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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의 크기는 얼마큼 일까? 먼저 톨스토이의 말을 들어보자. 그의 우화집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는 가난한 농부가 나온다. 하루는 가난한 농부에게 어떤 사람이 “당신이 발로 밟는 땅은 모두 당신에게 드리겠소” 제안을 한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농부는 신이 나서 온종일 땅을 밟았다. 쉬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서 그 농부는 엄청난 땅을 얻었을까? 그랬다면 인간의 욕망의 크기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농부는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가난한 농부라서 특별히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어리석어서 욕심의 크기를 조절하는 지혜가 없어 그런 것일까?

괴테의 희곡<파우스트>를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다.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당대에 유능하다는 파우스트 박사, 그도 가난한 농부처럼 불가능한 욕망을 꿈꾸었으니 말이다. 그의 욕망은 젊음을 되찾는 것이다. 영혼을 담보로 말이다. 그래서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다시 영혼을 되찾고자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우린 욕망의 근원과 만난다. 부어도, 부어도 채울 수 없는 밑 빠진 독 같은 욕망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정신분석학자 쟈크 라캉은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말이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와야 할 농부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던 것이고, 파우스트는 영혼을 버리고 젊음을 소유했지만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해 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못한 농부와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욕망

왜 대상은 욕망을 충족 못시키는 것일까? 라캉의 설명을 들어보자. 대상을 소유하는 순간, 그 대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의 신기루처럼, 또 다가가면 멀리 도망가는 사랑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소유할 수 없는 허상이 욕망의 대상이라면 인간의 욕망은 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계속 라캉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그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거나, 욕망의 충족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람을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신경증의 환자로 진단한다. 더 부연하자면 욕망의 대상은 신기루인데 이것을 실제로 착각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왜곡된 집착·고착'이 발생하는데, 그 현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환유(換喩, metonymy) 되지 못하고, 대상에 고착됨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라캉의 욕망이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욕망은 환유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광활한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살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희망이다. 이 희망은 다름 아닌 죽음보다 더한 갈증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오아시스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설혹 다가가면 멀리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 신기루의 대상에 고착되어 버린다면? 결국 허상을 실제로 소유했다고 착각함으로 모래를 먹어야 하는 고통과 절망에 빠져버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욕망의 일그러진 왜곡된 고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이 부정의 대상, 또는 악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이유가 바로 욕망이 환유 되지 않고 정지됨으로 일어나는 현상들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왜곡된 고착이 발생하며 그것이 비정상적인 신경증의 행동으로 나타나 욕망이 부정적인, 또는 억압시켜야 하는 대상이자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시 가난한 농부와 파우스트로 돌아가 보자. 그 농부는 왜 돌아오지 못한 것일까? 그리고 파우스트는 젊음을 소유하고도 후회했을까? 그 농부는 땅에 집착함으로서 돌아갈 시간을 망각한 것이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농부는 욕망의 대상에 고착된 병든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파우스트는? 그 또한 젊음에 고착된 나머지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영혼을 파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라캉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 둘은 병든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난한 농부는 구원받지 못하고 파우스트는 결말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의 은총으로 영혼을 다시 찾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전설 속에서 파우스트는 신의 벌을 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것을 다시 괴테가 재구성해서 구원(?)받도록 한 것이다. 구원은 신의 영역인데 말이다.

병든 욕망을 치료할 처방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가난한 농부도 재구성해서 구원시켜준다고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원전에 없는 내용을 추가해서 결말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은 작품들이 파우스트 말고도 많이 있고 지금도 재구성되고 있을 것이다. 왜 바꾸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원전처럼 그렇게 욕망의 끝에서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신에게 징벌 받는 게 한마디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욕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이 악을 이기는 권선징악의 스토리에도 열광하지만, 그것보다는 악인이 회심하는 것도 권선징악 못지 않게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또 인간의 한계, 실존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이야기나, 악을 숭배하며 신에게 도전하는 이야기도 대리만족의 차원을 넘어 현실에 실현 시켜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린 매우 고무적인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욕망의 끝에서, 욕망의 대상에 고착되어 때론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그것을 구원시키고 다시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인간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망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욕망 한다는 것은 희망을 꿈꾸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삶의 의미를 느끼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면 욕망의 가치를 너무 과대 평가한 것일까?

라캉이 욕망의 대상에 고착되어 신경증에 걸린 인류를 치료하기 위해서 욕망의 환유를 처방했듯이, 우리 스스로도 욕망의 대상에 고착되어 병든 우리의 실존을 구원시켜야 될 딱 맞는 처방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제도화된 종교의 처방 말고 말이다.

언제까지 해가 지는지 모른 채 땅을 밟고 있는 가난한 농부를 방치해둬야 하는가. 그 농부에게 시간의 한계를 자각시켜주는 일은 바로 우리 스스로를 자각시키는 일이며, 그 자각이 일어나는 시점이 바로 고착에서 벗어나는 길이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영혼을 되찾는 진정한 구원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부터 문화 속에 녹아져 있는 욕망을 읽으면서 그를, 그리고 우리들을 동시에 자각시키는 구원을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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