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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코너로 몬 노무현, 스타 의원이 되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68)]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④

등록 2020.09.05 19:38수정 2020.09.0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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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후보 시절의 노무현 ⓒ 자료사진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이 노동사건과 시국사건 변론에 몰두했던 1980대 중반은 한국현대사의 가파른 고갯길이었다. 그 시절 노무현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집행위원장으로 부산 시위의 제일선에 섰다. 그때 노무현은 민중가요 중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닿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입문하면서 이 노래의 첫 구절 '사람 사는 세상'을 꿈으로 삼았다.

1988년 초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한테서 영입 제안이 왔다. 아내는 머리를 싸매고 반대했다. 아내는 정치를 몰랐지만 남편이 정치를 하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았다. 노무현은 아내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한 것이 여러 해가 됐다. 출세한 변호사로 친지들에게 해야 할 도리도 많았지만, 그러질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김영삼 총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복잡하게 생각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를 돕는 데 유리할 것이다'고 단순 소박하게 판단했다. 전두환 대통령 왼팔로 통한 허삼수 후보가 출마한 부산 동구를 선택했다.

"허삼수 후보는 반란을 일으킨 정치군인입니다. 국회가 아니라 감옥에 보내야 합니다."

김영삼 총재의 이 한 마디는 선거에 큰 도움이 됐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노무현은 전국의 노사분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몸으로 부딪혔다.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 자료사진

 
5공 비리 특위 청문회

1988년 가을은 국회 청문회의 계절이었다. 5공 비리 특위 청문회와 광주특위 청문회가 있었다. 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청문회가 열렸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노무현은 하루 새 전국적으로 유명인사가 돼 버렸다. 정주영 입에서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줬다"라는 모금의 강제성 시인 발언이 나왔다.


노무현: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정주영: "… (침묵)"


당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 데다가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증인들한테는 고함을 치거나 욕설까지 했던 국회의원도 정주영에게는 "회장님!" 소리를 하면서 예우를 했다. 문을 열어주면서 과잉 친절을 베푸는 의원도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정주영 회장이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다. "시류에 따라 산다"고 말했던 정주영 회장이 마침내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 TV 생중계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오랜 체증이 '뻥' 뚫렸다. 
 

3당 합당 당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이의를 제기하는 노무현 ⓒ 자료사진

  
김영삼과 결별하다

1990년 1월 22일, 여당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야당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3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했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합당결의 대회장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이견 있습니다. 반대토론 합시다."

정당 내부에 민주적 절차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스가 결정하면 나머지는 우르르 따라갔다. 모두가 떠나갔다. 그때 노무현은 정치를 그만두리라 마음먹었다.

3당 합당은 두 가지 충격을 줬다. 하나는 호남이 정치적으로 고립됐고, 영남은 보수 정치세력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지역구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고착화됐다.

둘은 우리 정치가 통째로 기회주의 문화에 빠졌다는 것이다. 철새 정치 수준이 달라진 것이다. 정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정치지도자가 당을 옮아간 적은 없었다.

그와중에 김정길 의원은 상심한 노무현을 다독이면서 무너진 야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무현은 김정길 의원의 손을 잡고 새로운 집을 지었다. 통일민주당에 있다가 3당 합당을 거부한 사람들이 중심이 돼 민주당을 창당했다. 사람들은 이 당을 '꼬마 민주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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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1988년, 1992년 부산 동구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벽보들. ⓒ 선거정보도서관

    
첫 번째 낙선

노무현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다시 부산 동구에 출마했다. 많은 이들이 서울에서 출마하기를 권했다. 하지만 김정길, 노무현은 부산을 버릴 수 없었다. 영남에 야당을 복원하고 싶었다.

4년 전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하던 허삼수 후보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 총재님을 모시고 부산 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라고 말했다. 4년 전 허삼수 후보를 '반란군 총잡이'로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김영삼 총재는 지원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주시면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려면 허삼수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십시오."

김영삼의 지원유세는 뽕나무 밭을 바다로 만들었다. 그때 노무현의 선거구호는 이랬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슬러 헤엄친다."

하지만 그때 노무현은 바람을 거슬러 날아오를 만한 큰 새가 아니었다. 허삼수 후보의 절반밖에 표를 얻지 못하고 낙선했다. 노무현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이로써 김영삼과 결별하게 됐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와 <노무현 자서전> 외 여러 문헌과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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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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