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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2 09:01 수정 2019.04.03 18:12
<전숙자의 '진실을 노래하라' ①>에서 이어집니다.

퉁방울눈을 한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눈알만 좌우로 굴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 뭐 불편한 거 있어요?" "....." "큰 거 보셨구나" 전숙자는 할아버지의 바지를 내렸다. 순간 지독한 똥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 봄에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손녀 숙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늘 집안이 시끄러웠다.

똥 묻은 바지를 광주리에 담아 터벅터벅 걷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숙자의 목은 자연스럽게 자라목이 되었다. 보통 빨래는 마을 개울에서 하지만, 똥 묻은 바지는 그럴 수가 없어 1km 떨어진 논 웅덩이로 가야 했다. 주변의 커다란 돌을 주워 얼음을 깼다. 맨손으로 얼음물에 바지를 빠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잠깐 사이에 손이 얼었지만 빨래를 중간에 멈출 수도 없어, 손을 입에 대고 '호호' 하며 빨래를 마무리했다. 손은 어느새 파란 심줄이 돋고, 손등이 얼어 터져 피가 흘렀다.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 빨래를 너니 새벽이었다. 한 번 얼은 몸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쪽잠을 자고 나니 해가 방안을 슬금슬금 기어왔다. '아차 늦었구나' 부리나케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고 학교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2교시가 지난 뒤였다. 슬금슬금 자리로 가 앉았지만 담임선생 김준수(가명)는 "전숙자! 뭐 하느라고 이제 와? 썰매 타다 늦었지, 이리 나와"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김 선생이 다그쳤지만 '할아버지 바지를 빨다가 늦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은 숙자의 아버지와 엄마가 없는 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풍이 와서 대·소변도 못 가리는 할아버지와 둘이 산다는 것은 기특함의 대상이 아니라 놀림의 그것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답변이 없자, 김 선생은 "손 내밀어"라고 하며 대나무 회초리로 숙자의 손을 내리쳤다. 회초리가 숙자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온 몸이 경직되고, 손바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나, 둘...열" 열대를 맞고 제 자리에 앉으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날 밤 숙자의 손에서는 불이 났다. 손이 너무 뜨거워 방문을 박차고 장독대에 쌓인 눈에 손을 넣었는데, 눈이 녹으면서 김이 나왔다. 순간 콧등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개월 후 숙자는 학교를 그만뒀다. 결국 졸업도 못하고 4학년에서 학업을 멈추어야 했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할아버지에게 "미쳤다"며 돌을 던져, 툭하면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할아버지가 정신을 놓은 것은 숙자가 11살 때인 1958년이었다. 면사무소 직원과 경찰들이 인구조사를 하던 때였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어디 갔냐? 작은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냐?"며 시시콜콜 물었다. 순간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네놈들이 우리 아들을 죽여 놓고, 뭐가 어째"하며 쇠스랑을 들었다. "이놈들 다 죽인다"며 달려들었다. 기겁한 공무원들은 달아났지만,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정신은 임종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지서에서 선 채로 대·소변을 본 어머니

어두컴컴한 밤에 그림자가 방문을 잡아당겼다. 동생의 피신 때문에 덩달아 산으로 몸을 피했던 전재흥이 딸 숙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온 것이다. 들뜬 맘으로 집에 온 전재흥은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충남 서천군 시초면 시초지서로 연행되었다. 딸이 태어난 지 이틀만인 1949년 1월 8일이었다.

다음날 아내 장복순(1924년생)은 허리까지 온 눈길을 허우적거리며 4km 떨어진 시초지서로 갔다. 남편은 유치장에 갇혀 있어, 지서장에게 항의했다. "내 남편이 뭔 죄가 있다고 여기에 가두는 거예요?" "당신 시동생 전재원이 때문에 그런 거야" 장복순이 다시 항의했지만, 지서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 남편 풀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란 말을 끝으로 장복순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장복순이 해산 직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찰들이 안달이 났다. "아주머니 그러지 말고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라며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복순은 선 채로 대·소변을 봤다. 경찰들은 기겁을 했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이틀 만에 지서장이 백기를 들었다. 전재흥이 각서를 쓰고 지서에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전재흥은 가족의 평온한 삶을 위해 좌익 활동 중지 선언을 했지만, 동생의 일에 본의 아니게 또 관여되었다. 동생이 북한군 점령시절 활동 혐의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때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전재흥은 또 다시 도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도피 중에도 딸의 신상이 늘 관심이었던 그에게 '숙자가 서게 되었다'는 소식은 가뭄의 단비였다.

야심한 시각 집으로 와 숙자의 걷는 모습에 기뻐하던 그는 얼굴에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그가 검거되는 과정에서 딸 숙자는 군홧발에 차였고, 어머니 구덕환은 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맞아 탈골이 되고, 죽기 전까지 청각장애자로 살아야 했다. 전재흥은 서천경찰서를 경유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고, 사건은 조작되었다.

아버지 전봉준이 대전형무소로 면회 갔을 때 아들 전재흥은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동생에게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이를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숱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회유의 손길이 뻗치기도 했다. 하루는 충남 서천경찰서 경찰이 전봉준에게 찾아와 "전 재산을 바치면 아들을 빼주겠다"고 한 것이다. 다음번 면회 때 전봉준이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전재흥은 "아버님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재산을 바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만간 석방될 테니까요"라고 했다. 하지만 듬직한 아들의 이야기만을 믿었던 전봉준은 이후에 영원히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자살 시도 후유증, 혼수상태서 강제 결혼
 

증언하는 유족 전숙자 ⓒ 박만순


전재흥이 학살된 후 아내 장복순은 딸 숙자가 크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살았다. 하지만 전봉준은 며느리가 개가하기를 원했다. 전봉준이 독한 마음을 먹고 며느리를 집에서 내보내기로 작정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는 며느리가 기거하던 방의 구들장을 파헤치고 방문을 뜯어 창고에 처박았다.

쫓겨나다시피 장복순은 집에서 나갔고, 딸 숙자는 그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 1958년 할아버지에게 중풍이 와 3년 6개월간 고생하다가, 생을 달리했다. 할아버지에게 중풍이 오면서 숙자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고모들이 집안 재산 관리를 하면서 전숙자가 일 년 내내 농사꾼 뒷바라지를 해 수확한 농작물은 고모들의 차지가 되었다. 고모들은 할아버지와 전숙자가 연명할 최소한의 농작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갔다.

전봉준이 죽고, 전숙자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해 수면제와 쥐약을 마셨다. 하지만 누군가 위세척을 시켜서 간신히 살았지만 2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에서 그녀는 강제결혼을 당했다.
 
백마강 귀신은 다름 아닌 나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은 13세나 연상이었다.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생활에 좌절을 한 전숙자는 다시 한 번 삶을 포기하려 했다. 땅콩 농사를 짓던 때, 그녀는 백마강에 뛰어 들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몸이 강바닥으로 쭉 가라앉았다가 하류로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다가 모래톱에 걸렸다.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모래톱에서 다시 한 번 강물로 뛰어 들려고 했다.

강물로 뛰어 들려는 순간 강물에는 웬 귀신이 있었다. 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온 귀신이 써늘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겁을 한 그녀는 땅콩 밭으로 돌아왔다. 원두막에는 자식이 자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 신세가 이런데, 내가 죽으면 저 놈도 똑 같은 신세가 되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죽음의 기운을 몰아냈다. 물론 백마강 귀신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강물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인데 기겁을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보따리 장사, 여관 식모 등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을 했다. 1979년 겨울, 1개월 15일 동안 미용실에서 기술을 배웠다. 1980년 100만원을 대출 받아 미용실을 차렸다. 의자와 미용재료는 모두 중고였다. 그렇게 시작한 미용실은 사업이 날로 번창해 애들 3명을 대학까지 가르치고, 노후생활을 준비하게 해준 진정한 효자였다.
 
시로 진실을 노래하다
 

전숙자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 박만순


2002년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던 전숙자(1948년생, 충남 부여군 부여읍)는 2004년부터 전국의 위령제에 참여하면서, 곳곳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각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유가족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전쟁 당시의 참혹함을 시로 엮었다.

전숙자가 각 지역 위령제에 시를 낭독할 때는 단순한 시 낭독이 아니라 '눈물의 물결'이 연출된다. 2018년 충북 청주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시 낭독이 있었다.
 
달빛마저 푸르른 1950년 광풍이 몰아치던
그 여름밤 대학살의 현장 막고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대학살
내려 보던 북두칠성마저 통곡하던 밤 (중략)
 
이불 홑청에 말아 짊어지고
죄인처럼 숨어 옥녀봉을 내려올 때
땅인지 절벽인지 혼은 떠서 허공을 맴돌고
망연자실 통곡마저 삼켜야하는
 
김병묵 형님 원통해 녹아내리는 저 가슴을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
어찌 하오리까~~? ('그 여름밤의 광풍' 중에서)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에서 있던 민간인학살 장면을 시로 부활시켰다. 그가 시를 낭독하는 동안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전숙자는 다니는 곳마다 눈물을 몰고 다닌다. 본인도 서럽게 울지만, 그의 시는 듣는 이에게 공감을 일으켜 울 수밖에 없게 만든다. '눈물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것이다. 실컷 울고 나면 눈과 마음이 맑아진다.

전숙자는 2006년 '백두산문학회'를 통해 등단하였고, 2017년에 시집 <진실을 노래하다>를 출간했다. 이제는 유족이자 '시인' 전숙자다. 시로 진실을 노래하는 그가 많은 이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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