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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2.20 07:55 수정 2019.02.24 02:49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연재한다. 이 글은 기독교계 길선주 편이다.[편집자말]
   

길선주


길선주는 '한국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애초 선도와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기독교에 입문한 후 40여 년간 복음을 전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새벽기도를 도입하는 등 한국식 기독교를 만든 선구자적 인물로 꼽힌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약 380여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800여 명을 목사와 전도사,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부흥회 집회장에서 쓰려져 삶을 마쳤다.

길선주(吉善宙)는 1868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 후장동에서 길봉순(吉鳳順)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의 19대 손으로,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다. 네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일곱 살 되던 해에는 명망 있는 학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한학을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걸출한 골격을 갖추었으며, 또래들에 비해 총명했다고 한다. 열두 살 때 '일은 아니 하는데 옷상자에 옷이 가득하네'라는 시를 지어 서당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1882년 부친이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안주 노강첨사(老江僉事)로 부임하게 되자 그는 부친을 따라가 상서호(上西湖·향교)의 장씨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7세가 되던 해에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인근의 불량배 윤학영 형제의 습격을 받아 그는 큰 상처를 입게 됐다. 이후 그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하였는데 얼마 뒤 부친이 퇴직하자 부친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남의 집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며 장사를 배운 그는 한 때 상점을 운영하였으나 1년 만에 빚만 지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새벽기도회로 평양대부흥 운동을 이끌다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길선주.


수난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의 허무함을 맛본 그는 중국의 관우와 유비 등을 모시는 관성교(關聖敎)에 빠져들었다. 그는 평양 대성산에 들어가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며 수련하던 중 신비한 체험을 한 후 더욱 수련에 매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선도(仙道) 수련으로 유명한 평양의 장득한(張得漢)을 찾아가 지도를 받으며 수련에 혼신을 다했다. 그 뒤 그는 선도에 통달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길 장수' '길 도인'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랐다.

상당한 경지에 오른 그는 도인들을 만나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러던 중 1893년 봄, 당시 평양에서 소문난 마포삼열(馬布三悅, Moffet)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 교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난길에 오른 그는 한없이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 입산하여 수행에 정진했다.

1896년 봄, 피난생활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그는 절친한 벗이자 함께 선도의 길을 걷던 김종섭(金鍾燮)이 기독교인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기독교 서적을 구해 탐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김종섭은 매일 같이 그를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면서 각종 신앙서적들을 갖다 주었다. 그 가운데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책은 <천로역정>이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간절한 기도와 함께 예수를 찾기 시작하였다. 선교사 게일이 기록한 그의 고백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일곱 째 되던 날 지치고 절망한 나는 반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나는 갑자기 "길선주야!" 라고 크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고, 그 소리는 반복해서 울렸다.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까? 방 자체가 변형되었고 영광스러운 빛이 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내 영혼에 안식과 용서와 애정이 자리 잡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내가 수년간 고뇌하며 찾았던 하나님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기도 중에 강령체험을 하게 된 그는 이튿날 김종섭과 함께 널다리골 예배당 아침예배에 참석하였다. 29세 때인 1897년 그는 장대현(章臺峴)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이길함(李吉咸, Gra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정식 기독교인이 된 후 그는 제일 먼저 상투를 자르고는 온 가족을 전도하였다. 그는 또 금식과 철야기도에 정진하였는데 한번 손에 성경을 쥐면 놓을 줄 모를 정도로 열중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 선교사는 우리말에 능숙하지 않아 주로 그가 집회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 1898년 봄, 그는 널다리골 교회 영수(領袖)로 임명되었다.

1902년 그는 교회로부터 조사(助事)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다. 조사 취임은 목사가 되는 것을 전제한 것이어서 그가 경영하고 있던 약국을 정리해야 했다. 당시 약국 수입은 월 89원, 조사의 사례는 6원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결단을 내리고 장대현교회 조사 겸 황해·평안 2개 도(道)의 조사로 취임하였다. 1903년 봄,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한국 최초로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1907년 제1회 졸업한 그는 7명의 동료와 함께 평양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 때 장대현교회 앞에 모인 교인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운동으로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을 꼽는다. 이 운동은 그해 1월 6일(주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진행된 겨울 남자 사경회(査經會)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새벽기도회를 통해 수많은 교인들의 회개를 이끌어냈다. 회개가 계속되자 감시 차 집회에 참석했던 경찰 중에서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됐다고 한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그가 있었다.

대성공을 거둔 평양 부흥운동은 이내 전국으로 번져갔다. 평북 의주 등 압록강 연안 교회들의 초청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온 그는 서울 승동교회의 초청을 받았다. 그해 2월 17일부터 열린 서울장로교 연합 사경회는 그가 인도하게 되었다.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젊은 부흥사'로 불린 그는 첫날부터 성도들을 감동시켰다. 그해 9월에 열린 제4회 노회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된 그는 전도국장까지 겸하며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당시 그는 황해도의 김익두(金益斗), 의주의 이기선(李基宣)과 함께 '3대 권능(權能)목사'로 불렸다.

이후 3년 동안 계속된 그의 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번져나갔다. 그는 한국교회의 현대화를 위해서도 크게 노력하였다. 우선 교회 안에서의 남녀 구별을 없애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장막을 철거하였다. 또 우리의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다. 아울러 국내 최초로 성가대와 교회음악단을 조직하여 선교 활성화에도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랑이 없는 교회는 지탱할 수 없다"며 교회의 양적 팽창을 경계하며 신앙의 성숙을 강조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그가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장남의 죽음도 한 요인이 됐다. 그의 장남 진형(鎭亨)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07년 신민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성학교 교사로 복귀하였으나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만주-상해를 거쳐 1913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LA 등에서 국어강습소를 열어 활동하던 그는 옥중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이 악화돼 귀국하였는데 1917년에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됨)

3.1독립선언에 동참... 유일한 무죄 방면

그 무렵 정주의 이승훈은 천도교 측과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2월 12일 상경하여 송진우, 최남선, 최린 등을 만나 거사 계획을 듣고는 14일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동참을 타진하였다. 이날 평양 기홀(記笏)병원에서 이승훈을 만난 그는 3.1거사 계획을 전해 듣고는 적극 찬동하였다.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정오 무렵, 그는 평양에서 안세환이 보낸 사람을 통해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독립선언식 일자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황해도 장연에서 집회를 마친 그는 2월 28일 장연을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사리원에서 1박하고 3월 1일 오후 6시에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당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불참자는 그를 포함해 원산의 정춘수, 의주의 유여대, 정주의 김병조 등 4명이었다.

경성역에 내리자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들도 전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그는 선언서에 서명까지 한 사람으로서 도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 그 길로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가서 자수하였다. 자수 당일로 일경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얼마 뒤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신문조서 가운데 몇 군데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는 조선의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였는가.
답: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나는 극도의 근안(近眼)이고 또 몸이 불편하여 앞으로는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나는 정치적인 일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4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피고는 정부와 총독부 또는 외국에 보낼 청원서와 독립선언서에는 어떠한 취지의 내용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가.
답: 그렇다.
문: 이 독립선언서를 본 일이 있는가.
답: 본 일이 없다.
문: 피고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한다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답: 나는 국민에 대한 영향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다. 청원할 것만을 원하여 청원을 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분가하는 문권(文券)을 내달라고 의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므로 허락하여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문: 독립선언을 발표하면 국민은 그것에 자극되어 경성과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날 줄로는 생각하였던 것이 아닌가.
답: 나는 지금까지 독립선언서를 본 일이 없으므로 내용을 알지 못하지마는 그것을 발표하여서 폭동이 있을 것이라고는 나로서는 생각지 않았다.
문: 3월 1일을 기하여 평양에서도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일이 있는가.
답: 나는 그런 일은 알지 못하고 지금까지 종교만 믿음으로써 정치의 일은 생각하지 않았으나 시세가 변하여 와서 민족자결이라고 하는 것을 제창하였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독립청원을 하는 일에 찬성하여 명의를 내었으나 이렇게 되었으니 독립은 세계에서 줄 것이라는 계획에 참가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문: 피고가 독립청원을 한 것은 정부에 대하여 불평불만이 있어서가 아닌가.
답: 아무 불평불만도 없고 단지 나는 속국이 된 데 있었으므로 독립국이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이번 계획에 참가하였을 뿐이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상의 진술내용을 감안할 때 그는 이승훈과 대화하면서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서명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7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신문과정에서 그는 "청원서에 명의를 내는 데 승낙하였고 인장을 보냈지 (독립)선언서에 대해서는 찬성한다거나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이 없다"고 진술한 바도 있다. 그의 이런 답변은 보수주의적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정교(政敎)분리 내지는 '교회의 비정치화'라는 신앙원리가 바탕에 깔려 있으며, 당시 기독교계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후 서대문감옥을 거쳐 마포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미결수로 복역 중이던 그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48인 가운데 11명, 33인 가운데는 그가 유일했다. 무죄 이유로는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지 않은 점, 당일로 경무총감부에 자수한 점 등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그는 포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늦었고 등급도 한 등급 낮은 3등급을 받았다.

부흥집회에서 생을 마치다

옥중에서 그는 '요한계시록'을 1만 번 읽었다고 한다. 출옥 후 그는 한동안 자택에서 휴양하며 순회 전도계획을 세웠다. 1922년은 그가 목회 활동을 시작한 지 25년,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5년째 되는 해였다. 그가 시무하던 장대현 교회에서는 목사 전임(專任) 15주년 기념식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4년 뒤 1926년 교회 내에서 분란이 일어나면서 그가 교회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박윤근 등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청년들이 그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하면서 교회 내 신·구파 세력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발단은 장로 투표 때 장로회 회원들이 검표 발표를 정확하게 하지 않은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중외일보, 1927.2.26) 해를 거듭해도 사태는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교회 내에서 신도들 간에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평양노회는 1931년 10월 그를 사직시켰다. 결국 그는 따로 평양 시내에 이향리(履鄕里) 교회를 세워 분립(分立)하였다. 그는 이후로도 전도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1934년 초부터 7월말까지 그는 북간도와 함경북도를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펼쳤다.
 

길선주 부음기사(매일신보, 1935.11.28.).


1935년 8월 평북 선천군 월곡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그는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해 11월 20~26일 평남 강서군 고창(高昌)교회 부흥집회 마지막 날 마지막 축도를 마친 후 다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차남 진경(鎭京)이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그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이날 오전 9시경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평양 상수구리 자택으로 운구되었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다. 장례식은 12월 3일 숭실전문대 강당에서 평양노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유해는 장로교 공동묘지인 서장대(西章臺)에 안장되었다.

평생을 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한 그는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 숭덕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평소 성경연구에도 몰두했던 그는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 <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된 차남 진경(NCC 총무 역임)은 <영계(靈溪) 길선주 저작 전집> <영계 길선주> 등을 펴냈다. 화가가 된 3남 진섭(鎭燮)은 해방 후 월북하였으며, 이밖에도 두 딸을 두었다.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는 이유로 한동안 포상이 보류돼 오다가 지난 2009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에는 이 대학의 전신인 평양신학교 설립자 마포삼열 목사의 기념관 및 묘소(2006년 미국서 이장)와 함께 1회 졸업생인 그를 기리는 '길선주 기념정원'이 조성돼 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김학중, <길선주>, 넥서스CROSS, 2010
- 이공순, [발굴 현대사 인물 55] '보수주의 신학 길 닦은 장로교 대부 길선주', 한겨레, 1991.1.18
- 나동광, '길선주의 생애와 민족운동', <문화전통논집> 9, 경성대 한국학연구소, 2001.12
- 박성주, '3·1운동 과정과 그 이후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과 민족운동', 그리스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8
- 박양수, '길선주 목사의 생애와 사역 : 부흥운동가, 설교가, 민족운동가', 총신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2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경향신문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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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