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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사 편집장을 하던 당시, 나는 한창 글 욕심이 폭발했었다. '편집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쓰는 칼럼에서는 특히 그랬다. 나는 편집장이라는 '간지'(폼나는 느낌·지위 등을 일컫는 속어)에 어울리게 그럴싸하고, 있어 보이는' 글을 쓰기 위해 도서관을 기웃거렸다. 데리다가 어쩌느니, 라캉이 뭐라느니 등의 말을 옮겨 적으며 마치 그들의 사상을 내가 모두 이해한 마냥, 지적 허영심을 느끼며 흡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럽게도 그들의 글을 옮겨 적어 내 다이어리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내가 '준'철학자가 됐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철학에 대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은 책이 아닌 텔레비전을 보면서부터였다. 나는<1박 2일>을 보고 있었다. 출연자들이 세 팀으로 나뉘어 팀 별로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 팀 중 어떤 팀은, 주원과 엄태웅으로 구성됐다. 한 명이 먼저 언덕 위로 빠르게 뛰어 올라가 그 위에서 퀴즈 답을 맞히고 돌아오면, 나머지 한 명도 올라가 퀴즈를 맞히고 오면 그들의 미션은 성공이었다. 엄태웅이 먼저 열심히 뛰어 올라갔다. 그에게 주어진 문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했던 철학자의 이름이 무엇인가"였다.

".....? 무슨 '트르'로 끝나지 않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마지막 남은 지적 허영을 있는 대로 짜내어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마치 답을 알지만 기억이 안 난다는 말투가 나왔다. 부끄럽게도 답은 '트르'로 끝나지 않는 '데카르트'였다.

고전은 옛날 이야기가 아닌, 지금 현재의 이야기

<청춘의 고전> 겉표지
 <청춘의 고전> 겉표지
ⓒ 알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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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이라는 책은 나처럼 '간지'나 보이기 위해 철학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충고부터 시작한다. 고전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만약 예전의 내게 노자의 '도덕경'이 주어진다면, 일일이 필기하며 적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삶의 기준 속에서 과거의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지금 내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쓰여 있는데, 고전이라는 이유로 좋은 이야기로만 이해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 바람직한 가치를 담고 있지 않은 이야기라면 버려야 하죠. 그것이 우리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가 돼야 하고, 고전을 읽는 이유가 돼야 합니다."(본문 중에서)

철학자들의 두껍고 어려운 철학 책도, 공자 왈 맹자 왈 고리타분하고 낡은 듯한 고전도, 사실 읽는 방법은 하나인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어쩌면, 그들의 고리타분한 생각들이 우리에게 '졸음'과 함께 전달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공자가 살던 그 당시엔 환경오염, 공해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때다. 우리와 다른 세상을 살던 사람들의 말이니, 너무 오래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리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 고전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복잡다단한 모든 사람들의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하다 보니 추상화처럼 '구조'만 남아서일 것이다. 푸코도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철학의 과제는 우리 세계에 대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고. 더 나아가 이 분석의 목표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있는 모습과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철학은 내가 암기하려 노력한 것처럼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의 질병을 진단하고 이를 치유해줄 힘을 스스로 기르게 도와주는 것이 철학이다.

영화 <트루먼쇼>와 안토니오 그람시... 대체 공통점이 뭐야

이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에도 익숙하지 않은 철학자들의 이름이 마구 튀어나온다. 심지어 그들의 사상까지 이해하려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솔솔 오는 것은 막기 어렵다. 그나마 다른 철학책보다 잠이 덜 오긴 한다. 왜냐면 이 책은 철학부터 소개하지 않고 영화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와 관련된 철학을 함께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쉽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타 철학 책들과 다른 점은, 철학자들의 낯선 이름만 봐도 지레 겁먹을 초보들을 위해 먼저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 이야기가 철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줄여주는 심리적 완충작용을 한다는 의미다.

이 책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마지막 장이다. 제10장 '현대 언론은 헤게모니 전쟁 중'은 영화 <트루먼쇼>와 안토니오 그람시를 연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주의자'다. 처음 이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왜 그람시와 <트루먼쇼>가 연결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트루먼쇼>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역시 철학이란, 쉽지 않았다.

영화 <트루먼쇼>의 한 장면
 영화 <트루먼쇼>의 한 장면
ⓒ 피터 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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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트루먼쇼>와 그람시의 연결고리는 '헤게모니'다. 정확히 말해 이 장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현대 언론의 헤게모니 장악과 관련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좋을 듯하다. 특히 이 부분을 읽을 때 현재 우리나라 언론의 현실과 헤게모니에 대해 떠올린다면 생각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언론의 헤게모니 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이 책에서도 우리나라의 사례를 들고 있다. 현대 권력의 지배방식은 그람시가 말했던 헤게모니보다는 조금 더 세련되지만, 지금도 역시 헤게모니는 대중을 지배한다.

"광고에 의지하는 언론은 보다 많은 대중이 본다는 것을 광고주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경우 시청률 조사도 그래서 중요하지요. 많은 대중이 본다는 것은 광고에 나오는 상품을 더 많이 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언론매체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습득할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광고도 접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가 접하는 언론 속 광고들은 엄청나게 많다. 어쩔 수 없다. 언론은 광고에 의지하지 않고는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인터넷 매체들도 많은 이들이 기사를 읽게 하기 위해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기사를 포털에 내보내지 않는가. 최대한 많은 이들이 기사를 읽어야 광고주에게 당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역시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욕하면서도 읽는다.

"대중인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교양과 오락성 중 어떤 것을 원하는지 조사하면 교양이 높게 나오는데, 대중들이 실제로 선택하는 프로그램은 오락성이라고 합니다."

요즘 한창 모 걸그룹의 왕따설과 런던 올림픽에 관련된 뉴스만 포털 메인 페이지에 도배되다시피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인천공항의 급유시설이 민영화될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론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현대 언론의 헤게모니 아닐까.

철학책을 '간지'나게 읽는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맥락 없이 '헤겔이 무엇이라 카더라'라고 떠드는 것은 지적 욕망에 근거한 '자뻑'(자화자찬)에 불과할 뿐 아니라 철학을 접하는 이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 <청춘의 고전>이라는 책은 영화라는 '청춘'들이 쉽게 접하는 소재를 가지고 철학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철학 책 치고는 그나마 쉬운 편이다. 하지만, 절대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모르겠다면 과감하게 건너뛰기를 권한다. 철학에 대해 어렵다는 생각만 잔뜩 안고 이 책을 덮는 것은 아예 읽지 않느니만 못하다. 이 책 어느 한 귀퉁이에서라도 내가 나 자신,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사고방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게 바로 진짜 '간지 나는' 생각을 얻는 법이다.

덧붙이는 글 | <청춘의 고전> (김성우 외 씀 | 알렙 | 2012.06 | 1만1000원)
차현아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프리덤' 2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춘의 고전 - 삐딱한 철학자들의 위험한 영화 보기

이순웅.김성우 외 지음, 알렙(2012)


태그:#청춘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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