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31 09:29최종 업데이트 19.01.31 09:29
한국 근대 서양화단의 태동을 언급할 때 항상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다. 고희동은 1909년 한국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다. 이후 고희동의 뒤를 이어 1911년에 김관호(金觀鎬, 1890-1959), 1912년에는 김찬영(金瓚泳, 1893-1960)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들은 한국 근대화단에 서양화를 도입한 선구자 3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 3인은 한국에 돌아와서는 각각의 개인적인 이유로 서양화를 그만두게 된다. 고희동은 동양화로 전향하고, 김관호는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으나 후에 주로 서예를 하며 소일한다. 김찬영은 문예 활동을 주로 하다 서화 골동의 수집에 몰입한다.

오히려 평생을 본격적인 서양화가로 자처하며 지내게 되는 이는 이들 3인 이후에 나온다. 진명여고보를 졸업한 나혜석이 1913년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다녀와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산다. 또한 이종우(李鍾禹, 1899-1979)는 1918년에 도쿄미술학교로 유학한 후 한국 최초로 프랑스 파리로 미술 유학을 간 서양화가가 된다. 

뒤를 이어 이제창(李濟昶, 1896-1954)이 1921년에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비슷한 시기에 장발(張勃, 1901- 2001)과 공진형(孔鎭衡, 1900-1988) 등도 같은 학교로 유학을 하여 본격적으로 한국 근대 서양화단을 개척하게 된다. 
 

이제창 ⓒ 황정수


이들 중 이종우와 장발은 후에 한국 화단의 중추가 되어 괄목한 만한 활동을 하여 그들에 대한 작품과 행적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창이나 공진형 같은 이는 화단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살았음에도 많은 작품이 전하지 않고 연구도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이제창은 최초로 서양화가가 된 고희동과 그의 영향을 받은 후예들이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해서는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상황이다. 활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주변 친구들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한국 미술사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은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창의 젊은 시절

이제창은 1886년 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태안(泰安) 이씨(李氏)이다. 태안 이씨는 현재 3천~4천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보기 드문 성씨이다. 그의 집안은 역관 출신의 중인이었으며, 개화기에 상당한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이제창은 1919년 24세 때 고희동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고려화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한다. 이제창이 발기인이었던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서양화가로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월회 창립 때의 이제창(오른쪽 네 번째)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제창은 1921년 26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그는 미술학교 재학 당시 그림보다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한국인 유학생 박승희·김복진·김기진 등과 함께 연극 단체 '토월회(土月會)'를 만든다. 이런 활동을 보면 이제창은 미술은 단지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같은 학교 선배, 동료였던 김찬영이나 조각가 김복진이 문학 전공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것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그는 1925년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중동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한다. 당시 고등보통학교는 주로 일본인 미술가들이 맡아 하고 있었는데, 전업 작가로서 생활이 되지 않았던 시절에 엘리트 화가들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직장 중의 하나였다. 그는 서촌 필운동에 살았는데, 김복진의 집 근처이자 이승만의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서양화가이면서도 사진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사진작가들과도 많은 교류를 한다. 1928년 9월에는 사진협회의 초대 강사로 나가 '인생과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그는 단순히 사진에 관심이 있는 수준이 아니라 이론에 밝은 전문가였다고 한다.
 
"시내 경성사진사 현회 연구부에서는 19일 오후 7시 반에 시내 서린동 애영(愛影)사진관에서 다음과 같은 연제와 연사로 강화회를 연다더라. 인생과 예술(이제창), 오일과 브롬오일(신낙균)"

1930년 이후로는 서양화와 함께 수묵화에도 관심을 둔다. 그는 서양화를 그릴 때에는 특별히 호를 쓰거나 하지 않았는데, 수묵화를 그리면서부터 호를 '석곡(石谷)'이라 하였다. 1942년에는 박광진, 김무삼, 구본웅, 이승만, 윤희순 등과 함께 <서양화가 수묵화전>이란 전시를 열기도 한다. 서양화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이 연 수묵화 전시회라 많은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이제창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당시 화단에서는 이제창에 대해 화가로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의 인간 됨됨이나 기행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활달한 성품을 보였는데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있다. 1931년에 발간된 잡지 「동광」 제21호에는 문학평론가 김문집(金文輯, 1907-?)이 '이하관(李下冠)'이란 필명으로 <조선화가 총평>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중 이제창에 대한 촌평 부분은 이제창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다변(多辯)한 씨(氏)다. 한 번은 종로 위에 있는 뾰족집을 그리러 갔다가 '이 집을 그리면 안 되오'라고 하는 관리인에게 씨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아니 그림이란 것은 이 집을 가만히 놔두고 그리는 것이지, 온통 떠가는 게 아닌데...' 씨는 미술이론에 들어서도 다변하기를 바란다. 요전 눈이 몹시 오던 날 밤에 자다 말고, 행길에 나와 그림을 그리다가 화구(畵具)를 눈구덩이에 들어 엎었다더니 다시 '에노구(물감 이름)'나 장만하셨는지?" 

사생 대상을 구하여 좋은 집을 찾았으나 주인이 거절하여 그리지 못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집 앞에서 화구를 펼치고 집안을 넘보듯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이 당시로서는 낯선 풍경이었을 것이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유머로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는 평소 언변이 좋으며 품성이 밝고 활발한 사람이었던 같다. 또한 눈 오는 날 밤 느닷없이 한 길에 나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강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1927년에는 세계무대에도 눈을 돌려 프랑스에서 열리는 살롱 도톤느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본상을 받는 등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화단에서 멀어지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1954년 1월 27일 세상을 떠난다. 특이하게도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날과 같은 날짜인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운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뜻하지 않은 화제

이제창은 1921년에 도쿄미술학교에 유학을 가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었을 때에는 작품을 출품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192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야 비로소 작품을 출품하여 수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1925년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5회에 거쳐 수상을 한다.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여(女)>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4등상을 수상하여, 처음 출품에 본상을 받는 성과를 이룬다. 이후 1927년 제6회에서는 <여(女)>로 입선을 하고, 1930년 제9회에서는 <풍경(風景)>, 1931년 제10회에서는 <정물(靜物)>로 입선하여 두 해 연속 입선하였으며, 1940년 제19회에서는 모란(牧丹)으로 입선을 하였다.

이 다섯 번의 입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상은 <여(女)>라는 작품을 처음 출품하여 4등상을 받은 1925년 제4회 전람회이다. 처음 출품하여 본상을 받는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론 나체화(누드화)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한 시대라 풍기문란으로 문제가 되어 사진 촬영이 금지되는 해프닝을 겪는다. 이제창의 작품은 평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작품성보다는 여인의 나체를 그린 파격적인 작품이라는데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어 이제창은 많은 관심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이제창 <여> ⓒ 황정수


전시회가 시작되자, 이 작품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아직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남아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인의 벗은 몸을 그린 나체화를 전시하는 것은 용인되기 어려웠다. 당시 언론은 이 작품이 전시회장의 한 곳에 전시는 할 수 있지만 사진으로 만들어 일반인에게 돌리는 것은 풍기를 문란케 할 염려가 있다하여 사진 촬영을 금지하였다고 전했다.
 
"나체화 촬영금지(裸體畵 撮影 禁止)

이제창씨의 나체화는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 금년 출품에는 이전보다 나체(裸體)의 작품이 극히 적은데, 서양화 중에 오직 한 점밖에 없는 이제창씨의 출품으로 4등에 입상된 여자의 나체화는 선전 당국에서 임검한 결과 미술품으로 다만 한 곳에 진열하여 두는 데는 관계가 없으되 그것을 사진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돌리는 것은 풍기 상 좋지 못하다 하여 사진촬영을 절대로 금지하였다더라."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창은 다음 해에도 여인의 나신을 그린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는데, 지난해처럼 사진촬영이 허락되지 않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평자들에 의해 지나칠 정도의 혹평을 받았다는 것이 본인에게는 더 충격이었다. 그는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자존심 강한 화가였는데, 이 혹평 탓으로 7, 8회 전람회에서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9회에서야 <풍경>이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931년 제10회 전람회에서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필치의 <정물>을 출품하여 두 해 연속 입선한다.

이제창은 이후 한동안 전람회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술에만 전념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은 1931년 이후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그림 그리는 일보다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그렇게 지내다 비교적 여유가 생긴 즈음에야 다시 작품을 한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이 1937년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그의 환경이 좋아져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40년이 되자 다시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모란>이란 제목의 작품을 출품한다. 9년만의 출품이었다. 

현전하는 이제창의 작품 몇 점

현재 남아 있는 이제창의 작품은 10여점 정도이다. 30여 년을 활동한 화가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적은 양이다. 더욱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수상한 작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할 만한 대작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행히 그의 조카뻘 되는 서양화가 행인 이승만이 그의 작품을 일부 소장하고 있던 것이 전승되어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가장 오래된 작품은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그린 1926년 작품 <자화상>이다. 당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는 졸업 작품으로 자화상을 제출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작품도 이제창이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제창 <자화상> ⓒ 황정수


<자화상>은 배경은 단색으로, 옷은 선묘로 간단히 처리하고, 얼굴 부분만 부각시켜 그린 반신상 형식의 그림이다. 얼굴의 묘사도 서양화법이 보여주는 구체적으로 섬세한 표현을 아끼지 않는 기법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붓을 사용하여 마치 소묘를 하듯이 자연스러운 화면을 구성하였다. 몇 번 안 되는 붓질로 그려낸 옷의 표현이 질감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묘사력을 보인다. 얼굴선의 묘사와 얼굴의 윤곽의 생동감 있는 표현, 머리카락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오랫동안 수련된 학습의 이력을 보여준다. 

현전하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은 <독서하는 여인>이다.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전통적인 여인이 신여성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독서하는 여인>은 유사한 도상이 두 점 전하는데, 두 점 모두 1937년에 그린 것으로 거의 같은 구도에 색감만을 달리한 것이다.      
           

(왼) 호암미술관 소장품 / (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 황정수

 
한 점은 호암미술관 소장으로 다홍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한 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으로 호암미술관 소장 작품과 비슷한 구도에 파란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책을 읽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두 작품 모두 4호(33×24cm) 크기의 소품이다. 

호암미술관 소장품은 붉은 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의자 등받이에 턱을 고이고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부드러운 필치에 주변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사생대상인 여인의 전신을 부각시킨 솜씨가 좋다. 노련한 붓놀림으로 자연스럽게 처리한 배경은 빛의 표현이나 원근의 처리가 자연스러워 작품의 품격을 높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호암미술관 소장품의 연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호암미술관 소장품이 붉은 색 치마를 입은 여인의 전신을 그린 것에 비해, 이 작품은 푸른 색 치마를 입은 연인의 반신을 그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작품을 이루어낸 의식은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현재 남아 있는 이제창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근래에 발굴된 이제창의 작품 <채석장>

근래에 이제창의 작품 한 점이 새롭게 발굴되었다. <채석장>이라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1962년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에 출품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시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양화가 이승만이 소장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이제창과는 같은 집안 출신으로 각별하게 지냈다. 특히 1920, 30년대 서촌 지역에서 주로 어울렸던 미술가들, 세칭 '옥동패'의 좌장 격이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의 손에 이제창의 작품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들은 전래 내력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이제창 <채석장> ⓒ 이제창


<채석장>은 일제강점기에 돌을 캐내는 채석장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4호 크기의 소품으로, 송판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그림 안쪽에는 가파른 돌 벽에서 채석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몸을 구부리고 팔을 펴며 돌을 캐는 사람들의 동작이 매우 역동적이다. 가까운 쪽에는 캐낸 돌을 정리하는 여섯 명 여인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려져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식민지 아래에서 신음하는 조선 민족의 고통을 연상케 한다. 전체적으로 흰색의 색감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땅과 벽을 표현한 밤색 계열의 흙빛은 당시 화가들이 추구했던 향토색을 드러내는 색조이다. 노동하는 피지배 민족의 삶을 표현한 것 또한 당시 화가들의 주된 표현 주제였던 식민지하의 '로칼리즘'의 표현으로 보인다. 

새로 발굴된 <채석장>은 이제창이 당시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가 유학 후 조국에 돌아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것은 경제적 여건과도 많은 관련이 있지만, 혹시 조국의 현실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채석장> 속의 인물들의 고단한 삶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더 많은 그의 작품이 발굴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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