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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남성인 한 친구가 자신과 '여자 친구' 사이에서 생긴 가치관의 차이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여자 친구와 전화를 하는데 해외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단다. 대수롭지 않게 이번 여름에 함께 해외여행 한 번 가보자고 말했는데, 다음날 여자친구가 그에게 실망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혼전의 남녀가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요지. 결국 그녀와 자신의 '성(性)적 가치관'이 달라서 고민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에 익숙지 않았던 나와 또 다른 친구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고는 어물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의문이 생겼다. 왜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 얼굴을 붉혀야만 했을까? 남녀 사이의 성적 대화가 '금기시'되는 이 사회의 분위기가 우리의 입을 막았던 것은 아닐까?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김두식 저, 창비 펴냄)는 이제는 욕망에 충실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동행해온 '욕망 바이러스'를 부인하고 억압할수록 욕망은 왜곡된 발로를 찾을 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륜 저지른 모범생 어른들, '욕망 불태우지 못한 소년' 때문

<욕망해도 괜찮아> 표지
 <욕망해도 괜찮아>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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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억압된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매주 금요일 KBS2 <사랑과 전쟁>에 단골로 등장하는 '불륜'이다. 작가는 불륜으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신정아, 변양균 '스캔들'에 대해 들여다본다. 그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이 '스캔들'을 단순히 중년 남성의 그렇고 그런 지분거림으로 보는 대신에, '불 피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불륜의 주인공들은 주로 아주 모범적인 길을 걸어온 이들이라는 것이다. 즉, '일탈'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바르게만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는 것.

이렇게 젊은 시절 자신의 '혈기'를 각종 고시에만 쏟아 부었던 이들은 '성공한 어른'이라는 타이틀은 얻었을지 몰라도 마음 한구석이 허탈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열정을 쏟아 부을 만한 대상을 찾아 '색(色)'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혼인 외' 사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남성들은 기본적으로 '계(戒)', 즉 규범의 세계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늘 칭찬받았으며, 규범을 어긴 일이란 기껏 과속딱지 몇 번 끊은 게 전부입니다. 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훌륭한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 이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 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입니다. - 86쪽

결국 변양균 전 실장의 스캔들도 우리 내면의 욕망을 조금만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그저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중년의 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겉은 어른이지만, 속은 아직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불태우지 못했던 '소년'의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욕망'에 유독 엄격한 사회, 대한민국

또다른 억압된 욕망은 바로 지난 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레이디 가가'의 공연을 통해 나타난다. 그녀의 공연에 대해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로 음란문화를 조장하고 동성애를 미화한다"며 시위를 했고, 결국 공연은 청소년 관람 불가가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우리 일상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것이 과연 레이디 가가의 몸짓 뿐인지에 대해 반문한다.

우리 일상에서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모든 인간이 수도사나 스님처럼 경건한 삶을 살았다면, 우리는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치 성기를 갖지 않은 것처럼 아무리 고상한 얼굴로 연극배우의 삶을 살아간다 해도, 성행위의 결과물인 우리의 존재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레이디 가가의 몸짓을 굳이 성행위와 연결시켜 금지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면 족합니다. 그게 한결 자연스럽습니다. - 229쪽

결국 '성'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은 아주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한 목사가 "서울시 학생 인권조례에 임신자유권이 통과됐다"며 "전교조 안에는 성(性)을 공유하는 사람 1만 명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근본적 기독교인들이 '사탄'이라고까지 지칭하는 레이디 가가도 사실은 굉장한 모범생이었다는 점이다. 가톨릭 여학교 출신의 그녀는 엄격한 금욕교육을 받았고, 어떠한 일탈도 하지 않았던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레이디가가의 파격적인 모습들은 그녀가 어린 시절 겪었던 '지독한 억압'에 대한 극단적 표출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모텔' 보는 게 왜 문제인 거죠?"

김두식 교수
 김두식 교수
ⓒ 김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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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는 '몸'에 대한 고민이 한참 부족한 사회에 살고 있다. 자연스러운 '성'과 '몸', '욕망'과 같은 것들을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탓이다. 어른들이 언급 자체를 기피한 탓에 현재 청소년들 사이의 성교육 실태는 그야말로 엉망이다. '욕망'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고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님에도 어른들이 '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함구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어른들이 아이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모텔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다른 교수와 논쟁을 벌이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모텔이 들어서면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해가 있을까요?"
"모텔에 드나드는 남녀를 보게 되고, 당연히 교육적으로 좋지 않죠."
"글쎄요. 애들이 보게 되는 것은 그냥 사람들이 모텔에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습 아닌가요? 여행 다니면서 모텔에 묵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요. 그걸 본다고 왜 교육적으로 나쁜 거죠?"
"(아주 점잖고 합리적인 분인데, 표정이 서서히 짜증으로 바뀌면서) 아니 그럼 애들이 그런 걸 봐도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는 그 자체로 문제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모텔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대한 과도한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이상, 모텔에 드나드는 모습만으로 교육적으로 나쁠 일은 없으니까요. 애들이 물어보면 그냥 잠자는 곳이라고 설명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젊은 남녀가 대낮에 들어가는 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관광 온 사람이 대낮에 들어가든 말든 애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을 거고요. 오히려 이런 반대운동 때문에 애들이 모텔에 불필요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은데요."

아이들을 '성(性)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하려 한 탓에 오히려 왜곡된 성(性)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은 바로 어른들이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하나의 '숙박시설'로 인식하고 말 것을 지나친 규제로 '불순한 곳'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과도한 상상'과 '불필요한 관심'을 만들어 내는 것도 결국 어른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욕망의 거울'을 들여다보고, 인정해보자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 중 한 장면.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 중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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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결혼 전까지 젊은 남녀가 욕망을 해소할 길이 없어진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남성을 위한 '순결주의'가 결론적으로는 남성의 욕망까지도 억압한다는 것.

영화 평론가 허지웅 선생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건축학개론>(2012)같이 잘 만든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기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걸 본 관객들도 역시 "성기가 없었던 것처럼 과거를 호출"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마음을 얻기도 힘들지만 몸을 얻기는 더욱 힘듭니다. 게다가 '88만원 세대'의 경우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결혼길이 막혀버렸습니다. 순결지상주의 사회에서 결혼길이 막히면 욕망을 해소할 길도 함께 막혀버립니다. 여성의 건강한 욕망의 해방을 막은 가부장제도가 결국 남성들 자신을 말려 죽이는 셈입니다. - 233쪽

그러고는 젊은이들에게 말과 글을 뛰어넘는 '살'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방식으로 '몸'에 대해 가졌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된 건강성과 은밀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몸의 문화입니다. 몸을 누르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 자체도 사회의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범생, '계(戒)'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소심한' 그는 만약 선을 넘는 것이 어렵다면, 선을 넓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숨겨진 '욕망'의 거울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이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인정하자는 것.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을 찾아와 "남자친구가 자꾸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하는데 어쩌냐?"는 고민을 털어놓은 한 학생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교수님 글을 읽어보았는데, 만약 따님이 대학에 들어가서 남자친구랑 2박 3일 여행을 간다고 해도 흔쾌히 허락하시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괜찮다고 할 거다, 다만 피임은 잘 하라고 할 거다, 딸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가 말한 경계 넓히기는 이런 것이었다. 조금씩 대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욕망'의 허용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다.

"이성 말고 감성에 자기를 맡겨 보는 거 어때요? 아님 나한테 맡겨보든가."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이 자신에게 당신을 맡겨보라고 말하며 김하늘에게 다가가는 순간, 침을 꼴깍 삼켰더랬다.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삶이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이 책은, 이제는 드라마를 보다가 예기치 못한 베드신이 나와도 나의 '순진함'을 위해 딴청을 피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욕망해도 괜찮아>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교수) 저, 창비 펴냄, 2012.05.18, 1만3500원



태그:#욕망해도괜찮아, #김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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