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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24 07:58 수정 2019.01.24 11:03

현재의 누하동 청전화숙 모습 ⓒ 황정수

 
서촌 지역에 동양화가들이 많이 산 것은 당시 한국 동양화단의 중심이었던 서화미술회가 광화문 백목다리 근처에 있었던 것과 당시 화단의 중추로 우뚝 선 이상범이 서촌 누하동에 화숙을 낸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연유로 근대 동양화가들이 한 세대를 이어 이 근처에 모여 살았다. 서화미술회 대표였던 안중식과 조석진이 백목다리 근처에 있자, 그의 제자들이었던 이한복, 이상범, 노수현, 박승무 등은 서화미술회에서 멀지 않은 옥인동, 누하동, 효자동 등 서촌 지역에 살았다. 이들은 조선시대 전통 미술이 변화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도록 많은 노력을 한 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상범은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가 창설되자 두각을 나타내, 심사참여의 위치에 오르며 한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른다. 동양화부의 심사참여는 다섯 명이었는데 한국 사람은 김은호와 이상범 둘뿐이었다.

이상범이 미술 작품으로서 당대 최고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이러한 의견은 당시에도 의문시 되었는데, 당시 그의 별명이 '천편일률'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작품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요소도 많았다. 하지만 <동아일보>에 근무하였고 조선미전 심사참여에 오르자 재빨리 '청전화숙(靑田畵塾)'이라는 개인 미술학습소를 경영한 것은 미술계에서 그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범의 위세가 커질수록 많은 화가들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미 북촌 지역 와룡동에는 김은호의 화숙 '낙청헌(絡靑軒)'이 먼저 세워져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조선미전의 상을 휩쓸고 있었다. 후발 주자인 '청전화숙'은 김은호의 화숙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조선미전에 등용할 수 있는 대표적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화숙 문화는 훗날 한국 미술대학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은호의 화숙은 훗날 서울대학과 이화대학의 미술과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고, 청천화숙은 홍익대학의 미술과를 이루는 초석이 되어, 한국 근현대 미술계의 라이벌 구조를 만드는 원류가 되었다. 그래서 초기에 인물 그림은 서울대 출신들이 잘 그리고, 홍익대 출신들은 산수를 잘 그린다는 세평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예전 이야기일 뿐이다.
 
선생을 놀라게 한 어린이
 

유학 중의 정종여 ⓒ 유족

  
청전화숙에 드나들며 이상범의 대표적인 제자가 된 청계(靑谿) 정종여(鄭鍾汝, 1914-1984)는 당시 일본 유학 중이었다. 그는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는 이상범의 화숙에 드나들었다. 이는 자신이 추구하던 신남화에 대한 관심과 이상범의 그림 세계가 같은 의식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교류를 결심하였을 것이다. 또한 일본 유학 중에 일본에 만연한 화숙 문화를 보고 한국에서 가장 세력이 큰 화숙에 소속해 있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통의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청전화숙에 드나들며 이상범의 제자로서 활동한다.
 
정종여는 1914년 경남 거창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비교적 부농이었으며, 정종여는 재혼한 부모의 3남1녀 중 맏아들이었다. 1922년 거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는 꽃과 새, 나비, 닭 등 주위의 사물을 깊은 주의를 가지고 세심하게 그렸는데, 그것이 너무도 생동하여 주위 사람들과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성격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노래와 운동에도 두루 뛰어났다.
 
1929년 정종여는 보통학교를 졸업하는데 그때쯤 살림 형편이 어려워져 잡화 상점이나 개인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독립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갈 곳이 없자 절에 들어가 생활하는데, 이를 계기로 합천 해인사 주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정종여는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자전거와 전구 알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야간에 인물 초상 그리는 법 등을 배운다. 그리고 1933년이 되어서야 오사카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한다. 그가 오사카미술학교를 선택한 것은 이 미술학교의 교장이었던 남화가 야노 교우손(矢野橋村, 1890-1965)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노 교장은 인품이 훌륭하였다고 전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보이는 어려운 제자가 있으면 집에 들여 특별히 지도하였다고 한다.
 
정종여는 미술학교를 다니며 당시 일본 화단의 신사조인 '신남화(新南畵)'에 깊이 빠져든다. 신남화는 전통적인 일본의 남화에 서구 화풍을 접목한 것으로 매우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의 화법을 구사한 그림이었다. 비슷한 길을 걸으며 공부한 이응노의 작품과 두 사람의 그림이 유사한 면을 보이는 것도 두 사람의 지향점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한국을 오가며 참여했던 청전화숙에는 배렴, 심은택 등 뛰어난 문하생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이상범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정종여는 화숙에 드나들긴 하지만 화풍으로는 이상범의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는다. 이미 일본에서 배운 신남화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상범의 화풍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청전화숙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은 청전화숙이 화단에서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청전화숙에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승과 경쟁 관계에 있던 김은호 문하의 김기창, 박래현, 이석호 등과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한 것을 보면 정종여의 성품 자체가 매우 친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요구에 따르다
 

정종여 <지리산 풍경> ⓒ 유족

 
정종여는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전에 꾸준히 출품하며 화가의 길을 걷는다. 당시 일본에 유학한 한국 출신 미술가들이 대체적으로 조선미전에 출품하는 것을 꺼려한 것과는 상반되는 행동이다. 보통 선진적인 미술을 배운 유학파들이 국내에서 공부한 화가들과의 수준 차이를 들어 자존심 문제로 출품을 하지 않았는데 정종여는 비교적 그런 생각이 적었다.
 
1935년에 첫 출품을 하기 시작하여, 1938년에 <3월의 눈>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고, 이듬해 열린 미전에서도 <석굴암의 아침>으로 연이어 특선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는다. 이후 1944년 23회로 전람회가 끝날 때까지 꾸준히 작품을 출품한다. 그는 장우성, 배렴, 정말조 등과 함께 조선미전 말기를 장식한 가장 활동이 많았던 한국화가 중의 한 명이었다.
 
정종여가 열성적으로 미술 활동을 한 시기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일제는 화가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시국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종용하였다. 일본에서 공부하여 일제에 저항의지가 강하지 못했던 탓인지, 정종여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전시 체제의 시국을 반영하는 작품을 조선미전에 출품한다. 1943년 제22회전에는 <호국금강공명왕>이라는 작품을, 이듬해 제23회전에는 <수송선을 기다리다>라는 그림을 출품하여 입선하는데, 모두 시국을 반영한 작품들이었다.
 
또한 1944년에는 일제 군국주의의 전쟁 상을 고무 찬양하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한 '결전미술전람회(決戰美術展)'에 참가해 일본화부에서 <상재전장(常在戰場)>으로 특선을 차지한다. 더 나아가 1943년에는 퇴임하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에게 산수화를 기증한다. 1945년 전쟁 막바지에는 강화군수의 요청으로 대동아전쟁 출정자와 입영자에게 증정하기 위한 <수호관음불상> 1천매를 제작한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그를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을 찍게 되는 결정적인 자료로 남는다.
 
해방공간에서는 좌우 모두 활동
 

정종여 <한강낙조> 1942년 ⓒ 국립현대미술관

 
해방을 맞은 정종여는 성신여자중학교, 배재중학교 등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그는 이 시기에 고희동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성향이 강한 조선조형예술동맹과 김주경을 중심으로 한 좌익 단체인 조선미술동맹에서 모두 활동한다. 그러나 1947년 초부터 좌익 예술인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어 조선미술동맹의 활동이 점차 위축되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좌익 활동은 상당히 위축된다.
 
더욱이 좌익 문화인들의 사상 전향을 강제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을 설치하고, 좌익 미술단체에서 활동했던 미술인들이 매주 1회 가두 반공포스터 전시회를 여는 등 사상 교육을 받게 되자, 좌익 활동은 더욱 어렵게 된다. 이 보도연맹에는 정종여와 뒤에 월북한 이쾌대, 배운성, 최재덕, 김만형, 정현웅 등이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점령되자 그동안 지하에 잠적했던 좌익 미술인들이 조선미술동맹을 재건한다. 이때 정종여도 여기에 가담한다. 공산 치하가 된 상황이 되자 미술동맹의 회원들은 김일성, 스탈린 초상화와 각종 포스터 등을 그리며 부역한다. 9.28 수복이 되자 미술동맹의 주동자들은 대부분 북쪽을 택해 월북한다. 정종여도 이 무렵에 북으로 건너간다.
 
다행히 정종여가 월북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술사가 김복기가 기록한 내용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마침 정종여와 이쾌대의 활동을 본 한 미술인의 귀중한 증언이 있어 소개한다.
 
"서울이 점령되고 며칠 후 좌익 미술가들이 단체를 만들어 참석하라고 종용했어요. (…)마침 모임의 명칭을 결정하는 등 논의가 분분한 날이었어요. 이북 실정을 설명하기도 하고…. 그날 오고간 말 중에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미술인은 미술만 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자. 작품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거다'라고 정종여가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이쾌대가 '미술인이라고 정치 못할 일이 뭐 있냐?'고 하는 것이었어요." 

정종여와 이쾌대, 당시 동양화와 서양화 부분을 대표할 만한 두 사람의 미술과 정치에 대한 사고의 차이를 엿보게 한다. 이 밖에 유족 중 딸이 그 때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해 6월 26일이 남동생 생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전람회 관계로 부산에 내려가 계시다가 생일 때문에 25일 상경한 거지요. 당시 다른 화가들처럼 부산에 있었더라면 북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9.28수복 며칠 전이었어요. 좌익 활동을 하다가 수감돼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감옥에서 나왔던 후배 동양화가 이건영씨와 인민군 2명이 와서는 아버지를 데리고 간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친척을 통해 들은 사실이지만 삼선교 부근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북행 대열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이 걸어가더라는 거예요. 아버지 같은 위치의 사람이 월북을 자청했더라면 그렇게 걸어서 갔을까요?"
 
정종여의 월북 상황에 대해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이다. 이런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정종여의 월북 동기는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사상적 정치적 이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의 작품 경향이나 교우 관계를 종합해 볼 때에도,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깊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정종여는 해방 직후에 민족미술의 건설과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 앞에서 새로운 조형 이념과 방법적 모색을 지향하는 작품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월북으로까지 이끌었으리라고는 보이지는 않는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의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 하나
 

정종여 <석굴암의 아침> 1940 ⓒ 황정수

 
정종여의 작품은 전통적 남화를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하는 '신남화' 실현에 목표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대부분도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조선미전에 출품한 작품도 그렇거니와 그가 남긴 다른 작품을 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그가 공부한 오사카 지역의 화풍도 일본의 양대 화파인 '교토화파'의 중요한 지역이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화파의 대표적인 내용이 '남화'와 '역사화'이다. 그러니 '새롭게 해석된 남화'와 '신선한 감각의 역사화'가 그의 대표작이 되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쉬이 알 수 있다.
 
이런 정종여의 미술 의식을 보여 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두 번째 특선을 한 <석굴암의 아침>이다. 이 작품은 당시 많은 호평을 들었는데, 마침 이 작품을 둘러 싼 몇 가지 자료가 남아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석굴암의 아침>은 복원된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불상의 왼편 앞부분에 서서 약간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불상의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촛불이 이채롭다. 내부 석벽에 조각된 것들이나 질감의 표현 또한 자연스럽다. 석굴암의 매력적인 한 순간을 잘 포착하여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정종여가 경주를 사생 여행할 때의 경험과 그때 얻은 소묘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가 경주를 찾은 것은 1939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동료화가 최근배와 함께였다. 이때 두 사람이 석굴암에 간 것은 둘 다 일본 유학파로 서로 친했던 데다, 당시 석굴암에 가는 것이 미술인들 사이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들에게는 꼭 찾고 싶은 명소였다.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많은 이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았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았다. 1920년대에는 일본의 정치계 거물이나 군인들이 주로 찾았고, 1930년대에는 일본 미술인들이나 명사들이 많이 찾았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석굴암 관광이 절정에 이르러 토함산 꼭대기까지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가마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대중화 되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경주를 여행하는 유행이 생겼다. 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이때 본격화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오는 유명한 명사들이나 화가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지인들의 안내를 받아 경주를 여행하는 것을 훌륭한 대접으로 생각하였다. 대개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즐겨 찻는 곳은 경성, 경주, 평양, 금강산이 4대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경성의 고궁, 경주의 불교 유적, 평양의 명승과 유적과 그리고 기생, 아름다운 금강산은 일본인 또는 여유 있는 한국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였다.
 
당시 석굴암은 '석불사(石佛寺)'라 불렸는데, 석굴암 앞에 있는 절이 석불사였다. 당시 석불사는 석굴암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저명인사들이 방문하면 방명을 받거나 필적이나 그림을 받는 풍습이 있었다. 문인들이나 명사들이 방문하면 좋은 명구나 시구를 적었고, 화가들은 그림을 남겼다. 이때 남겨 놓은 서화첩과 방명록이 전한다.
 
한국인 중에는 시인인 파인 김동환의 글씨가 보이고, 몇몇 문인들의 필적도 있다. 미술인 중에는 역사화를 잘 그린 이여성이나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 등 월북 미술인이 글씨를 남겼다. 화가로는 정종여, 최근배, 김용조 등이 서화첩에 그림을 남겼다. 정종여와 최근배는 석굴암에서 내려다본 토함산의 모습을 그렸고, 김용조는 금강역사의 모습을 간단하게 그렸다.
  

정종여 <토함산 소견> 1939 ⓒ 황정수

 
정종여 작품 <토함산 소견>은 석굴암에서 토함산을 내려다보며 시야를 넓게 하여 호방하게 그린 것이다. 1939년 기묘년에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몰골법을 중심으로 산뜻하게 그린 신남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맑은 화면이나 감각적인 붓 선에서 정종여의 필체가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석굴암 방문 주변 상황을 생각해보면 당시 정종여의 경주와 석굴암 방문은 다음 해에 있을 조선미전에 출품할 작품을 생각하기 위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 얻은 석굴암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그 작품이 <석굴암의 아침>이다. 이 두 작품 사이의 행간을 읽으면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할 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노력이 연이은 특선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깊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정종여의 작품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 유족이 남쪽에 있고, 소장가 손에 있는 것도 꽤 된다. 지나친 다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연구자들에게는 반가울 만큼 많은 양이다. 필자는 늘 정종여에 대한 연구가 더 진척되어야 한국 근대미술사가 더욱 화려해진다고 말한다. 다른 월북 작가들이 전하는 작품이 지나치게 적어 전모를 알기 어려운 것에 비해 정종여 만큼은 연구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 월북 작가 중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가 정종여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종여가 지니고 있는 복잡한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또한 일본에서도, 그리고 남북 분단 후 북한에서도 승승장구한 화가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저항과 순응, 해방공간의 좌익과 우익, 남한과 북한의 이념 대립과 같은 굴곡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복잡한 인생 때문에라도 월북 작가에 대한 연구의 성패는 정종여 연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정종여 미술세계의 전모를 파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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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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