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30 19:15최종 업데이트 23.09.3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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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주 식품명인체험홍보관장이 22일 서울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예서헌에서 열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2023 추석차례상 시연 행사에서 모델들과 함께 전통 차례상 차림 및 차례 예법을 소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추석이 다가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요일인가도 중요하다. 추석이 주말과 겹치는 것은 많은 직장인들에게 반갑지 않은 일이다. 아침마다 가방 메고 나가야 하는 학생들 대부분에게도 마찬가지다.

샐러리맨의 입장에서는 추석이 가급적 수요일쯤에 있는 게 좋지만, 금년처럼 추석 직후에 개천절 같은 여타 연휴가 따라붙는 경우에는 셈법이 달라진다. 이런 경우에는 추석이 어느 요일인가도 중요하지만, 추석과 여타 연휴의 간격이 몇 날인가도 중요하다. 금년처럼 그 간격이 하루인 경우에는 임시공휴일을 추가로 누리기가 쉬워진다.


새해 달력을 처음 받은 뒤에 자기 생일과 더불어 명절을 확인하는 풍경은 백년 전에도 흔했다. 음력 생일이나 음력 명절에 익숙한 상황에서 양력 달력을 쓰게 됐기 때문에, 생일이나 명절이 양력 몇 월 며칠인가를 확인하는 신풍경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2년 뒤에 발행된 1921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 '불공평한 일요일의 분배'라는 기사를 쓴 기자도 새해 달력을 받자마자 명절과 공휴일을 체크했다. 오후만 쉬는 반공일은 몇 날인지 온종일 쉬는 온공일은 몇 날인지 등등이 그에게는 민감했다. 또 음력 명절이 언제 있는지도 관심사였다. 그는 우선 정월 초하루가 양력으로 언제인가부터 확인했다.

기사에서 그는 "총독부에서 발매하는 명년의 책력은 일전부터 저자에 나왓는데"라고 한 뒤 "위선 정월 초하로날이 공일인가 아닌가 하고 검사를 한즉 초하로날이 반공일이오 초이튿날이 왼공일인 고로 관텽 회사이나 학교에 다니는 사람의게는 그닥지 해롭지안코 따라서 정월대보름날도 반공일이다. 한식은 삼월 초십일인데 그날은 목요일인 고로 성묘에는 불편하겠고, 팔월 추석날도 공교히 목요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곡식 수확과 관련 있는 추석의 위상, 시대·지역마다 달랐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 관계자가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설날과 함께 추석을 최대 명절로 쇠는 현대 한국인들은 추석이 옛날에도 지금과 같은 위상의 명절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신라인들이 추석을 즐겼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자주 인용되다 보니 그런 생각을 갖기가 더 쉬워진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제3대 임금인 유리이사금 때 음력 7월 16일부터 여성들이 두 패로 갈려 길쌈시합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합에서 진 쪽이 음력 8월 15일에 음식을 장만하고, 노래와 춤과 놀이를 함께 즐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가위 명절이 아주 오래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위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1849년에 정석모가 쓴 풍속학 서적인 <동국세시기>는 추석에 관한 대목에서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으로 향촌의 농가에서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삼는데, 그것은 새 곡식이 이미 익었고 가을 농작물을 추수할 때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이 나온 시기에도 추석이 주요 명절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이 책의 표현대로 추석은 곡식 수확과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농업의 발전 정도에 따라, 추석이 갖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창업한 원동력은 지금의 함경도에 근거지를 둔 사병 부대였다. 책사 정도전이 초면인 이성계에게 반한 것은 그 사병 부대 때문이었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야인 시절의 정도전은 함주 막사의 이성계를 찾아갔다가 사병들을 보고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며 감탄했다.

정도전이 매료된 함경도 사병들은 여진족이었다. 조선 건국 직전인 이 시기에도 평안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에까지 여진족 생활권이 형성돼 있었다. 이는 농산물 추수를 배경으로 하는 추석 명절이 이런 지역들에서는 확산되기 힘들었음을 의미한다.

1993년에 <비교민속학> 제10집에 실린 임재해 안동대 교수의 논문 '세시풍속의 변화와 공휴일 정책의 문제'에도 정리돼 있듯이, 추석은 주로 삼남 지방에 국한된 풍속이었다. 이 명절을 쇠는 추석권의 지역적 범위에 관해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세시풍속에 따른 문화권설을 참고하면, 추석권은 남한강 남쪽 소백산 서쪽에 한정되는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이다. 남한강 북쪽은 온통 단오권이며, 남한강 남쪽 소백산 동쪽은 추석단오 복합권이다."

충북과 경북 사이에 소백산이 있다. 남한강 이남이자 소백산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추석문화가 가장 강했고, 남한강 이남이자 소백산 동쪽인 지역에서는 그다음으로 강했다는 설명이다. 농경문화가 특히 발달한 삼남 지방에서는 추석의 인기가 높았지만, 한반도 전역을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삼남에서 추석의 인기가 높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전폭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89년에 <한국문화인류학> 제21집에 수록된 임재해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인 '단오에서 추석으로 - 안동 지역 세시풍속의 지속성과 변화'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은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안동 지역의 마을을 돌아보면 당나무에 썩은 그넷줄이 잘린 채 매달려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단오절의 흔적이다"라며 "그러나 추석절의 경우는 거의 아무런 행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 뒤 "추석절의 가장 큰 의식인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햅쌀이 추석 전에 나오지 않으면 추석을 건너뛰고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에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이 경북 지역에 많았다고 논문은 소개했다. 음력 8월 15일을 비중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아주 많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추석이 지금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지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은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단오절이 더 인기가 있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020년에 <사회와 역사> 제127집에 수록된 백광열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의 논문 '설·추석 명절 공휴일의 계보학 - 20세기 한국 국민문화 형성의 한 경로에 대하여'는 19세기 전후까지만 해도 한식 명절이 지금보다 인기가 높았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괄호 속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추가한 부분이다.

"단오는 (한식보다) 더욱 성행하여 농업 지역뿐만이 아니라 읍치 지역과 장시에서 활성화되었고, 자신들의 이익에 결부시켜 이를 공적인 것으로 확산시키려 한 상인들의 재정적 후원이 있었으며, 이 결과 이북지역·도시지역 등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까지 최대의 명절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양력설 정착은 실패했는데... 살아남은 추석
 

대구 동구 숙천유치원에서 열린 '추석맞이 전통체험 한마당'에서 원생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랬던 시절이 지나가고 추석이 설날과 함께 최대 명절로 인식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20세기 중후반의 현상이다.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추석이 그 이전에도 주요 명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권력의 공휴일 정책과도 연관이 깊다는 지적들이 있다.

일제 지배가 들어선 뒤 일본 명절이 법정 명절이 됐다. 위의 1921년 <동아일보> 기사를 쓴 기자가 명절이 평일에 있는 것을 걱정한 것은 그날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추석 연휴가 며칠인가를 신경 쓰지만 그 시절 한국인들은 평일이 아니기만을 바랬다. 평일에는 근무로 인해 성묘를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 패망으로 그런 시절이 가고 공휴일 체계를 새로 수립하게 되면서, 추석이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됐다는 학술적 의견들이 있다. 임재해 교수의 1993년 논문은 다소 과장된 표현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지러져가던 전통 세시풍속들 가운데 오직 설과 추석만이 전통 명절로 다시 복권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순전히 정부의 공휴일 정책 덕분이다."

국가가 추석을 공휴일로 지정했기 때문에 최대 명절이 된 측면도 물론 없지 않지만,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기 힘들다. 일제강점 이후로 양력설을 정착시키려는 국가권력의 노력이 번번이 실패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명절만큼은 국가가 시키는 대로가 아닌 자신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쇠곤 했다. 국가가 추석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추석에 대한 대중의 애착이 20세기 중반 이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추석이 최대 명절이 된 이유를 이 명절이 갖는 가족 축제의 측면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한 대답은 아니다. 핵가족화 현상이 나타난 지 오래됐음은 물론이고 가족 해체 현상이 심화되는 속에서도 추석이 계속 각광을 받는 이유까지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농업시대 축제인 추석은 지금의 산업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음력 8월 가을걷이로 인해 이달에 농가 소득이 증대됐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오늘날에는 연말정산 시즌에 노동자의 통장 잔고가 비교적 많아진다.

그런데도 추석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매료시키고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4차 산업 시대의 한국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 아직 학술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독특한 매력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확언할 수 없으므로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마력' 정도로 언급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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