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살인 판결문 108건 분석
취재
이주연, 이정환
조사
박지선, 이지혜, 한지연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 분석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2018고합112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2018고합OOO
"16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가 탔다.
내가 타고 있던 차에 불을 지른, 그였다. 같이 살던 집에 녹음기를 설치했던, 그였다. 차 블랙박스를 복원해 내 행적을 쫓던, 그였다. 한 달 전 마침내 정말로 헤어진 전 남자친구, 그였다.

오전 8시 44분부터 9시 26분까지. 그는 16층에서 내가 나오길 숨죽이고 기다렸다. 40분 동안 아파트 계단에 앉아 18층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겠지. 우리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겠지. 18층에서 내가 타는 걸 확인하고 허겁지겁 16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겠지.

그렇게 나를 기다린 그의 손에 20cm 칼이 들려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응징하겠다며 집요하게 문자 보내던 그가 내 눈앞에 있었다. 16층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시간이 억겁으로 느껴졌다. 누구라도 타길 간절히 빌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칼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의 차에 나를 밀어넣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거 같았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순간 외쳤다.
"살려주세요."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기어이 나의 목을 베었다. 봄날이 한창이던, 5월 11일이었다.

끝이구나. 해보자
오늘 그렇게 나간게 끝이라고 기대해라
넌 죽음. 집에 안 오면 끝인 줄 아는데 착각하지마
니 짐 가지고 가기 전엔 너 아직 내 여자야 짐 가지고 가
널 용서하고 깨끗하게 끝내려 했는데 넌 날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게 행동했어. 네가 살아있는 동안은 용서 못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응징한다. 넌 최고로 고통과 후회할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
네 인생 이렇게 끝이구나. 후회 없다.
넌 마지막 여자야 내 사랑을 모독했어. 용서가 없다. 기다려.

2018년 4월 13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와 살던 집에서 나왔다. 그의 연락을 피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던 그는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1년 반 가량 만난 그는 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사는 집을 알고 있다. 그는 내 차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직장을 알고 있다. 그는 내가 몇시에 출근해 몇시에 퇴근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친구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 그는 내 가족을 알고 있다. 내가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용서했다. 2017년 12월, 그가 나와 친구가 탄 차에 신나가 든 소주병 4개를 던졌을 때. 차 본네트에 불이 붙게 했을 때. 구속됐지만 곧 풀려날 그가 무서웠다. 내가 처벌을 원했다는 걸 안 그가 나중에 나를, 내 친구를, 내 가족을 해칠까 두려웠다. 불과 며칠 전, 나를 지켜달라고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했지만 그는 내 뒤를 밟았다. 차에 불을 질렀다. 나는 더 이상 보호를 기대할 곳이 없다.

그래서 법원에 선처를 호소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가 달라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그는 더 무서워졌다. 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더 폭력적이 됐고 더 강압적이 됐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죽이겠다며 나를 옭죄었고, 내 가족들을 위협했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죽었다.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로는 내 죽음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교제살인 피해자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이런 ‘나’가 너무 많다.

25세의 나,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그와 3달 만났다. 그가 내 휴대폰을 숨긴 걸 알고 헤어지자고 했다. 그는 내 앞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으며 자살하겠다고 했다. 내가 집에 가지못하게 막았다. 헤어지면 죽어버린다며 유서를 내 회사 사장님에게 보냈다. 무서웠다. 또 다시 헤어지자고 했다. 그가 내 직장 숙소 2층 창문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 3층 내 방에 침입했다. 나가라고 소리 지르자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죽었다.

35세의 나, 스포츠토토에까지 손을 대며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를 피해 지인 집에 머물렀다. 내가 연락이 되지 않자 내 친구에게 찾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내 집 창문을 깨고 집 안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경찰에 신고했다. 그 날 그의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의 부탁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그를 만나러 나갔다. 누차 헤어지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죽도록 팼다. 쓰러진 내 머리를 밟았다. 나는 죽었다.

50세의 나, 이미 10년 전 헤어진 그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운전하는 버스 차고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린 버스 안에서 한 시간만 대화하자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휘발유를 나에게 쏟아 부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피부 80%에 화염화상을 입었다. 나는 죽었다.

37세의 나, 물류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그와 한 달쯤 만났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 헤어지자고 했다. 3달 후부터 그가 찾아왔다. 수시로 집 앞으로 와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내가 퇴근하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다. 공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다른 남자와 사귀냐고 캐묻는 그와 함께 있기 싫어 집에 가려했다. 그가 가방 안에 있던 칼을 꺼내 보였다. 도망치려 하자 칼로 나를 찔렀다. 도망쳤던 그는 다시 돌아와 내 가방을 훔쳤다. 아직 살아있던 나를 발로 걷어찼다. 나는 죽었다.

그녀들은 잘못이 없다.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주거지, 연락처, 직장, 가족 및 친구관계, 생활 습관, 행동반경 등 모든 요소가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범행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피고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 및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하면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던 끝에 피해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2018고합OOO, 김정민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그들은 너무나 쉽게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곤 죽였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가장 친밀했던 남자친구에 의해 죽어간 여성은 무려 108명이었다. 열흘에 한 명 꼴로 죽었다.
맞아 죽었고 찔려 죽었고 목 졸려 죽었다.
그 참혹한 죽음에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걷어내기로 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교제살인이다.
<오마이뉴스>는 지금부터 우리 사회에 이 교제살인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판결문 108건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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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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