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2 10:50최종 업데이트 24.03.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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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시즌입니다. 정치에 항상 등장하는 술은 맥주입니다. 맥주와 정치에 대해 2부로 나눠 전해보려고 합니다. 1부는 정치를 품은 맥주, 2부는 크래프트 맥주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이 어지러운 시기, 맥주 이야기로 머리를 식혀보는 건 어떨까요?[기자말]

2022년 10월 9일,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연설하고 있는 도미니크 블라즈니 ⓒ EPA/연합뉴스


2022년 10월 치러진 오스트리아 대선, 반항기 어린 눈빛을 내뿜는 남자가 자신의 얼굴이 담긴 커다란 패널 뒤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긴 머리, 문신이 가득한 팔, 청바지를 걸친 모습은 엘리트 냄새가 솔솔 나는 다른 후보들과 확연히 달랐다. 우리에게는 히피 남성이 대통령에 출마하는 그림이 낯설 수 있지만 그 또한 엄연한 정식 대통령 후보였다.  

대선 결과는 오스트리아 기득권 정당을 경악에 빠트렸다. 다른 유럽 국가와 언론도 주목했다. 1위는 예상대로 녹색당 판 데어 벨렌 후보였다. 57% 득표율을 올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2위는 18%를 얻은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월터 로젠크란츠였다. 그러나 이 선거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8.3% 득표율로 3위에 오른 37살의 젊은 청년, 도미닉 블라즈니(Dominik Wlazny)였다. 


그가 속한 당은 2019년 총선에서 0.1%, 2020년 비엔나 주 지역선거에서는 1.8% 득표율을 획득한 소수 정당이었다. 의석은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비엔나 주 밖에서는 선거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역대 최연소 대선 후보 도미닉 블라즈니는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겨우 8개의 선거 포스터만 전국에 붙일 정도로 세력이 미약한 이 당의 정체는 2014년 출범한 오스트리아 맥주당(Austria Die Bierpartei)이다. 

맥주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맥주 정당
 

오스트리아 맥주당 로고 ⓒ 위키미디어 공용

 
마르코 포코(Marco Poco)로 더 알려진 도미닉 블라즈니는 의사출신 록커다. 마르코 포코는 펑크 록밴드 터보비어(Turbobier) 리더의 또다른 이름이다. 터보비어도 그가 직접 만든 맥주에서 따왔다. 2016년과 2022년 오스트리아 뮤직 어워드를 수상하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맥주 정당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2014년 발매한 '맥주당'(Die Bierpartei)이라는 첫 앨범에서 나왔다. 노래 가사에는 '맥주 주세를 폐지하고, 모든 맥주 양조장이 큰돈을 벌게 하겠다'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블라즈니가 맥주당을 만들었을 때, 이 가사를 진지하게 실현시키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초기 강령은 비엔나에 맥주 분수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매월 50리터의 맥주를 공짜로 나눠주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맥주에 청량음료를 섞은 라들러 같은 알코올음료를 비엔나에서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법도 약속했다. 맥주 애호가들에게 라들러는 불순한 술이었다. 사실 농담 반, 장난 반에 가까웠다. 

맥주당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2019년 공개된 이비자 스캔들 동영상 때문이었다. 동영상에는 2017년 오스트리아 부총리가 스페인 이비자 섬에서 러시아 여성 재벌에게 카지노 사업권과 고속도로 개발권을 주는 대가로 정치 자금 후원을 요구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스캔들로 인해 부총리가 사임했을 뿐만 아니라 야당의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와 내각이 모두 물러났다.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블라즈니는 이비자 스캔들을 통해 드러난 정치인들의 가식을 풍자하는 의미로 2019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맥주 분수를 만들고 공짜 맥주를 나눠주는 것이 앞뒤 다른 기득권 정치보다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설파했다. 선거 운동에는 당연히 무료 맥주가 동원됐다. 인원과 예산의 제약으로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5000여 표를 얻는데 그쳤지만, 맥주당은 정치 무력증에 빠진 유권자를 선거로 불러 모으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2020년 비엔나 지방 선거에 참여한 맥주당은 놀랍게도 대부분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기존 강령에 더 세련된 공약들이 더해졌다. 코로나 때문에 고통받는 예술가 지원이라든지, 공공 보건 문제, 더 나아가 환경 문제까지 거론했다. 기존 정당에 비해 조직력은 열세였지만 1000여 명의 당원들의 노력 덕에 1.8% 득표율을 얻을 수 있었다. 낮은 득표율이었지만 선거 캠페인을 진행하며 블라즈니는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고, 202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했다. 그리고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맥주야, 정치를 부탁해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을 만든 사람들. 수염을 가진 남자가 당수 야누시 레빈스키다 ⓒ 위키미디어 공용

 
우리에게 생경하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30년 전부터 맥주 정당이 존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맥주 정당이 1990년 대,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한 시점에 출범했다는 사실이다.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동독 심지어 러시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맥주 정당 이름은 공교롭게 모두 '맥주 애호가 당'이었다. 

중심에는 1990년 창당한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Polska Partia Przyjaciol Piwa)이 있었다. 이 당의 발단은 1980년 말에서 1990년 초까지 TV에서 방영된 '비어 보이 스카우트'였다. 이 시트콤은 보이 스카우트 단복을 입은 남자들이 맥주 내기를 하며 모험을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이디어는 술자리 농담에서 나왔다. 어느 날 방송을 준비하던 스태프와 출연진이 맥주를 먹다 맥주당을 창당하자는 농담을 했고 장난처럼 나온 의견이 <판>이라는 잡지 편집장 귀에 들어가며 구체화 됐다. 

당명은 폴란드 맥주 애호가 당이었다. 강령은 좋은 맥주 문화를 부흥시키고 품질 높은 맥주 양조와 소비 장려를 통해 보드카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판>의 편집장 아담 할베르는 1990년 가을 호에 맥주 애호가 당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냈고 실제 수천 명의 당원이 모집됐다. 

당의 총수는 비어 스카우트의 주연이었던 야누시 레빈스키가 맡았다. 정강 정책도 세분화됐다. 독주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소규모 맥주 양조장 설립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 골자였다. 좋은 양조용수를 위해 환경법을 강화하는 정책도 있었다. 

레빈스키의 대중적 인지도와 톡톡 튀는 강령은 유권자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1990년 10월, 세계 선거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 일어났다. 맥주 애호가 당이 무려 16명의 의원을 배출해 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 정치는 맥주 애호가 당에게 녹록지 않았다. 맥주당의 가치는 흥미로웠지만 보편적 가치로 승화되기에 부족했다. 당의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온 것도 문제였다.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영입된 사업가들은 당의 비전보다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활동했다. 맥주 애호가 당은 길을 잃었고 1993년 폴란드 대통령 바웬사가 의회를 해산했을 때 사라지고 만다. 

이 시기에 맥주 애호가 당이 동유럽 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불안정한 민주주의 시스템 때문이다. 공산주의 옷을 막 벗은 나라들은 민주주의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이념과 가치를 가진 정당들이 나타났다. 수많은 계급이 정치에 참여했고 진영은 분열됐다. 어지러운 시기,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는 진영에 얽매이지 않고 유쾌한 비전을 제시한 맥주 애호가 당에 표를 던졌다. 

폴란드 이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서 비슷한 정강을 갖는 맥주 정당이 탄생했지만 의회에 진출에는 모두 실패했다. 실패 이유도 엇비슷했다. 사람들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보편적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을뿐더러 업계의 작은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정치적 확장력이 약했다. 국민보건이라는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맥주를 통해 정치적 낭만을 품을 수 있었다. 정치 속 맥주는 어색하지 않았다. 와인이나 위스키에는 없는 연대감이 맥주에는 담겨 있었다.

맥주, 정치와 만나다
 

퇴근 후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하는 영국인들. 런던 블랙프라이어 펍 ⓒ 윤한샘

  
맥주가 정치와 연결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부터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귀족과 농민으로 구분되던 시대를 노동자와 자본가 시대로 바꿨다.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자 계급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정치에 뛰어들었다. 부르주아지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의회 권력이 노동자, 농민, 시민 계급으로 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콥 블루메는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에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각성을 맥주에서 찾았다. 산업사회 노동자의 술은 싸구려 증류주였다. 고된 노동과 낮은 임금 그리고 참혹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빨리 취할 수 있는 증류주를 선호했다. 블루메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보드카나 진에 중독되는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술에 취한 노동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불평과 불만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치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이 늘어갈수록 사회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가정은 파괴됐고 공동체 질서는 망가졌으며 노동의 질도 떨어졌다. 19세기 후반 노동자들의 단체가 늘어나고 의회에 진출하면서 절주는 주요한 이슈가 됐다. 노동단체는 노동자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교육과 캠페인을 벌였다. 증류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 국가 위협으로 다가오자 정부와 기업도 이에 동참했다. 

대안은 맥주였다. 싸구려 독주보다 맥주가 장려됐다. 가격이 저렴해 노동자들이 마시기에 부담이 없었고 알코올도 낮았다. 때마침 독일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맛과 품질이 뛰어난 라거가 부상했다. 비슷한 시기 유행한 거대 맥주홀도 이 흐름에 한몫했다. 야외 집회가 제한된 노동조합은 맥주홀에 모였고, 임대료가 급했던 맥주홀 또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독일 맥주홀의 역할을 영국에서는 펍이 담당했다. 퍼블릭 하우스(Public house)의 줄임말인 펍(pub)은 일에 지친 노동자들이 유일하게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나눴고 더 나아가 사회와 정치에 대해 토론했다. 자연스럽게 맥주는 공동체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맥주홀과 펍이 노동자의 놀이터가 되며 맥주는 정치와 손을 잡았다. 

비어트랙(beer track)과 와인트랙(wine track)  

2023년 미국 정치 분석가 론 브라운슈타인은 공화당 후보를 분석하며 트럼프 지지자를 비어트랙에, 론 디센티스 지지자를 와인트랙에 비유했다. 비어트랙은 블루컬러, 저연봉, 대학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 계층을, 와인트랙은 화이트컬러, 고연봉, 대학 졸업자를 의미한다. 트럼프가 론 디센티스를 지지하는 와인트랙을 어떻게 포섭하느냐가 공화당 경선의 핵심이라는 논평이었다. 21세기 미국 정치에서도 맥주는 노동자, 서민 계층을 대변하는 술을 상징했다. 

2024년 1월 와인트랙을 타던 론 디센티스는 트럼프에 무릎을 꿇었다. 경선에서 물러나며 비어트랙을 타고 있던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다. 아직 경선에 남아있는 공화당 후보 니키 헤일리가 어떤 트랙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맥주와 와인을 모두 거머쥔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술을 한 잔도 못 하는 트럼프의 마법이 궁금할 따름이다.  

올해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맥주당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대선에서 3위를 한 도미닉 블라즈니에 고무된 맥주당은 많은 후보를 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들은 4년 전보다 더 세련되고 정제된 모습으로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30년 전 폴란드 맥주 애호당과 다른 길을 걷는 방법을 택한 듯하다. 

유로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블라즈니는 기후 변화와 연대를 이야기했다. 맥주당원으로 입후보한 카트린 프라프로트니크는 기회의 평등, 보건, 교육을 내걸었다. 맥주문화를 통해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 언더독'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과거에는 다양한 맥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 같은 모호한 가치를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현실 정치에 어울리는 보편적 가치를 다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 맥주당이 총선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맥주로 보편적 가치를 매조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양성과 취향을 존중하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그들의 문화는 부럽다. 만약 대한민국 총선에 도미닉 블라즈니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의사 출신이 맥주당의 대표라는 사실부터 큰 비난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정치적 조리돌림을 당하며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곧 다가올 대한민국 총선, 엄청난 마타도어와 갈등이 넘쳐나겠지만, 격랑의 물결 속에서도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 노동자, 서민 계층의 정치 참여에 맥주가 멋진 파트너였듯, 맥주문화가 지향하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 맥주잔 아래 평등할 수 있는 권리, 침범당하지 않는 자유가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국회의원 선택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결과가 어떻든 승자에게 박수를, 패자에게 위로의 포옹이 함께 하길. 물론 그 순간에 시원한 맥주가 함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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