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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름을 '피서의 계절'이라 했는가. 방학 동안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용돈에 보태고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대학생들에게 여름은 '알바의 계절'이다. 편의점, 마트, 과외에서부터 시작해서 공장, 택배하역, 엑스트라 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청춘들은 오늘도 땀을 흘린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땀 냄새 물씬 나거나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알바 체험기를 소개한다. [편집자말]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화랑역할을 맡고 있는 어린이 보조출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화랑역할을 맡고 있는 어린이 보조출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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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자들 이렇게 많이 데려오래? 안 되겠다, 남는 애들은 화랑시켜 화랑. 어차피 꽃미남이어야 하니깐."

자정에 여의도 집합. 고속버스 2대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진 우리가 오전 5시 반이 되어서야 도착한 곳은 경주에 위치한 신라 밀레니엄 파크. 올해 9월부터 방영 예정인 KBS 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이자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10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우리 보조출연자들. 반장님이 나와 적당히 군기를 잡은 뒤 배역을 정한다. 이왕에 하는 것 평범한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상궁', '나인' 역할을 지망해 나인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뭣도 모르고 나인에 지망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선택받은 우리를 제외하고 남은 여자 보조출연자는 20명 정도였는데, 제작진은 수요를 훨씬 능가하는 공급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그들은 신라시대 최고 꽃미남 집단, '화랑'이 되었다.

사극 엑스트라, 대학생부터 70대 할머니·중국인까지

'귀족'의상. '평민'에 비해 3겹이나 많은 탓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촬영 내내 평민역할을 맡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귀족'의상. '평민'에 비해 3겹이나 많은 탓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촬영 내내 평민역할을 맡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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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토요일 하루동안 전문가의 손길을 빌려 머리를 올리고, 장신구를 달고 의상까지 갖추니 제법 그럴싸한 '귀족 부인'이 되었다. 내가 맡은 '나인' 역할은 오후에만 촬영하면 되니 일단은 '귀족'이 되어 있으라는 반장님의 명이었다. 처음 하게 된 연기는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의 행렬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장면이었다.
"보조 출연자들 10보만 오른쪽으로 이동할게요."
"거기 아줌마 나무벤치 안 보이게 벤치 가려."
"어이 거기 파란봇짐, 너 앞쪽으로 나와, 다들 지그재그로 서 있으세요!"

사람이 많아 보이도록 지그재그로 서 있으라는 말이었다. 행렬 '그림'이 제대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 앞으로 오라 뒤로 오라 간격 맞추기에만 1시간이 걸렸다.

"저기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어린애들은 소리도 지르고, 열렬히 환영해 주세요!"

촬영장에는 13개월 아기부터 70대 베테랑 엑스트라, 심지어 중국인도 여럿 있었다. 대사가 없기에 가능한 일. 중국인 친구 3명과 함께 온 조선족 출신의 보조출연자는 "방학이라 왔다, 할 일도 없는데 친구가 소개시켜 줘서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단기로 돈을 벌고 싶어 온 대학생들이 가장 많았고, '사극' 중심으로 고정출연을 하는 사오십대 '삼촌', '이모'들도 많았다. 삿대질 하나라도 그들이 하면 달랐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들의 연기에 감탄했더랬다.

사극 엑스트라들이 배식받은 점심을 먹고 있다. 밥 먹을 장소도 없어 나무둥지에서 불편하게 식사를 한다.
 사극 엑스트라들이 배식받은 점심을 먹고 있다. 밥 먹을 장소도 없어 나무둥지에서 불편하게 식사를 한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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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화려한 의상을 입어도 엑스트라는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주연 배우들이 시원한 정자에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정자 밑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더위를 피했다. 35도의 무더운 날씨에도 의상은 3~4겹이 기본이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치마폭 사이로 땀이 말 그대로 줄줄 흘렀다. '상궁' 역을 했던 보조출연자는 20여 분 동안 임금 뒤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포개었던 손 사이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반팔에 반바지, 에어컨 바람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그늘에 앉아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자정에 집합해 버스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 전부인 터라 보조출연자들은 시간만 나면 졸기 시작했다. 백성, 귀족 할 것 없이 초가집에 기대어 입을 벌리고 잠들기 일쑤였고, 반장님 눈을 피해 곳간에 숨어들어가 대(大)자로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쉴 틈만 나면 창피한 것도 모르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돈 버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 그리고 노동 후의 '꿀잠'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했다. "백성들 집합하세요!" 이제는 백성의 '백'자만 들어도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언제 집에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없이 지루하고 긴 시간이었다.

대기시간이 있었던 나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랑이 된 여자 출연자들은 더욱 불쌍했다. 4시간 동안 뙤약볕에 춘추와 함께 무릎 꿇고 앉아있느라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게다가 저녁 촬영은 춘추와 유신이 격돌하는 장면이었는데, 춘추의 화랑들이 유신의 군대로부터 두들겨 맞는 장면을 10번 넘게 찍었다. 친구들끼리 서로 두들겨 패는 것이 웃겼는지 병사들이나 화랑들이나 웃음이 터지기 일쑤였다. "이빨 보이면 무조건 다시 찍는다"를 외치는 감독님의 목소리에 화랑들은 햇빛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두들겨 맞아야 했다. 여자라고 예외는 없었다. 

"오늘은 양반이죠, 어제 햇볕에 화상입은 사람도 있어요"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에도 촬영은 계속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에도 촬영은 계속된다.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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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만 찜질방에서 자란다. 철야 수당을 줘서 급여도 2배라고. 밤에 찍는 신이 하나 남았는데 젊은 여자 2명이 부족하다고 했다. 술 한잔만 따르면 끝이라는 반장님의 말에도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집에 갈래요"라고 말했다. 이런 우리가 야속했는지 다시는 <대왕의 꿈>에 올 생각 말라는 반장님의 말에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일이 고되고 힘들었던 것. 재미삼아 놀러온 남자 고등학생 무리들은 "100만 원을 준다면 다시 오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베테랑 엑스트라들은 달랐다. 벌써 삼일 동안 단양에서 촬영을 하고 온 20대 초반의 한 친구는, 이렇게 해야 고정출연을 얻을 수 있다며 철야도 불사했다. 이미 이틀을 찜질방에서 잔 그녀는 오늘도 찜질방에서 묵을 예정. 또 다른 베테랑 보조출연자에게 물었다. 오늘보다 힘든 날도 있었느냐고. 그랬더니 "오늘은 양반이에요, 어제는 햇볕이 더 뜨거웠는데 그래서 얼굴에 화상을 입는 바람에 오늘 못 나온 엑스트라들도 있어요"라며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내일도 일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엑스트라들이 받는 돈은 얼마일까? '사극'은  현대극 엑스트라에 비해 일이 고되고 보통 지방촬영이라는 단점이 있다. 대신에 따로 의상을 준비할 필요가 없고,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일한 시간으로 쳐주기 때문에 한 번 하면 수입이 쏠쏠하다고 한다.

하루동안 사극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통해 받은 금액.
 하루동안 사극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통해 받은 금액.
ⓒ 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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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극은 오전 6시~오후 4시까지 촬영을 기준으로 4만 원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오전 6시에 시작해 오후 8시에 촬영이 끝났고, 고속버스가 나를 여의도에 내려준 시간이 오전 1시였다. 저녁을 먹지 못하면 식대가 나오고 새벽에 도착하면 택시비도 준다고 했다. 경주 촬영장까지 가는 금액은 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돌아오는 시간은 촬영시간에 계산된다고 하니 오전 1시에 도착한 나는 '철야' 작업까지 한 셈이다. 10만 원도 받을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업체를 통해 입금 받은 금액은 6만3000원. 최소한 10만 원은 받으리라 생각했던 나는 업체에 전화해 물었다. 업체는 그제서야 철야수당이 빠진 것 같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새로 입금 받은 금액은 그보다 만 원 더 받아 7만3700원이었다. 처음 업체에 보증금으로 낸 3만 원을 제외하면 4만 원 정도가 남은 셈이다. 앞으로 더 할 생각이 없으니 보증금 명목으로 낸 3만 원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것은 '평생회원등록'을 위한 것이었기에 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정수리가 빨갛다. 특히 이마와 머리가 시작되는 부분은 시뻘겋게 익었다. 왕복 10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12시간 동안 서 있었던 탓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4일 자정에 출발하여 5일 새벽 1시에 서울로 돌아왔으니 총 25시간을 일한 셈이다. 7만3000원 정도의 큰 돈을 한 번에 벌 수 있다는 점에서 사극 엑스트라 알바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다시 할 자신은 없다. 사극 알바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엑스트라 선배'로서 조언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고재연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 2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엑스트라, #사극, #아르바이트,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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