사건의 주역인 박병상의 이름은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명단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보훈부가 인정하든 않든, 그는 독립운동과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학생 항일운동이 지하로 숨어들던 시기에 박병상은 비밀 서클 활동과 동맹휴학 추진이라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학생운동 방식을 주도했다. 그에 더해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일제 교사와 프락치 학생들을 공격하는 급진적인 행적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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