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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15 08:27 수정 2019.03.18 10:28
 

전재흥 ⓒ 박만순


"피고 전재흥은 할 말 있는가?" "....." "피고 전재흥은 1950년 7월 10일경 민청(民靑)에 가입하여, 괴뢰(傀儡)를 위한 활동에 종사하다가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기에 사형을 선고한다." 1951년 2월 21일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 재판관의 얼굴은 염라대왕의 그것이었다.

군사재판이 열린 지 11일 만인 1951년 3월 4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전재흥(1926년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재흥은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부역혐의자들과 함께 골짜기 안의 나무에 세워졌다. 지휘관의 "발사"소리와 함께 "탕탕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흙이 날리면서 전재흥의 목이 꺾였다. 26세 청년이 빨갱이 짓을 했다는 혐의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서대전사거리에서 급정거하다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출신 내역의 전재흥 판결문 ⓒ 박만순


'끽' 서대전사거리에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면서 난 소리에 통행인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운전을 하던 전숙자는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한국전쟁기 대전형무소 학살 위령제'라는 글씨가 주먹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전숙자가 2002년 7월 대전에 사는 아들집에 가다가 발견한 현수막은 순간적으로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위령제가 열린 산내국민학교로 차를 몰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한테 물어서 학살 현장을 찾았다. 조그만 위령비가 전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최소 18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장소'라는 설명이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전숙자는 비석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부짖었다. 뒤늦게 현수막을 봐, 위령제에 참석 못한 회한도 들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장소를 처음 알았다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그해 추석날인 2002년 9월 21일 새벽 4시에 산내 현장을 찾았다. 약간의 제수용품을 펼쳐놓고 골짜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오늘은 누군가 오겠지' 하며 오후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위령제 주최 단체를 수소문했다. 결국 '대전참여연대'에 연락해서 유족회 관계자와 연락이 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마치 죽은 아버지가 살아난 것처럼 반가웠다.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었고, 2006년 3월 14일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전숙자는 2002년부터 유족회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 다른 지역에 위령제나 행사가 있다고 하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참석했다. 자비로 기름 값, 식대 모두 부담하고 다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 사건은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만 3년여 기간의 조사를 거쳐 진실규명됐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을 받으니...

"등기 왔습니다." 받아보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온 우편물이다. 허둥거리며 우편물을 뜯어보니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재흥이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지만 공권력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된 것이 분명한데 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능' 처리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군법회의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형 확정 판결문 ⓒ 박만순


이때부터 전숙자는 투사의 역할을 자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불능 결정'을 통보받은 2010년 10월 6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되어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요지는 '1951년 진행된 군법회의는 불법적이며 위헌적이다'라는 것이다. 즉 제헌헌법에 군사법원과 같은 특별법원의 설치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군사법원은 1954년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야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최능진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즉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951년 1월 2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2월 21일 사형집행 된 최능진은 법적 근거도 없는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결정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라면 전재흥 역시 당연히 불법적인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해 판결되어 죽음에 이르렀기에 진실규명 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상황에서 최능진은 진실규명 되었고, 전재흥은 불능처리된 것이다. 형평성에 심대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매일 소머리해장국을 끓인 이유

'불능 통보서'를 받은 전숙자는 허둥지둥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때 도움을 준 이가 대전유족회 부회장 이계성(81세, 논산시 성동면)이다. 당시 이계성은 서울에 거주했는데, 충무로에 있던 진실화해위원회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당신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사건 피해자였기에, 이 사건이 어떻게 조사되고 있는지 조사관에게 매일 물었다. 관련 자료도 수집하고, 대전형무소 사건 유족들이 필요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커다란 도움을 줬다.

이계성은 불능 통보를 받아 얼굴이 사색이 된 전숙자에게 "계룡대로 갑시다"라며 손을 이끌었다. 육군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시로 한걸음에 갔다. 계룡대에 가서 전재흥에 관한 판결문을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20여 페이지의 판결문을 받았다. 판결문의 핵심 요지는 전재흥이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해 사형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군사재판의 절차상의 불법성은 진실화해위원회 판결에 맡겨놓은 상태였기에, 전숙자가 할 일은 별도로 있었다. 밤마다 소머리해장국을 끓였다. 들통을 들고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로 출근했다. 선동리는 아버지 전재흥이 살았던 곳이자, 아버지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라권집의 고향이기도 했다.

"어르신 저는 선동리 살던 숙잔데유. 해장국 좀 드셔 보셔유" "네가 숙자여? 어쩐 일여?" 수저로 해장국을 뜨던 선동리 노인은 전숙자의 용건을 묵묵히 들었다. "무슨 소리여? 재흥이가 구장을 죽게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노인은 "라구장은 서천등기소에서 불에 타 죽었어" 하며 펄쩍 뛰었다. 전숙자는 혹시나 해서 같은 동네에 아버지 친구와 동년배의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돌아온 답변은 이구동성이었다. 그러던 차에 라권집의 딸 라도정이 충남 서천군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에 걸쳐 주거지를 확인한 전숙자는 라도정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에 하나 "당신 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죽었소"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번째 발걸음에 라도정씨가 먼저 입을 뗐다. "그란디 누구신데 자꾸 울 집에 오시는규?" 용건을 얘기한 전숙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라도정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전숙자에게는 복음(福音)이었다.

"무슨 말이래유? 우리 아버지는 등기소에서 불에 타 죽었슈. 금이빨을 보고 시신도 수습했어유. 절대 당신 아버지 때문에 죽은 게 아니유" 서천등기소 사건은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북한군과 지방좌익이 서천군 우익인사들을 등기소 창고에 감금하고 1950년 7월 27일 불을 질러 25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는 라권집이
피해자로 명시되어 있었다. 즉 라권집은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서천등기소에서 불 타 죽은 것인데, 군법회의 재판장은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재흥 판결문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확인 절차 없이 '사형 확정 판결문'이 있다는 이유로 불능 결정 처리한 것이다. 더군다나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는 라권집은 동일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서천등기소 사건 피해자라고 진실 규명한 상태였는데, 이 자료조차 기관 내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것이다.

자료와 증언을 확보한 전숙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감정을 수습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했다. 위원회는 2010년 12월 18일 전숙자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전재흥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결정 요지는 '군법회의 재판이 불법적이다라는 점과 전재흥이 라권집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의제기한 지 2개월 만의 결정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불능결정 이의제기를 받아들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불과 2개월 만에 수정·보완한 결정을 내린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 ⓒ 박만순


그런데 2개월이라는 기간이 전숙자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낮에는 생업인 미용실 일을 하고 밤에는 소머리해장국을 끓여 선동리 노인들을 만나는 일과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단한 행군을 했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6.25때 끌려간 아버지가 누구를 죽였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라권집'이라는 사람을 죽이게 했다니, 그 사실이 믿겨지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위원회의 수정결정문을 받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밤 부여 백마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밤새도록 타야 마음속의 근심이 없어졌다. 이런 2개월간의 고난의 행군은 결국 몸에 이상을 가져왔다. 온갖 스트레스로 치아가 모두 빠졌다. 아래윗니가 모두 주저앉으면서 지금의 치아는 모두 임플란트다.

건강은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위원회의 수정결정문을 받아든 전숙자는 날아갈 듯 기뻤다. 마침내 2013년 1월 31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열린 전재흥의 재심은 무죄로 결정되었다. 전재흥이 살인혐의 누명을 써 학살된 지 62년만의 결정이었고, 전숙자의 진실 찾기 활동 10년 만의 일이다. 그렇다면 전재흥은 어떤 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골령골에서 이승의 생을 마감한 것일까?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 박만순


동생에게 도민증 내주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연희전문 출신인 동생 전재원의 인공시절 활동이 문제가 됐다. 전재흥은 재원에게 도민증을 주며 피신하라고 말한다. 또 며칠 후 경찰들의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전재흥도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전재흥은 몇 년 전에도 동생의 좌익 활동 내력 때문에 피신했다가 검거된 전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내의 목숨을 건 항의로 지서에서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산으로 피신한 전재흥은 어린 딸 전숙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서 걷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먹을 것을 가져 온 아내로부터 "숙자가 섰어요"라는 소식을 들었고, 그날 밤 늦게 재흥은 마을로 내려왔다.

재흥이 집에 도착해서 숙자의 걸음마를 보던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들이 군홧발을 신은 채로 방문을 열며 전재흥의 멱살을 잡았다. 전재흥은 저항했지만 여러 명의 경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끌려 간 것이 전숙자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순전히 동생 전재원에게 도민증을 내 준 것이 도피와 검거의 이유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몇 개월 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이장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재흥이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은 동료 수감자와 가족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강압수사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재심결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

딸 숙자를 애지중지 귀여워하며 사랑했던 딸 바보 전재흥, 동네사람들 중에 생일을 맞이한 사람이 있으면 꼭 생일상을 챙겨줬던 전재흥, 동네 사랑방에서 모시를 짜는 할머니들에게 옛날 얘기책을 읽어 주던 청년 전재흥은 마을에서 인심 좋고 언변 좋은 젊은이로 이름이 났다.

그런 전재흥을 경찰과 군법회의는 빨갱이로 몰아세웠지만, 62년 후 딸 전숙자(71세. 충남 부여군 부여읍)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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