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6] 만주군 장교 시절

등록 2004.08.17 23:07수정 2004.08.2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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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근무했던 만주군 보병8단의 상급부대인 제5군관구 부대배치도. 지도에서 ①지역은 만주군 주둔지였고, ②지역은 팔로군 주둔지였다. 5군관구는 승덕(承德)에, 그 예하부대인 보병8단은 반벽산(노란색 원 표시)에 주둔했었다. 박정희는 일행은 일제가 패망하자 반벽산에서 흥륭(興隆)-밀운(密雲)을 거쳐 북경(北京)으로 나왔다. ⓒ <만주국군>


1946년 5월 초순. 중국 천진항에서 미군 상륙용 함정인 LST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동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승무원 등 500여명을 태운 이 배에는 일제의 패망으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인들이 대거 타고 있었다. 이른바 '귀국선'이었다. 전투용 군함이기에 몹시 배가 흔들려 다들 멀미를 심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배는 '노아의 방주'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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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함께 '귀국선'을 탔던 대산 신용호의 '평전' 표지

이날 '귀국선' 갑판 위에서 한 젊은이가 무거운 시선으로 중국땅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으로 패잔병 신세가 돼 귀국하는 '박정희 중위'였다.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군인이 돼 당당해 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1940년초 만주행에 오른 그로선 6년여만의 귀향이었다.

귀국선 난간에 기대 선 '패잔병 박정희'

박정희와 동갑내기(1917년생)로 나중에 교보생명을 창업한 보험인 신용호(2003년 작고)씨도 이들 귀환 인파속에 끼어 있었다. 젊은 시절 만주에서 사업을 하던 그도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길이었다. 금년 4월에 출간된 그의 평전 <대산 신용호-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고>에서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톈진에서 부산까지 오는 15일간 추운 겨울바다와 선실도 없는 갑판 위에서 태반이 굶은 동포들은 혹심한 멀미에도 토해낼 것이 없었다. 대산(신용호)은 신음이나 울부짖을 힘도 없는 이 귀국선 갑판 위에서 계급장을 뗀 군복차림에 다소 길어보이는 군도(軍刀)를 허리에 차고 있는 한 사나이에게 눈길이 쏠렸다.

대산은 하루종일 같은 장소에서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은 채 상념에 잠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그는 박아무개로 육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고 대답했다.(인상적인 이 사나이가 먼 훗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해 예과 2년과 일본 육사 본과를 마치고 1944년 7월 1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렇다면 이후 해방 때까지 그는 만주에서 무엇을 했으며, 또 이 기간 그의 활동이 과연 친일행위로 규정될만한 것인가. 그가 임관된지 올해로 60년이 된다. 그의 만주군 장교시절을 추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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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군관학교 예과 졸업(1942년 봄) 당시의 고경인씨(왼쪽). 오른쪽은 1997년 모습.

지난 97년 여름 필자는 세계적 도박의 도시 미국의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행이 한 사람 있었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인 방원철(육군대령 예편, 초대 육군 전사감 역임, 99년 작고)씨가 그였다.

우리가 라스베가스로 향한 데는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였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자 해방 때까지 박정희와 같은 부대 옆자리에서 근무했던 중국인 고경인(97년 당시 75세)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23세 연하의 두 번째 부인과 자그마한 모텔을 경영하며 지내던 고씨는 우리의 방문에 상당히 고무된 듯 했다. 멀리 이국에 와서 숨어지내듯 살고있는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던 터였다. 특히 필자의 동행은 그와는 반세기 전의 만주 땅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이자 군관학교 선배이자, 벌써 고희를 후딱 넘긴 그들로선 몇 안남은 친구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만난 중국인 동기생

총 4박5일간을 머물면서 필자는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일상 대화 속에서 그의 옛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는 기억력이 우수했고, 특히 동행자가 그와 말벗이 되면서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1940년대 만주땅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참고로 동행인 고 방원철씨 역시 만주군 보병 8단에서 박정희, 고씨 등과 함께 근무했었다.

먼저 고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참고로 고씨는 본과는 신경(현 장춘) 소재 군수학교에서 마쳤다.

"(군수학교) 졸업 후 4월중으로 부대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받고 며칠 휴가를 마치고 4월 20일경 만주군 보병8단에 도착했다. 거기서 견습사관을 3개월을 마쳤는데 도착해보니 박정희는 이미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나는 경리장교여서 반벽산에 위치한 단 본부에 근무했다. 같은 부대였지만 처음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그가 단 본부로 오면서 그 다음부터는 더러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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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 8단시절 박정희 중위(앞줄).

보병8단은 열하성 남부 승덕(承德)에 본부를 둔 제5군관구의 예하부대로서 반벽산(半壁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임무는 준화(遵化) 인근의 공산 11, 12단(團) 등 팔로군 토벌이었다.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 상교(대령에 해당), 부연대장 밑에 3개 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교는 부단장 등 일본인이 8명, 조선인이 4명, 나머지는 전부 중국인이었다. 병사들은 전부 중국인들로 모두 안동(현 단동) 출신이었다. 박정희는 이곳에서 단장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단장 휘하 부관처에는 갑, 을 두 종류의 부관이 있었는데 갑종은 시모노(下野) 대위가 부관장을 겸하고 있었다. 을종부관은 총 3명으로, 선임 반(潘) 중위는 행정담당, 이(李) 중위는 인사담당, 그리고 박정희 소위는 갓 진급한 이 중위의 업무를 물려받아 예하부대에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단기(團旗)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한편 당시 8단에는 그를 포함, 조선인 장교가 4명이 근무했다. 박정희보다 1년 선배인 신경 1기 출신의 방원철 중위와 그의 동기생 이주일 중위, 그리고 봉천 5기 출신의 신현준 상위(대위)가 그들이었다. 방 중위는 8단 보병중대 선임장교로 당천(唐泉)에 주둔하고 있었고, 신 상위는 44년 8월 1일부로 간도특설대에서 전속발령을 받고 8월 26일 단 본부에 도착했다.

을종 부관으로 작전명령 하달, 단기 관리

그렇다면 일각에서 주장하는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은 사실인가. 먼저 8단 본부에서 그와 가장 가까이서 근무했던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대토벌 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 2개 대대가 참가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와 같이 8단에 근무했던 조선인 선배들 역시 그가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신현준 상위, 방원철 중위의 증언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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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준씨.(97년 촬영) ⓒ 정운현

"내가 8단으로 부임해 가보니 박정희는 이미 나보다 한 달 전에 단장 부관으로 와 있었다. 그가 맡은 것은 중요한 직책인 것 같았다. 박은 부관이니까 일선부대에 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나는 중대장이니까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투를 했다. 8단 시절 나는 일선 지휘관이어서 그를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여러 번 만났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야무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신현준씨 증언)

"나는 소규모 전투를 포함, 10여 차례 (팔로군 토벌)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대 을종부관으로 있어서 전투경험이 전연 없다. 나는 (지휘관이다보니) 중국인 사병들과 어울리면서 중국말도 배웠으나 박정희는 그럴 기회가 없어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8단 시절 박정희는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는 비교적 편히 지냈다."(방원철씨 증언)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 8단에서 단장 부관 등으로 1년여 근무한 사실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다만 그가 독립군 토벌에 적극 나섰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가 부관 부임 직전 일선 소대장으로 몇 개월 근무하면서 토벌작전에 참가한 사실은 분명히 확인된 셈이다.

해방후 광복군에 편입... '독립군 토벌설'은 과장

한편 일본이 패망하자 8단내의 조선인 장교들은 현지 중국인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다. 박정희 일행은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밀운에서 1개월 정도 머무르다 추석이 지난 후 마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신현준, 이주일 등과 함께 뒤늦게 '해방후 광복군'에 편입됐다. 고씨는 밀운에서 박정희와 헤어진 정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8월 9일 소련군 참전으로 우리부대는 14일 저녁부터 5군관구 사령부가 있는 승덕을 향해 이동중이었는데 16일 흥륭 도착 직전 일본의 무조건 항복소식을 들었다. 그날 오후 박정희를 만났는데 '이제 어떡하면 좋겠느냐'며 낙담한 모양이더라. 그래서 내가 '우리하고 같이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위로해 주었다.

얼마 뒤 밀운(密雲)의 한 여관에서 박정희 일행 3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한 달 이상 머물다 10월 중순경 북경으로 떠났다. 박정희는 헤어지면서 경상도 선산 고향집 주소를 써주면서 한국이 독립하면 서로 왕래를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수중에 있던 돈 385원을 건넸는데 그는 자기가 신고 있던 장교용 붉은 장화를 대신 벗어주더라.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면 건국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


그의 만주시절 행적을 두고 친일 여부를 논할 경우 구체적인 행위도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겠지만 그가 어디에 소속돼 무슨 일을 했는지도 중요한 요소이다. 즉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밀정의 경우 그가 독립운동 진영에 구체적으로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밀정으로 활동한 그 자체가 이미 반민족 행위인 셈이다. 일제하 군인의 경우 계급으로 친일을 가늠하려는 것 역시 온당한 판단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해방 전에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
'비밀 광복군 박정희' 사실인가

▲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그와 같이 8단에서 군무했던 고 방원철씨. 왼쪽은 중위 시절, 오른쪽은 97년 모습이다.
ⓒ정운현
박정희가 정보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은 왜곡, 조작된 사실이다. 동시에 그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사실무근이다.

이같은 주장은 그가 집권한 1960년대 이후부터 제기돼 오다가 1984년 장창국(전 합참의장, 작고)씨가 <육사졸업생>이란 책에서 '광복군 비밀요원설'을 주장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장씨는 책에서 "신태양악극단이 '철석부대'로 위문갔을 때 이 악극단의 잡역부로 위장한 비밀광복군 이용기가 박정희와 접촉, 그를 비밀광복군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부대장의 이름을 따 일명 '철석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로 박정희는 이 부대에 간 적이 없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육군 준장 예편, 작고)씨, 송석하(육군 소장 예편, 작고)씨 등은 생전에 필자에게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신태양 악극단' 단장을 지낸 작곡가 손목인(작고)씨는 생전에 "더러 군대 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는 들어본 일이 없고, 이용기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필자에게 증언했다. 또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씨와 영화배우 황해씨 등도 지난 97년 필자에게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결국 '비밀광복군 이용기'는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지난 86년 <월간조선>에 실린 한 기사에는 박정희가 보병8단에 같이 근무했던 신현준 상위, 이주일 중위 등과 함께 비밀광복군 조직에 착수했으며, 1945년 5월부터는 사병들을 광복군 요원으로 훈련시켰다고 돼 있다.

그러나 당사자격인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역임)씨는 97년 필자에게 "일제가 패망하여 베이징으로 갈 때까지도 우리는 광복군의 존재를 몰랐다. 보병8단 시절 광복군과 비밀리에 관련을 맺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고 증언했다.

8단에 같이 근무했던 방원철(육군대령 예편, 작고)씨는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온 적이 없었다"며 "박정희는 8단 부임 이후 반벽산(단 본부 소재지)을 떠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필자에게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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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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