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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7.01 12:29 수정 2020.07.01 12:29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연합뉴스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발언으로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은 류석춘 연세대 교수의 자기 변호가 활발하다. 6월 1일에 틀탁TV(류석춘 TV)를 개설한 데 이어, 26일에는 일본 우익 사이트인 '월간 하나다 플러스(月刊 Hanadaプラス)'에 '연세대 발전사회학 강의 징계 전말'이란 기고문을 실었다.
 
월간 하나다 플러스 사이트가 페이스북에서 "한국 교수가 목숨을 걸고 호소, 날조된 위안부 사건 독점 수기"라며 홍보중인 이 기고문은 류석춘이 자신의 학술적·정치적 경력을 소개한 뒤, 논란이 된 2019년 9월 19일의 연세대 강의 내용을 해명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 다음, 자신이 한국 사회 및 연세대학교의 반일 종족주의로 인해 피해를 입었음을 설명하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 기고문에서 류석춘은 위안부 피해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여성들이었으며, 그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된 게 아니라 매춘업자들에게 취업 사기를 당한 것뿐이라며 위안부 피해의 존재 사실을 부정한다. 

또 그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반일종족주의>를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시대 기생제 및 1945년 이후의 미군 위안부제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영훈과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서만 위안부'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 비해, 류석춘은 조선시대 기생 및 미군 위안부와 관련해서도 '제'라는 표현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류석춘은 '제'라는 표현을 추가해, <반일종족주의>에 제시된 이영훈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제, 1916년부터 식민지 한국에서 시행된 공창제, 1945년 해방 이후 존재해온 미국군 위안부제 등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제' 역시 공창제도의 하나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영훈의 주장을 소개하는 방식을 빌려 '조선시대 기생제', '미군 위안부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류석춘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여타 시대에도 일본군 위안부제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다.
 
미군 기지 주변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대한민국의 공식 제도 하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다. 1993년 일본 정부의 고노담화에서 인정된 것처럼,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에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미군기지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등치시키려면, 미군기지 여성들의 동원에 군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과 '미군 위안부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류석춘의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여성들이 미군기지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한국 사회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 문제 역시 앞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 문제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할 수는 없다. 각각 별개의 잣대를 갖고 각각 별도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제와 기생'제'

조선시대 기생'제'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류석춘이 말하는 조선시대 기생'제'라는 표현은 그 시대에 기생들을 위안부로 동원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점에 관한 한, 류석춘·이영훈은 물론이고 상당수 한국인들도 잘못된 역사지식을 갖고 있다.
 
관청에 속한 여성 공노비(관노비) 중 일부가 관기로 충원됐다. 흔히 말하는 조선시대 기생들은 바로 이들이다. 사극에서는 기생들이 주로 민간 술집에서 일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그 시대 기생의 대부분은 공노비 신분을 가진 관기들이었다.
 
관기의 직무는 연회를 비롯한 관청 행사 때 노래나 무용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지방 수령이나 관청 방문객의 수청을 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사실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지 '규범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니었다.
 
<경국대전>과 더불어 법률 역할을 했던 <대명률직해>는 "관리가 기생이나 악기를 다루는 여성과 혼인하여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만들면 곤장 60대에 처하고 이혼시킨다"고 규정했다. 관료가 관기와 결혼 혹은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관료가 관기와 일시적으로 함께하는 것까지도 금지했다. <대명률직해>는 "관리가 기생의 집이나 행실이 음란하고 방탕한 여성의 집에 묵으면, 관리를 곤장 60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도 관기를 가까이 하는 관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법에서 금지된 일이었다. 사극에서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쉬쉬 하면서 은밀히 벌어진 일이었다.
 
이처럼 기생에 대한 착취의 제도화가 조선시대에 존재한 적이 없는데도, 류석춘은 그것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생은 몰라도 조선시대 기생'제도'는 그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일본군 위안부'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조선시대에 존재했다고 볼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를 조선시대 기생 및 미군기지 여성과 등치시키는 류석춘의 주장은 위와 같이 역사적 실제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와 등치시키며 자신의 2019년 9월 19일 강의 내용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항변하고 있다.
 
류석춘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조선시대 기생 및 미군 위안부와의 유사성 때문인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느 시대나 위안부가 있었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만 따로 떼어내 문제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기고문을 읽다 보면,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진짜 이유가 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의 기고문 ⓒ 월간 하나다 플러스

 
류석춘의 이유

그는 일제 식민지배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무게를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고 있다. 이것이 위안부 문제를 가벼이 대하게 되는 진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식민지배의 무게를 가벼이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인들이 식민지배에 한을 품는 이유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의 가슴에 한이 남은 것은 일본의 억압과 착취와 수탈이 너무나도 잔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석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진단은 이렇다.
 
"필자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다른 식민지 경험과 비교할 때, 식민 모국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이 결합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식민지배를 받은 기간이 매우 짧아 긴 경우에 비해 저항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역사·문화적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에 그런 일을 당해 더욱 더 억울하게 생각했고, 서양열강과 비교하여 일본이라는 식민 모국은 산업화의 후발국이어서 조급한 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피식민 사회와 식민 모국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제3의 집단도 없어서, 두 민족은 식민지 현장에서 직접 부딪힐 수밖에 없는 최악의 조건이었음을 설명했다. 그래서 한국은 일본을 더욱 더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유산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본을 미워하는 것은 식민지배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배가 길었다면 증오심이 감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기간이 너무 짧아 증오심이 감소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 일본이 이웃나라가 아니라 저 멀리 유럽이나 아메리카대륙의 국가였다면, 한국인들의 미움이 줄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영국·프랑스 같은 선진 제국주의국가가 아니었던 것도 원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일본이 후발 국가라서 산업화를 조급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한국인들의 반감을 조장했다고 믿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좀 느긋했더라면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식민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완충자가 없어서 증오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제3의 존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좀더 오래 지배했다면, 일본이 좀더 멀리 있었다면, 일본이 좀더 느긋했다면, 일본이 제3자를 개입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한국인들의 반일종족주의가 감소했을 거라고 류석춘은 안타까워한다.
 
상식적인 한국인들은 '일제 지배가 없었다면' 하는 희망 섞인 가정을 하는 데 반해, 류석춘은 '일제 지배가 제대로 됐더라면' 하는 엉뚱한 가정을 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남긴 폐해와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그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위안부는 매춘부'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외면하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류석춘이 안타까워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이용수 할머니가 좀더 일찍 나서지 않은 것을 애석해 한다. 할머니가 좀더 일찍 정의기억연대를 비판했더라면 자신의 발언이 과도한 비판을 받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만약 이용수 할머니의 고발이 필자의 연세대 사건 이전에 발생했다면, 학생들 그리고 여론의 비난이 그처럼 난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그는 기고문에서 말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수요집회가 좀더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점과 정의기억연대(정대협)가 회계처리의 문제점을 갖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류석춘·이영훈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류석춘은 할머니가 좀더 일찍 나서줬다면 하고 아쉬워하고 있다.

"식민 모국"
 
류석춘은 기고문에서 일본을 '식민 모국'으로 불렀다. 학계에서 사용되는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런 표현의 사용이 부득이하다면 '식민 본국' 같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일본'이나 '일제'로 칭하면 된다. 그런데도 그는 '모국'이라는 표현을 4회나 사용했다. 일본을 '어머니 나라'로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많이 느끼지 않는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것들은 류석춘의 망언이 어쩌다 실수로 나온 게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뇌 구조가 망언을 생산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일이다.
 
기고문에서 류석춘은 "학교의 징계 절차는 마침내 이 문제를 놓고 2020년 5월 5일 '정직 1개월'이라는 '중징계' 결정을 최종적으로 내렸다"면서 학교의 처분이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기고문을 읽다 보면, 그게 중징계인지 경징계인지 의심치 않을 수 없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A4용지 10장을 넘는 장문의 기고문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을 신랄히 비판했던 그가 마지막 문단에 가서는 다소 엉뚱하게 글을 끝맺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문단은 그에게 '중징계'를 내린 연세대학교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졌다. 한국사회의 역사인식을 비판하고자 기고한 글인지, 중징계 무효확인을 목표로 기고한 글인지 스스로 모호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반일종족주의와 같은 비합리적 정서를 타파하고 진리와 자유를 탐구해야 할 대학이,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 사학이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연세대학이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반일종족주의가 지배하는 현장이었다. 33년을 봉직한 교수가 겪고 있는 반일종족주의의 구체적 모습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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