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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09 20:11 수정 2019.03.09 20:11
33인 중에서 언론인 출신은 오세창과 이종일 두 사람이다. 오세창은 <만세보>를 창간해 초대 사장을 지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신문 사장을 잠깐 맡기도 했다. 반면 이종일은 언론이 본업이라고 할 정도로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매체에 종사했다. 이종일은 또 교육자, 계몽운동가, 국어연구가,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특히 그는 문사(文士) 출신이면서도 문약(文弱)에 빠지지 않고 줄기차게 민중 주도의 항일투쟁을 꿈꾼 혁명가였다.

이종일(李鍾一)은 1858년 11월 6일(음)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이교환(李敎煥)의 장남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 이조년의 후손이다. 본관은 성주, 호는 옥파(沃坡), 도호는 묵암(黙菴)이다. 필명으로 천연자(天然子), 중고산인(中皐散人), 중헌(中軒) 등을 썼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록한 <묵암비망록(黙菴備忘錄)>을 남겼다.
비록 개인의 일기이지만 이 비망록은 개화기 및 3.1혁명 진행과정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생애를 연구한 학계의 성과물 또한 대개 이에 근거한 것들이다.

한글 전용 <제국신문> 발행인
 

이종일

 
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총명하고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 15세 때인 1872년에 상경하였는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제국신문을 창간한 1898년까지 관직에 있었다. 내부(內部) 주사를 거쳐 1898년 중추원 의관(議官)에 임명됐으나 10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07년 학부(學部) 산하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된 기록도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5세 때인 1882년 그는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이때 일본에서 선진문물을 접하고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은 운양 김윤식(金允植)과 외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평소 그는 실학자들의 저서를 즐겨 읽었으며 동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과 동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개화의 목적을 부흥민력(復興民力), 의식개조(意識改造), 자강자주(自强自主)에 두었다. 이를 위해 신문 창간과 학교 설립을 중요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시 유림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의병항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외세의 침탈로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이 역시 민족수호와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종일은 1896년에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 가입 이유는 "자강사상을 앙양하기 위해서"였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참여(參與)로 추대되어 고종 황제에게 '건의(建議) 6조(條)'를 상주하기도 했다. 그는 또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에도 관여하였으며, 필진의 한 사람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무렵 그가 몸담고 있던 또 하나의 단체는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였다. 이 단체는 1898년 3월 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권운동단체로 설립목적은 '민권의 총합(總合)과 정부의 비정(秕政)에 대한 비판'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회원 수는 약 40여명이었는데 매주말 실학과 동학사상 교리를 강의하는 강좌를 열었다. 독립협회와는 상호 보완적인 애국계몽단체였다.

평소 신문 간행에 관심이 많았던 이종일은 1898년 1월 유영석·이종면·이종문 등의 권유로 정교·장효근·염상모 등과 함께 신문을 창간하기로 뜻을 모았다. 준비과정에서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앞서 언급한 대한제국민력회였다. 그해 8월 회원들을 중심으로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했는데 이종일이 사장을 맡고 유영석·이종면 등이 신문제작 등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문이야말로 개화를 견인하고 이를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최적의 매체라고 생각했다. 1898년 8월 10일 창간된 <제국신문>은 민권운동, 여성해방, 정부의 비정(秕政) 비판 및 대안 제시를 편집방침으로 내걸었다. 앞서 창간된 <황성신문>이 소수 한자 해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층 신문이라면 <제국신문>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 계층을 상대로 한 대중신문이었다. <제국신문>은 창간호부터 제호와 기사 전체를 한글로 제작했다. 당시 <제국신문>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만세보> <대한민보> 등과 함께 구한말의 '5대 민족지'로 꼽혔다.

이종일의 <제국신문> 발행과 관련하여 특기해둘 것이 하나 있다. <제국신문>은 하층민과 부녀자를 주독자로 삼았다. 평소 그는 국문(한글) 전용과 부녀자 계몽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당시 세간에서는 한문전용 <황성신문>을 '숫(雄)신문', 한글전용 <제국신문>을 '암(雌)신문'이라고 불렀다. '암신문'이라는 말 속에는 비하의 뜻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장차 국가발전을 위해 여성을 키우고 활용해야 한다며 여권신장과 여성해방을 강조했다. 당시로선 매우 진보적인 그의 여성관은 동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제국신문> 사장 시절 그는 천도교에서 주관한 <만세보> 창간(1906.6.17.)에도 관여하였다. 또 1907년 11월에 결성된 대한협회 조직에도 참여하였으며, 동 협회보(1908.4.25. 창간)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 후신 격으로 결성됐는데 회장은 남궁억, 부회장은 오세창, 이종일은 권동진과 함께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밖에 1908년 1월 19일 서울 신문로 보성소학교에서 열린 기호흥학회 창립총회 때 임시회장을 맡기도 했다.

신문 창간 만큼이나 학교 설립 등 교육문제에도 힘을 쏟았다. 1894년 그는 보성소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4년 뒤 1898년에는 충정공 민영환 등과 함께 사립 흥화(興化)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또 1902년 2월에는 동농 김가진, 지석영 등과 국문(國文)학교를 설립하였다. 특히 그는 의무교육 실시와 함께 교육기회 평등을 강조하였다. 양반뿐만 아니라 평민이나 상민들에게도 교육기회가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육이야말로 민중 개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자 구국의 길이라고 여겼다.

이종일은 1906년(명치 39년) 최학래의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당시 48세였으니 좀 늦은 편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는 교주 손병희와 교류가 있었다. 손병희는 수차례 입교를 권했고 그 역시 입교를 약속하였다. 이종일은 동학 시절부터 천도교(1905년 12월 1일 개칭)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훗날 그는 독립운동의 주력 계층으로 동학교도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묵암비망록>(1899.3.12.)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상고하건데 동학 문제는 나도 호감을 갖고 있고 또 개화사상의 저력(底力)으로서 동학을 더욱 배가시켜 여성의 사회참여의 길을 터왔기 때문에 제국신문의 사시(社是)와 같은 것으로 지적했다. 사실 여성의 사회참여를 확대시킬 필요성은 우리나라의 개화와 문명발전책에 직결되는 것이므로 동학이 우리나라의 개화문명의 발전을 위해서 기여한 공적은 실로 크고 깊은 것이다. 또 동학군의 봉기는 곧 봉건제에 반항하는 울부짖음이다."

이종일이 천도교에 입교한 동기는 여러 측면이 있다. 우선 사상적으로 그는 동학(천도교)을 '위국적(爲國的) 종교'라며 민족종교의 축으로 인식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혁명을 '위국애민충정' '위국적 군행(群行)'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운동적 측면에서는 동학혁명을 '민중이 나라를 구제하는 운동의 시초'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동학이 민권을 증진시키고 민중의 혁명성을 간직한 사상이라고 여겼다. 평소 그는 단발을 구습타파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천도교 역시 이를 앞서서 실천하였다.

여기에다 무엇보다도 천도교의 대외인식 태도가 그를 끌어당겼다. 당시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역학 구도를 황인종 대 백인종의 대립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동양의 문명화를 선도할 나라로 여겼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일본의 지도 아래 한국과 청국이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천도교의 핵심인사 중 한 명인 오세창의 대외관과 일치했다. 이처럼 당시 그의 사상과 철학은 천도교의 노선과 상당부분 부합되었다.

이후 그는 천도교와 행보를 같이 하였다. <제국신문> 사장으로 있으면서도 천도교에서 지원한 <만세보> 창간에 관여하였다. 1906년 1월초 손병희가 일본서 귀국하면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와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이어 1910년 초 천도교 직영 인쇄소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회월보>를 발행했다. 1911년에는 창신사와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사(普成社)를 인수, 합병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제국신문>이 폐간되자 이종일은 보성사 사장을 맡았다. 1913년 1월에는 <천도교회월보> 과장을 겸하면서 여기에 한글로 논설을 쓰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우국지사들의 순국과 망명이 줄을 이었다. 매천 황현은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 등은 만주나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고민 끝에 이종일은 국내에 남기로 했다. 기왕에 죽는 목숨이라면 차라리 살아서 나라를 되찾는 데 신명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순국도 해외망명도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다. 목숨을 내놓거나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국내에 남아서 독립투쟁을 한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은 일이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고 일제의 회유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했다. 그는 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거절하였다.

"일제의 수작(授爵) 교섭을 거절하다. 듣건대 소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수여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이 새로이 어깨를 번쩍이게 되었다고 하니 우리 동포로서 이 같은 수치가 또 있겠는가. 나도 작위 수여를 교섭 받았으나 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묵암비망록>, 1910.10.20.)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1차 민중봉기, 2차 무장투쟁을 생각하였다. 따라서 초기단계에서는 평화적인 종교운동 내지 문화운동을 표방하되 이는 종국적으로는 무장투쟁을 전제로 하였다. 현실적으로는 언론·교육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민중봉기와 무장투쟁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 시작은 동학정신을 계승한 민중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민중봉기를 민족주의운동으로 규정지었다. 그는 일제의 경제수탈로 고통 받고 있던 농어민을 앞세울 요량으로 이종훈, 임예환에게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1912년 1월 이종훈과 임예환은 피해실태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종훈은 경기도 근처의 농민을, 임예환은 서해안 일대의 어민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농민은 8할, 어민은 6할 이상이 반일감정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이종일은 손병희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마침내 보성사 사원 60여 명과 함께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하였다. 비정치적 국민집회를 표방하면서 집회일은 7월 15일로 정하였다. 이종일은 사전에 집회 취지문, 건의문, 행동강령 같은 것들을 전부 직접 작성하였다. 그런데 집회 이틀 전(7.13)에 종로경찰서에 계획이 발각돼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이종일은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는데 취조 과정에서 단순한 생활개선운동이라고 항변해 겨우 화를 면했다.

그는 농어민이 참가하는 비정치적인 집회를 통해 노동자층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민중시위운동을 유도, 전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선도 집단으로는 민족적 성격이 강한 천도교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도교의 우두머리인 손병희는 신중론자였다. 할 수 없이 그는 손병희의 최측근인 권동진과 오세창을 먼저 설득하기로 했다. 이들과는 대한협회와 <만세보> 등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어서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을 통해 이종일은 손병희를 설득하였고, 손병희는 비정치적·비폭력적 운동을 전제로 자금지원 의사를 밝혔다. 당시 천도교는 방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갖고 있어서 손병희의 지지는 필수불가결했다.

1912년 10월 31일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가 조직되었다. 본부의 총재에는 손병희를 추대하고 이종일은 회장을 맡았다. 본부의 주요 멤버로는 부회장에 김홍규, 제1분과위원장 권동진, 제2분과위원장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 이종훈 등이었다. 이 조직은 민족문화수호를 내걸었지만 실상은 민중시위를 도모하기 위한 비밀결사체였다. 회원은 1백여 명에 달했는데 민중동원을 위해 수차례 강연회를 열었다. 이종일은 서간도에 설립된 부민단(扶民團)처럼 장차 이 본부를 민족운동이 구심체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14년 갑인년이 도래했다. 그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국제정세가 급변하였다. 그는 참전국의 일원인 일본이 패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이야말로 조선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궐기할 때라며 소위 '삼갑(三甲)운동'을 주창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 1904년 갑진개화운동, 그리고 이에 뒤이은 대중봉기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해 8월 이종일은 천도구국단을 결성하여 손병희를 명예총재에 추대하고 자신은 단장에 취임하였다.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에 이은 또 하나의 천도교 내 비밀조직이었다. 천도구국단은 단순한 독립운동 비밀조직 차원을 넘었다. 손병희는 이종일에게 이 조직을 장차 독립 이후 국가건설에 대비한 수임기구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훗날 3.1혁명 발아의 모태가 되었다.

한편 1915년 들어 그는 원로대신과 종교계 포섭에 나섰다. 1915년 2월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윤치호, 양기탁을 비롯해 한규설, 이상재, 윤용구, 김윤식, 박영효, 남정철 등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호응은 신통치 않았다. 때가 좋지 않다거나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다들 거절하였다. 기독교 측의 이상재만 "천도교 측에서 나선다면 나는 기독교도들을 동원해주겠다"며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소위 '3갑 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독립선언서 인쇄 담당... 민족대표 내 '과격파'

1918년 1월 8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14개조 발표는 천도구국단의 활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2월 중순 들어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이종일은 손병희에게 독단적으로라도 시위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손병희는 5월 5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훈 등과 상의하여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 3원칙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천도교 중앙총부가 앞장서서 9월 9일을 거사일로 잡았는데 이것이 소위 '무오(戊午)독립시위' 계획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역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당초 손병희는 독립선언서 작성을 이종일에게 맡겼다가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최남선으로 교체하였다. 그런데 최남선이 기한 내에 선언서 작성을 마치지 못했다. 그밖에도 원로 교섭의 지연, 자금 부족, 민중동원 조건의 미성숙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 거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해 말 3대 원칙을 재확인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타계했다. 장례는 3월 3일로 정해졌다. 일제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종일은 이때를 이용해 독립운동에 불을 지피기로 마음먹었다. 그 얼마 뒤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2월 15일에야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손병희를 찾아가 보고하였다. 그러자 손병희는 "묵암의 오래 전부터의 민중시위운동을 속히 결단하지 못했음이 민망할 뿐이오."라고 말했다.

이종일은 3.1혁명 준비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손병희 등 핵심인물들로부터 '과격파'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천도교 중앙총부는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을 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급선회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당초 선언서는 그가 쓸 작정이었으나 평소 과격한 언사로 인해 최남선으로 교체되었다. 최남선은 손병희의 '지침'대로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2월 초순부터 초고 작성에 들어가 2월 11일 완료하였다.

천도교측은 기독교 측 연락책인 함태영을 통하여 기독교 측의 동의를 얻었다. 선언서 인쇄와 배포는 이종일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2월 16일 밤 오세창으로부터 신문관에서 제작한 선언서 조판(組版)을 전달받아 20일부터 보성사에서 비밀리에 인쇄에 돌입하였다. 이후 2월 25일 2만5천매, 27일 1만매 등 총 3만5천매를 인쇄하였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2월 27일 오세창에게 선언서 원고를 받아 2만1천매를 인쇄했다'고 진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20일부터 찍어서 24, 25일경 먼 지역부터 우선적으로 발송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재판 때 위증을 한 것은 자신과 함께 체포된 보성사 총무 장효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월 28일 밤, 이종일은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 점검회의에 참석하였다. 거기서 33인 명의로 된, 보성사에서 그가 인쇄한 독립선언서에 날인하였다. 화살은 이제 시위를 떠난 셈이 됐다. 3월 1일 아침, 새벽 일찍 눈이 떠지더니 더 이상 잠이 오질 않았다. 그는 두 손을 잡고 오늘의 거사가 성공하기를 기원하였다. 거사 당일에도 그는 선언서 배포 일로 분주했다. 12시경에야 집에 보관하고 있던 선언서를 거의 다 배포하였다. 그는 점심식사도 하지 못한 채 경운동 자택에서 태화관으로 향했다.

오후 2시, 민족대표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그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이 인쇄, 배포한 독립선언서의 일부 오자를 수정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뒤이어 한용운의 인사말과 만세삼창이 있었고, 이내 일경이 들이닥쳤다. 일행은 손병희를 필두로 다섯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날 천도구국단 소속의 김홍규·윤익선·이종린 등은 독립선언서와는 별개로 <조선독립신문> 1만5천부를 제작해 뿌렸다. 이 신문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사실을 전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삼가라고 당부하였다.

이후 1년 반에 걸쳐 심문과 재판이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취조 및 재판과정에서 그는 한일병탄에 반대한 이유, 민족대표가 된 동기, 조선의 독립 필요성 등에 대해 담담하게 밝혔다. 심지어 복심법원에서 똑같은 심문이 계속되자 판사를 질타하기도 했다. 신문조서의 몇 대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문: 그대가 (민족)대표자의 1인이 된 동기를 말하라.
답: 나는 광무 2년(1898년)부터 약 10년간 제국신문 사장으로 있었는데 민족적 사상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합병은 되었으나 독립국이 되려면 선언서의 대표자 1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19년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일한합병에 반대하는가.
답: 바로 연방(聯邦) 제도라면 모르지만 식민지로 된 것은 반대한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조선을 독립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답: 그렇다. 시기가 오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19년 3월 10일, 경무총감부에서)

 

이종일 심문기사(동아일보, 1920.9.22.)

 
그가 옥중에 있던 1919년 6월 28일 밤 11시경, 보성사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전소되었다. 그는 보성사를 단순한 인쇄소가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처'로 여겼던 터라 몹시 애석해 했다. 화재 원인을 두고는 보성사가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곳이어서 일제가 일부러 방화했다고 여겼다. 종로경찰서는 실화라고 주장하였으나 그는 "분명 거짓"이라며 "일제가 절치부심했을 것"이라고 <묵암비망록>에 썼다.

출옥하는 날부터 제2의 3.1운동 추진

당초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경성감옥으로 이감돼 옥고를 치른 그는 1921년 12월 22일 만기 3개월을 앞두고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이날 출옥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함태영, 권동진, 최린, 오세창, 김창준, 한용운 등 총 7명이었다.

그는 출옥하는 날부터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3.1혁명 3주년이 되는 1922년 3월 1일을 기해 보성사 직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제2의 독립선언식을 할 계획이었다. 2월 20일 직접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는데 주체는 천도교가 아니라 '천도교 보성사 사장 이종일 외 일동'이라고 명기하였다. 그는 선언문에서 "그들은 우리 (민족)대표를 갖은 모욕과 혹독한 문초로 위협하였으나 투항하지 않았다"며 "민중 각자는 짚단 위에 잠자도 창을 베개로 하여 온 누리가 자주독립 되게 하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로만 끝이겠습니까."라며 민중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에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2월 27일 보성사에서 선언서를 인쇄하던 중 일경에 발각돼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제2의 3.1운동' 계획은 비록 실행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내용은 1979년 이현희 교수가 '자주독립선언문'을 입수해 공개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말년은 대단히 외롭고 불우했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종칠(鍾七)의 아들 학순(學淳)을 입양하였는데 그가 옥중에 있던 1920년 6월 25일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출옥 당시 그는 이미 64세여서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또 손병희 생존 시에는 더러 지원을 받았으나 그가 사망한 뒤로는 이마저도 끊겨 말년에 어렵게 생활하였다.
 

이종일 부음기사(동아일보, 1925.9.1.)

 
그는 1925년 8월 31일 경성부 죽첨정(현 서울 종로구 평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그의 부음을 전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영양불량, 즉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한다. 평생을 청렴한 선비로 산 그는 조반을 마치면 저녁밥이 걱정되는 형편이었으나 남한테 궁한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장례는 9월 2일 3일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아현동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36년 5월 이태원 공동묘지가 헐리게 되자 집안동생뻘이자 천도교 간부 출신인 이종린의 알선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으며, 1966년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15번)으로 묘소가 이장되었다.

1978년 이종일기념사업회가 발족하였으며, 1986년에는 충남 태안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또 2009년 8월에는 생가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그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서울 종로구 조계사 뒤편 옛 보성사 터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종일 동상(서울 종로구 수송공원)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옥파문화재단, <옥파 이종일선생논설집> 3, 교학사, 1984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이종일 편, 1995.3
- 박걸순, '옥파 이종일의 사상과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95.12
- 김정남, '이종일의 민족운동 노선과 활동',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 박성수,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 대표-손병희와 이종일을 중심으로', 2004.3.
- 김창수, '3.1운동과 옥파 이종일-<옥파비망록>을 중심으로', <중앙사론> 21, 한국중앙사학회, 2005.6
(그밖에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천도교월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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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