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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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날
2004년 3월 12일은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날이다. 그날 나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과 함께 미국 워싱턴D.C. 근교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암살 배후 문건을 찾다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미국에 머무는 40여 일 동안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은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영어가 서툰 우리의 불편함을 보살펴줬다.
그날 아침도 그들은 우리 숙소에까지 와서 공항까지 배웅했는데 평소와 달리 눈자위가 벌겋고 눈물을 글썽였다. 간밤에 고국에서 날아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데 대한 울분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그곳 동부의 동포들이 노무현 탄핵소추 반대 시위를 연다고 했다. 우리는 비행기 표 예약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워싱턴을 떠나 5시간(시차로 3시간) 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닿았다. 그곳까지 마중 나온 LA동포들도 한결같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에 대한 울분을 토했다. 다음날 그곳 LA동포들이 탄핵 저지 대책 간담회를 베푼 바, 그 회의에 참석했다.
왜 고국을 떠나 미주에 있는 동포들조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비분강개를 금치 못했을까. 나는 그 대답을 한 재미 언론인(진천규 미주 한국일보 기자)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이었다.
"역사의 후퇴로 반통일 세력들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두터운 기득권층의 완강한 반대로 마침내 대통령직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자 국내외 진보 및 뜻있는 젊은 세대들이 그를 보호하고자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