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혐의로 무기징역... 재심서 '구사일생'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1] 1949년 군사재판

등록 2004.08.08 17:11수정 2004.08.0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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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이 정치권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두고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 정체성 관련 특별 대책기구까지 구성했다.

여권에 대한 박 대표의 이같은 정체성 문제 제기는 최근 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경력과 창군 초기 그의 좌익전력은 현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문건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좌익행적을 '실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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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역대 선거 가운데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어느 선거보다도 국민적 관심이 높았고 열기도 뜨거웠다. 4.19로 탄생한 민주당 정부를 5.16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박정희 후보가 군복을 벗고 여당후보로 나왔다. 이에 맞서는 야당후보는 5.16으로 인해 대통령 자리를 내놓게 된 윤보선 후보였다.

<동아일보> '호외' 제작 뒷 얘기

5대 대선 당시 일간지들은 연일 호외를 발행하며 선거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것은 윤보선 후보 진영의 폭로를 단독보도한 10월 13일자 <동아일보>의 호외.

<동아> 호외는 당시 김성열(동아일보 사장 역임) 정경부장이 주도하고 김아무개 기자가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천관우 편집국장은 반대의사를 표명, 보도를 놓고 사내에서 적잖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아>는 13일자 호외의 경우 무려 200만장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방의 경우 헬기로 수송하였으며, 호남지방에 집중 살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둔 1963년 10월 13일. 당시 야당지로 명성을 날리던 <동아일보>의 호외 하나가 서울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거리에서 타블로이드판 크기의 호외를 주워든 시민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군대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호외 양면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당시 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측이 증거자료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2월 18일자 서울신문의 기사였고, 또 하나는 자체적으로 입수한 '문건'이었다. 두 신문의 내용은 박 후보가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실을 소개한 짤막한 기사였다.

민정당의 폭로로 공화당은 선거 코앞에서 위기를 맞게 됐다. 서인석 공화당 대변인은 즉각 반박성명을 통해 "조작폭로전술로 악랄한 인신공격"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또 "박정희 총재는 김창룡 장군에 의해 관제 공산당원으로 몰린 사실이 있으나 그것은 여순반란사건과 관련시켰던 것은 아니었다"며 "그 후 자유민주주의자임이 밝혀져 군의 요직을 역임했고, 반공전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고 해명했다.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서 무기징역 언도받아

그러나 서 대변인의 '해명'은 민정당의 폭로를 잠재우기는커녕 도리어 박 후보가 한 때 공산당원이었고 또 그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최근 정치권에서 한창인 '정체성' 논란의 원조격인, 이른바 5대 대선 당시의 '사상논쟁'은 이로부터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1949년 2월 8일 구 통위부(미군정 당시 국방부에 해당하는 부서로, 현위치는 서울 충무로 코리아헤럴드 뒷편 인근임) 건물 장교식당에 임시로 군사법정이 마련됐다. 재판장은 김완룡(예비역 소장, 육군 법무감) 중령이 맡았고, 심판관으로 김대현 중령 등 3인, 검찰관 신 모(6.25 때 전사) 중위, 관선변호인으로 최영희(6.25 때 전사) 중위 등이 참석하였다. 또 피의자들의 조서 작성을 맡았던 방첩대 소속 이한진 대위가 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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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제1중대장 시절의 박정희 대위

바로 이 군사법정에 당시 육군본부 소속 박정희 소령이 피고인 신분으로 섰다. '문건'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날 이발을 새로 하고 머릿기름을 많이 발라서 유난히 번득였다. 복장은 당시로선 예복인 진한 구레바인 정복차림이었다.

그는 재판장의 신문에 순순히 피의사실을 자백하고 또 시인했다. 이날 법정에서 그는 국방경비법 제18조, 33조 위반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 판결로 그는 현역 소령에서 파면됐고, 급료도 몰수당했다.

그와 같이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모 대위 등은 사형 구형에, 사형 언도를 받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또는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이며, 오일균은 일본육사 61기 출신이었다.

그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3공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이주일은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나 무죄를 언도받고 풀려났다. 이주일은 박정희의 권유로 군 입대 전에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또 박정희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한 것으로 '문건'에 나와 있다.

박정희는 집권 후 자신의 군사재판 관련자료를 모두 폐기토록 지시한 바 있다고 한 인사는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공문서 형태로 된 박정희 관련자료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필자는 지난 97년 모 기관에서 박정희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어떤 조치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공문서 하나를 입수할 수 있었다.

'징역 15년'으로 감형 거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재심의 최대 수혜자

1949년 4월 18일자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 소장의 명의로 발령된 이 문건은 숙군 때 군사재판에서 1심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이른바 '지휘관 확인', 즉 재심을 거쳐 형량이 재조정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 가운데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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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재심과 '확인장관' 등의 선처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진은 박정희 등 69명에게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를 명한 육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사본(총5매 짜리). 붉은선 부분이 박정희 관련내용임.

국방부 특명 제5호(1948년 12월 20일부)에 근거해 용산 육군본부에 마련된 이 법정에서는 박정희 등 69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의 죄과는 국방경비법 16조 위반, 즉 '반란기도죄'였다. 이들 중 영관장교는 그를 포함해 소령이 3명, 대개는 위관장교이며, 하사관도 10여 명 포함돼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범죄사실로는 '전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구 경비법 32조 위반, 범죄사실은 '군 병력 제공죄'로 적시돼 있다.

명령서에 따르면, 전체 69명 가운데 정진 등 4명은 무죄 판정(한동석은 징역형에 한하여 집행정지)을 받았으나 나머지 66명은 유죄 판정을 받았다. 대상자 대다수는 여기서 감형조치를 받았다. 즉 징역 15년은 10년으로, 징역 10년은 5년으로, 또 징역 5년은 징역 1년으로 각각 감형되거나 혹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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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재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박정희를 '형집행정지'로 풀어준 이응준 육군본부 총참모장(육군 소장)

박정희의 경우 (1심)'판결'에서 '파면, 급료몰수, 징역 무기'를 선고받았으나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고, 그리고 다시 '확인장관의 조치'에서 '확인'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들중 유일하게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재심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당시 '확인장관'은 당시 육군의 최고 책임자인 이응준 총참모장으로, 그는 일제하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다.

그와 함께 '재심'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신경군관교 후배인 황택림(5기생, 본과는 일본육사 59기 졸업) 대위도 포함돼 있다. 황은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으며, 다시 확인장관 조치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이후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배려로 육본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6.25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자로 현역에 복귀했다. 그는 이로써 '좌익 악령'을 공식적으로는 떨치게 됐다.

"최남근 오일균 사형집행 때 '대한민국 만세' 불러"
[인터뷰] 박정희 등 재판서 재판장 맡은 김완룡씨

숙군 당시 처벌받은 사람 가운데 영관급은 몇 안됐다. 박정희, 이상진,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 등이 소령이었고 대부분은 위관급 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처형된 사람 가운데 중령은 최남근과 김종석 두 사람이었다. 최남근(崔楠根)은 봉천군관학교 6기생 출신이며, 김종석(金鍾碩)은 일본육사 56기로 박정희 1년 선배였다.

둘 가운데 최남근은 유독 일화가 많다. 춘천 8연대장 시절 그의 밑에서 경리장교를 지낸 박경원(육군 중장 예편, 내무.체신장관 역임)씨는 "통솔력이 우수해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며 "금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가 좌익혐의로 잡혀온 것을 알고 찾아가 만났더니 "하우스만이 나를 빨갱이로 몰아서..."라며 말끝을 흐리더라는 것이다.

그의 재판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예비역 육군 소장, 육군 법무감 출신)씨는 재판 당시 상황을 아직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97년 필자와 만나 그의 재판을 둘러싼 비화 등을 자세히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증언 한 토막을 들어보자.

"재판장석에 앉아서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다른 사람들 몰래 나를 향해 오른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사형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 주모자는 극형에 처하라는 주문을 받고 재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최와 친했는데 더 이상 재판을 할 수 없어 재판을 거부했었죠."

당시 군사재판은 사실심리 후 변론을 마치고 곧바로 그 자리에서 언도를 내리는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최에 대해서는 언도를 미루었다. 당시로선 '특례'였다. 그리고 그 길로 김씨는 이응준 총참모장을 찾아가 "최남근을 무기징역에 처하자"고 건의하자 이 총참모장은 "재판장이 알아서 해야지"라며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다시 채병덕 장군(당시 3군 참모총장)을 찾아가서 상의를 했더니 채 장군이 "이게 무슨 소리냐"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이범석 국방장관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이 장관은 "채 장군 말이 맞다. 다른 사람은 다 사형시키는데 그 사람만 왜 빼느냐"고 해서 다음날 서면으로 '최남근 사형'을 통지한 후 얼마 뒤 (보직)사표를 내고 청주 병사부사령관으로 내려갔다.

김씨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숙군 재판 당시 주모자급은 위(상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재판관이 재판에서 완전히 독립한 상태는 아니었다"며 "최남근과 오일균은 사형집행 때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 진짜 빨갱이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의 사형집행을 맡은 사람은 헌병장교 문용채였다. 문용채는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생으로 최남근의 1년 선배였으며, 만주군 복무시절 평촌헌병대장을 지냈다. / 정운현 기자

(* 다음은 박정희가 언제, 어떤 경로로 좌익에 가담하게 됐는지, 또 그는 진짜 좌익분자였는지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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