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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로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국보법 폐지에 대한 기고문을 받고 있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저자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박도씨의 글을 싣는다 ... 편집자주

▲ 젊은 날의 아버지
아버지가 장남인 나에게 남긴 유산은 두 점이 있다. 그 하나는 국가보안법 위반의 공소장이요, 다른 하나는 묵화 한 점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갈무리하고 있는 공소장을 보시면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신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그 혹독한 일제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도 2년의 형기밖에 치르지 않았는데 나는 그보다 더 형기를 치렀다. 깊이 잘 갈무리해 두라"고 하셨다. 묵화는 출소 후 말문을 닫고 그리신 '달마상'이다.

1981년 2월 6일은 설날 다음날이었다. 그날 아침, 막 출근하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산에 계시는 어머니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에 아버지가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온 너댓 사람의 청년들에게 연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어디로 모시고 가느냐고 물어도 그런 것 알 필요도 없다고 윽박지르면서 아버지 방의 책까지 몽땅 싣고 갔다는 것이다.

순간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오뉴월에 함박눈을 맞는 기분이었다. 곁에서 전화내용을 들은 아내도 납덩이처럼 굳었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침 출근시간은 늘 바쁘기에 곧 자세를 가다듬고 여느 때처럼 출근했다.

학교에 가면서 이 사실을 절대로 동료에게나 상사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섰고, 그 때부터 아무 일도 없는 듯 표정관리와 처신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풀려나실 때까지, 바른 세상이 되기까지 기울어진 집안에 버팀목이 되고 남은 가족을 돌봐야한다는 비장한 생각뿐이었다.

5공 청문회 때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을 했던 장세동씨가 명언을 한 바, "지금의 상황으로 그 때를 말하지 말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정곡을 꼭 찌르는 말이다.

정말 그때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 공소장 표지
ⓒ 박도
정말 그때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불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폭력을 휘둘렀다. 부패한 사회를 정화한다고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각 기관마다 부패 무능자를 보고케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부패한 자가 전혀 부패하지 않는 엉뚱한 이들을 보고하여 직장에서 쫓아내는 현상이 일어났다. 학교사회에서도 북한 공산정권이 싫어서 월남한 분까지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몰아내자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탄원서를 썼다.

그러자 직장 상사와 상급기관(장학사)에서 탄원서 낸 사람들에게 온갖 협박으로 취소케 하고 시말서를 받아가는 그런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 사상문제로 끌려간 사람의 자식이 교단에 서 있다면 가만히 두겠는가.

그날 퇴근길에 검찰 고위직에 있는 분에게 은밀히 아버지의 소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부산 대공분실에 연행돼 있다고 하면서 사상문제에는 당신도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미안해 했다.

틈틈이 평소 아버지가 잘 알고 지냈던 변호사에게도 국회의원에게도 힘이 될까 연락을 했지만 그 분들도 이 문제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딱 잘랐다.

해방 후 이 땅에서는 사상문제라면 그 무엇보다 더 외면했다. 더 이상 발버둥쳐봐야 더 깊은 골에 빠진다는 걸 알아차린 나는 소리 소문 없이 지내는 게 최선의 보신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몇 달을 불법감금 끝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평일에 열리기에 학교를 결근하면서 부산까지 내려갈 수가 없었다. 주말에 내려가서 변호사를 만나면 그렇게 불친절할 수가 없었다. 자기나 되니까 적선하는 셈치고 이 사건을 맡았다는 식이었다.

나는 보안사범은 당사자 못지않게 밖에 있는 가족들도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에야 담담히 지난날을 돌이킬 수 있지만 그때는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이었다. 아버지가 2년 4개월 교도소에 수감생활하는 동안 세 건의 대사가 있었다. 두 건은 두 동생의 결혼이었고, 다른 한 건은 할머니의 별세였다.

팔순 할머니는 끝내 외아들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셨다. 두 동생의 결혼식 때는 아주 가까운 친척만 참석해서 아버지의 부재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할머니 장례만은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문객들에게 이렇게 둘러댔다.

“저희 선산(先山)이 경북 선산 도개에 있기에 아버지는 거기서 묏자리를 보고, 묘지를 만들고 계신다”고 능청스런 거짓말로 아버지가 빈소를 지키지 못한 사연을 둘러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처사가 참 바보스럽고 꼭 그렇게 위장을 하면서 살아야했든가 하는 생각에, 나의 불효막심과 소심함, 비겁함을 원망스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 재판정에는 한 번도 참석치 못했다. 아버지가 재판정을 출정할 때 방청석에서 아들을 찾지 않았겠는가. 그때마다 아들의 얼굴이 안 보일 때 얼마나 낙담했을까?

그 뿐 아니다. 출소 후에도 아버지의 뒤는 꼬리표가 달려서 늘 형사들이 뒤쫓았다. 그게 싫어서 내가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듯하여 나는 아버지에게 싫은 말씀도 드렸다. 나는 내 생명을 주신 아버지를 홀대하였다는 죄의식은 내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업으로 저 세상에 가지고 가야할 것이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아버지의 공소장을 다시 읽어보지만, 공소사실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에 이미 다 소개된 내용들이다.

아버지는 고향이 구미라서 박정희 대통령 전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여순사건 때 동지를 배반하고 살아난 인물이라는 말을 했고, 당시 먹고살기도 힘든 세상에 민방위교육은 없었으면 좋겠다든지, 미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든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녀 학비 부담이 없는데 여기서는 돈 없으면 자식 공부도 못 시킨다는 등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마지막 이유에 가장 가슴이 아팠다. 그 때 아버지는 5남매를 둔 가장으로 한창 자식 교육비에 허리가 휠 때였다. 그 때 아버지는 부산 아미동 산동네에서 꼬리표를 만들고 헌 신문지로 과수용 배 봉지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 수입이 몇 푼이나 되었겠는가.

"세금쟁이가 범보다 더 무섭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우스갯소리로 "세금쟁이보다 자식이 더 무섭다"고 했다.

세금은 없다고 차압해 가라고 배짱을 부릴 수 있지만 자식이 학비 달라고 할 때는 그럴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무거운 멍에를 오로지 당신이 다 짊어지셨던 것이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

아버지의 예화에서 보듯이 보안법은 본래의 목적보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거나 현실의 부조리를 말하는 이에게 족쇄를 채우는 도구로, 부당하게 정권을 탈취한 이들이 반대 세력을 몰아내는데 더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국보법을 아예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국보법이 양심세력에게 재갈을 물렸기에 독립군을 잡던 이가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 활개치고 그 자식들마저 권력을 세습하는 세계 역사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정의와 양심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야말로 민족반역을 해도 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출세하는 나라가 되었다.

부산 우리집에는 헌 신문이나 잡지 등을 늘 고물장사에게 사다보니 별의별 책이 다 들어왔다. 그냥 뜯어서 제품을 만들어 팔았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 텐데, 아버지는 ‘식자우환‘으로 어느 날 헌책더미에서 일어판 <조선관광>이라는 북한 관광안내 책자를 발견하고 몰래 읽으신 후 친구들에게 그 내용 일부를 발설했다.

그 때는 신군부가 막 집권한 직후로 무언가 큰 사건을 엮어 뻥 터트리고자 했다. 반대세력을 잠재우고자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터에 아버지의 이야기가 첩보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 무렵 아버지는 부산 근교 양산에 염소를 치고자 목장용으로 사둔 임야가 값이 올라 그걸 팔아서 대신동에다 집을 마련했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조총련의 자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집까지 샀다는 그럴듯한 소설을 꾸며 그걸 언론에 한 건 터트려서 광주민주화로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고 반대파에게 재갈을 물리게 하려고 했다.

무려 넉 달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나올 것이 없었다. 자식인 내가 잘 알지만 사실 아버지는 공산주의 ‘공’자도 잘 모르는 분이다. 무슨 조직이 있다거나 일본에 친척이 있어서 그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얘기다. 무려 넉 달 동안 사람을 불법으로 가둬놓고 갖은 고문으로 털어도 알맹이는 없고 먼지만 나오자, 그 먼지만으로 국가보안법 제7조 1항 '찬양 고무죄'로 엮어 2년 옥살이를 시켰다.

아버지는 수사기관원에게 끌려간 지 2년 4개월 만에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셨다. 출소 후 반 벙어리로 그림을 그리고 주변의 냉대와 고문 후유증 등으로 고생하시다가 1992년 영면하셨다. 나는 불효막심하게도 임종을 못하였는데 염을 하던 장의사 직원이 “고인의 엉덩이와 등에 시커먼 반점으로 보아 신체적 고통을 많이 받은 자국 같습니다”고 했다.

출소 후 내가 몇 차례 수사과정을 여쭙자, “나를 잠재우지 않고 고문하던 수사관이 지쳐 잠들었을 때 하도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시뻘건 난로를 뒤집어쓰고 싶더라”라는 말씀만 하셨다.

국가보안법 사범은 본인 못지않게 교도소 밖에 있는 가족들이 더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가족 중에 보안사범으로 끌려갔다면 그 순간부터 온 집안은 풍비박산이 된다. 내 집에서도 그 후유증은 오래도록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다른 분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자식이 보안법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자 그 자식을 따라 죽은 부모, 정신이상자가 된 아버지, 약혼자로부터 파혼당한 집안…. 그 사례는 이 짧은 글에서는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나에게 유형의 유산은 문건 두 건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무형의 유산은 많이 남기셨다.

내가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전방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자, “쌀 도둑질 해 먹고 병사들 배 곯리지 말라” “지원해서 월남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교사가 되자, “교사는 학생들을 보고 산다”고 하셨다. 내가 30여 년 교단에서 학생들 앞에 내 동족을 단 한 번도 괴상한 용어로 헐뜯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주신 유언 때문이리라.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산다고 자부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뭔가. 낱말로만 풀이해 보자. ‘자유’ 그것은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아닌가. ‘민주주의’ 그것은 백성이 주권을 가지고 백성의 의사에 따라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게 아닌가. 가장 기본이 되는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없이 무슨 자유민주주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좋은 집에서 밥 걱정 없이 비싼 차 탄다고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다.

▲ 박도씨.
정말 선진국이 되고 싶고 자유민주주의 나라를 만들려면 이제는 야만적인 인권탄압 악법부터 없애야 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더 좋은 제도를 만들고, 밝은 태양 아래서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될 수 있고,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정정당당하게 겨뤄 이길 수 있을 게다. 그제야 비로소 나라의 기반이 튼튼해 지고 나라의 안보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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