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좋아져 사전설명회도 들을 수 있다고?

호남고속철도 건설 사전사업 설명회가 있던 날

등록 2007.06.15 20:30수정 2007.06.16 11:5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6월 15일 오후 2시 부터, 공주문예회관 소강당에서 호남 고속철도 건설 사전 사업 설명회가 있었다. ⓒ 송성영

6월 15일 오후 2시 충남 공주문예회관 소강당에서 호남고속철도 사전사업 설명회가 있던 날, 노인들이 대부분 참석했다. 우리 동네에서 온 사람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전직 이장님과 현직 이장님이 보였다.

설명회를 시작하기 전 내 앞뒤 옆자리에 있던 노인들에게 호남고속철도가 어느 쪽으로 지나가는지를 물었다.

"모르겠는데? 알면 뭐 하러 왔겠슈?"
"어느 쪽으로 정확하게 지나가는 것은 모르쥬?"
"그건 비밀인데 아무에게나 얘기하면 안 되지…."


여기저기서 주민들의 푸념 섞인 말들이 오고 갔다.

"보상받을 것 생각하고 조만간 술 한 잔 허여."
"여기 땅 사놓은 사람들만 모인 겨."


"사전에 설명회까지 들을 수 있으니 세상이 좋아졌다"

설명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이 자리를 빛내주시기 위해 공주 이준원 시장이 오셨다"는 말과 함께 이준원 공주시장이 단상에 섰다.

이 시장은 "예전에는 안 그랬다. 예전 같으면 국가에서 그냥 알아서 했다. 이런 자리 없었다. 사전에 설명회까지 들을 수 있으니 세상이 좋아졌다"며 운을 뗐다.

맞는 말이지만 내 속이 뒤틀려 있어서 그런지 듣기에 거북했다. 사전 설명회를 들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자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날 공주시장은 계룡산 국립공원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공주에 역을 세우게 했다며, 공주가 더 이상 철도 없는 오지마을이 아님을 강조하고 고속철도가 건설되면 서울과 공주를 1시간 이내에 오고 갈 수 있어 그 파급 효과가 클 것임을 말했다. 개발로 피해를 보게 될 소작농들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축사에 가까운 시장의 연설이 끝나고 한국철도공사 이사장 대신 나왔다는 이명희 부장이 '호남고속철도 기본계획' 설명회를 시작했다. 설명회는 고속철도보다는 느렸지만 휘갈겨 쓰는데 일가견이 있는 내가 받아쓰기에 충분치 않을 만큼 빨랐다.

대충 적어 온 것을 줄줄이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06년 11월 30일 기본 계획 착수. 서울에서 목포까지 106분. 사업비 10조5417억원, 주민 이해 당사자 의견수렴 07년 07월 이후, 08년 11월∼09년 11월까지 설계 시행. 09년 말 공사 착공. 공주노선 20.24킬로미터. 터널 약 67%, 토공노선 17%, 교량 15%(너무 빨리 진행(말)해서 소수점은 적지 못했다) 계획노선 마암리-봉명리-향지리. …

호남고속철도는 마암리 쪽에서 터널을 뚫고 들어와 우리 마을 봉명리 앞에서 교각을 타고 23번 국도를 건넌다. 다시 터널을 뚫고 바로 우리 집 뒤편쪽으로 빠져나와 거기서 다시 교각(혹은 토공노선, 정확히 확인할 시간이 없었음)을 지나 또다시 터널을 뚫고 향지리 쪽으로 향한다.

지도상으로 보면 분명 우리 집 뒤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최 측에서 준비한 화면으로는 정확히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보 공개할 수 없는 설명회, 도대체 왜 했나?

주민들의 협조사항을 듣고 질문 시간이 돌아왔다. 내 질문과 주최 측의 답변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너무 빨리 설명해서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설명회 책자를 받아 볼 수 없나?
"공개할 수 없다."

- 그렇다면 이 설명회가 왜 필요한가?
"주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 그럼 주민들이 노선이 뒤로 지나는지 머리 위로 지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정확한 노선은 밝힐 수 없다. 공식적으로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관계기관에만 공개하고 있다. 투기꾼들과 같은 불순세력들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미 공개된 것이 아닌가? 얼마 전 환경영향 조사원을 통해 지도를 봤다. 우리 집 뒤, 50미터께로 지나가더라.
"그것은 그냥 기본계획서다."

(나는 그때 추가로 질문하지 못했다. 기본계획서는 뭐고, 공개하지 않는 계획서는 뭔가를. 또 관계기관에 공개했다면 이미 공개한 것이 아니겠는가를.)

- 그럼 그 계획서가 바뀔 수 있나?
"환경평가가 나와 봐야만 안다."

- 그럼 환경평가서 결과에 따라 기본계획서가 수정될 수 있나?
"그것은 그때 가야 알 수 있다."

(질문 도중에 어느 쯤에서인가 답변자는 덧붙였다) "천성산 지율스님 때문에 1년 동안 고생이 많았다. 그 전철 밟지 않기 위해 사전에 환경연구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500미터 내외로 환경 조사하고 있다."

지율스님 전철 밟지 않기 위해 환경연구조사 시행하고 있다고?

답변자의 말이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 같은 사람이 나올까 봐 계획서를 사전에 공개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내가 질문공세를 퍼붓자 중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시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참 세상 좋아졌다. 세상이 좋아져서 사전 설명회도 한다. 이제는 주민 설명회를 공식화하고 있다"며 이준원 공주시장이 한 말을 인용해 덧붙였다. 사전설명회도 가질 수 있는 이렇게 좋은 세상에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있느냐는 투로 들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 철도가 정확히 어느 지점으로 지나가는지를 언제쯤 알 수 있나?
"7월 말쯤에 다시 주민 설명회를 할 것이다(설명회가 끝나고 물었을 때는 올 연말쯤이라 했다)."

- 그때 가면 어디로 지나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나? 개인에게 통보할 수 있나?
"개인보다는 관공서에 보낼 것이다. 관공서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내 질문이 길어지자 방청석에서 불만스런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내가 청중들에게 말했다.

"내가 자꾸만 질문하는 것은 정작 알아야 할 당사자들은 모르고 땅 투기꾼들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개발이 이뤄지면 특히 가난한 소작농들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소작농들이 얼마나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땅 있는 사람들이야 보상금만 챙기면 그만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땅 한 평 없는 소작농들은 대책이 없다. 갈 곳이 없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래서 좀 더 빨리 그 피해 사항을 알아야 이사 가든지 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의 문답은 오후 3시 15분쯤에 끝났다.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노인들이 대부분이라서인지 질문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공주역이 세워질 자리에 사는 한 주민이 보상 문제에 대해 질문했고, 터널과 교각 등이 어떻게 어떤 구간을 지나가는지에 대해 주민들을 대신해 시청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질문했다(구간 설명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9년쯤에 보상이 이뤄지고, 2009년 말에 공사가 착공된다는 말을 듣고 주민들은 이미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대부분 자리를 뜰 무렵 마지막으로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를 사육하는데 소음 문제 때문에 암소가 낙태를 하게 된다며 보상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고속철도 관계자들에게 "적당히 형식적인 설명회를 하지 말라, 가장 피해가 많을 가난한 소작농들을 생각해 달라"는 부질없는 당부를 해놓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고속철도, 왜 뚫는 것일까? 과연 살만한 세상 만들자는 것인가?

우리나라에 도로가 없어 고속철도를 뚫고 있을까? 고속철도가 뚫리면 그걸 누가 타겠는가? 그걸 즐겨 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땅 한 평 없이 집 잃고 터전 잃은 소작농들이 즐길 수 있을까?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 호남고속철도로 인해 경제 성장의 효과는 있을 것이다. 좀 더 빠른 열차를 타고, 좀 더 급히 만나고, 좀 더 급히 헤어지고,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좀 더 좋은 가전제품이며 자동차를 구하고, 좀 더 많은 것을 먹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경제 성장을 이뤄 아이들을 학원 한두 군데 더 보내고 좀 더 좋은 대학 보내려 경쟁시킬 것이다. 결국은 그 아이를 경제성장의 일꾼으로 만들어 자연환경을 적당히 해쳐가며 좀 더 빠르고 날렵한 도로를 뚫게 될 것이다. 이게 과연 살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인가?

누군가 내게 도로가 뚫리게 되는 제 집과 자연환경만을 따진다고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참으로 무서운 얘기였다. 개인을 무시한 집단이기주의에 빠져있다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개발 앞에 가난한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는 누군가 어떤 일을 벌여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시설이 들어설 때 땅값이 오르면 환영하고, 땅값 떨어지면 거부하는 이런 것이야말로 이기주의인 것이다. 고속철도를 건설해 뭇 생명을 죽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내몰아가며 이득을 보자는 그런 것이야말로 이기주의이다.

가진 것 없는 소작농은 무참히 망가지고 만다

가진 것이 없는 소작농들은 이익을 볼 것도, 손해 볼 것도 없다. 손해의 차원을 넘어서 무참히 망가지고 만다. 인간에 의해 짓밟히는 대자연의 힘없는 뭇 생명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나 역시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자동차를 이용해 밭에서 나는 채소를 싣고 배달 다닌다. 있던 도로를 다 까뭉개고 원시인처럼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더 이상 까뭉개지 말자는 것이다. 더 이상 약자를 해치거나 죽이지 말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도로 천지다. 그럼에도 우리 마을 앞에는 정작 사람이 다닐만한 도로가 없다. 도로 내는 일이 정말로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빠른 도로보다는 느린 도로, 진정 사람을 위한 도로, 자전거 도로가 더 절실하다고 본다.

도로를 뚫는 것은 분명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얘기다.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많이 먹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개발에 터전을 잃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뒤돌아 보며 좀 더 여유 있게 적게 먹고 뱃속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래야 또한 소화도 잘 될 것이 아닌가.

좀 더 급하게 많이 먹고자 하면 체하게 마련이다. 온갖 자동차 도로며 고속철도가 그렇다. 개발지상주의야말로 다 같이 급하게 많이 먹고 다 같이 배앓이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서 나오는 대화 내용 중 실제 말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내용만 요약해서 올렸음을 밝혀둔다.

덧붙이는 글 기사에서 나오는 대화 내용 중 실제 말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내용만 요약해서 올렸음을 밝혀둔다.
#호남고속철 #공주시 #개발지상주의 #이준원 시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나의 60대에는 그 무엇보다 이걸 원한다
  4. 4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 어머어마하구나
  5. 5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