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 생존자 이야기 "그의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열한 번째 기사다. - 편집자 주


엄마는 서울 가는 딸에게 말했다. "아리야, 도도하게 살아. 기죽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당당하게 살라"고. 누군가에게 목을 졸린 채 엄마의 말을 떠올린 이아리는 "죄송해요 엄마,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라며 울고 있었다.
인스타툰(인스타그램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이다. 작가 '이아리(예명)' 자신이 실제 겪은 일이기도 하다. 목을 조른 사람은 그녀의 전 남자친구다.
"나를 '유리 같은 사람'이라며 조심스레 아낀 그는 그런 유리를 무참히 깨부쉈다가 다시금 그러모아 이어 붙이고 또 다시 깨뜨리기를 반복했다. 어긋난 채 붙은 유리는 세상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해 아주 작은 충격에도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첫 연애에서 그는 데이트폭력을 당했다. 이후 힘겹게 마침표를 찍은 연애를 그리기 시작했다. "데이트폭력 피해 생존자"의 이야기를 인스타에 올려 "피해 경험을 나누고자"했다. 그리고 수많은 생존자 '이아리'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인스타툰을 엮은 책에서 그는 스스로를 '길을 걷다 당신과 한 번쯤 마주쳤을지 모를 평범한 사람. 데이트폭력의 피해자. 그리고 그 경험을 만화로 그린 작가'로 설명하고 있다. 줄여 말하면 '보통 여자 사람'일 터다.
만화에서 그는 묻는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험상궂게 생겼을까 아니면 오히려 평범할까" 라고. 그는 답한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들끓었고 뛰어난 언변으로 쉽게 호감을 샀다, '나를 떼고 보면'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오마이뉴스>는 극단적 교제살인에까지 이를 수 있는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을 짚기 위해 '데이트폭력 피해 생존자' 이아리 작가와 서면 인터뷰를 총괄했다. 그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지난 책 첫 페이지에는 "다 이아리. 누구나 다 '이아리'가 될 수 있다"고 적혀있다. 그는 "데이트폭력 피해 생존자인 우리는, 수많은 선택들로 열심히 삶을 채워나가는 아주 보통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경찰은 말했다 “남자친구가 저러는 거, 당연하다고”
그는 데이트폭력의 범위에 대해 "데이트폭력은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는 등의 정서적 폭력)과 행동통제, 성적 학대까지 모두 포함한다"며 "연인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피해자도 초반에는 눈치 채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짚었다.
"질투가 난다는 이유로 연인의 인간관계를 억지로 끊어 내며 고립되게 만드는 것도 빈번하게 일어나요. '너는 너무 못나서 나 말고는 좋아해줄 사람 없어' 등 언어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갉아먹고, 자신이 한 실수까지도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 헤어지자고 말하면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 모두 감정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이에요. 원하지 않는 스킨십이나 성관계를 억지로 하는 것도, 신체 부위를 촬영하여 보내달라고 한 뒤 상대가 거절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성적 학대입니다."
가해자는 이아리의 옷차림을 단속했고, 주변과의 연락을 차단시켰다. 이후에는 폭언과 폭행도 가했다. 이별을 통보하자 그는 두 달 내내 집과 일터에 찾아오는 집착을 보였다. 이아리는 빌고 또 비는 가해자가 반성한다 생각해 용서했고, 그 끝은 경찰서였다. 방안이 아수라장이 됐고 휴대폰은 산산조각이 났다. 만화에서 경찰은 날뛰는 가해자를 두고 "남자친구가 저러는 거, 당연한 거예요. 자칫하면 빨간 줄 그어지게 생겼으니까"라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아리는 묻는다.
"연인이 아닌 타인이었어도, 경찰은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줬을까? 그를 고소했다면, 나는 과연 안전했을까? 아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조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우리 집에 찾아왔었으니까. 분명 내가 피해자인데 조서 쓴 기록이 남을 거라며 윽박지르고 우는 건 그 사람이었다...(중략)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내게 보복하는 건 아닐까... 하고." (책 <다 이아리> 113p~125p)
경찰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이 작가는 "피해자가 조서를 작성할 때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며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선처를 유도하지 말아 달라"며 "조사가 끝난 뒤에는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해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할 수 있다는 점과 스마트 워치(버튼을 누르면 인근 경찰서에 신고 접수되는 기계)에 대한 안내를 부탁드린다"라고 강조했다. '남자친구가 저러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가해자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현관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고, 담벼락을 타고 올라와 "문 열어"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이아리는 2차 신고를 했다. 출동한 경찰은 그를 돌려보냈다. 이 작가는 책에 "(경찰은) '그 남자 위험해 보인다'고 했지만, 경찰이 취할 수 있는 조처는 없었다"고 적었다. "가해자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법과 체계가 부재"하다고 했다.
"분명 경찰들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행 법 안에는 그를 '사전에' 막을 방법도, 현실적으로 나를 보호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막고 피하는 건 또 다시 나의 몫으로 남았다. (중략) 만약 운 좋게 그가 나를 놓친다면, 다음 피해자는 생기지 않는 걸까? 이 사람이 가면을 쓰고 당신에게, 당신의 가족에게 다가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피해자가 도망치는 것이, 가해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해결책인지 묻고 싶다." (책 <다 이아리> 188p~215p)
그의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이 작가는 휴대폰 번호도 수차례 바꾸고 이사도 했지만, 불안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내가 사는 곳도, 학교도, 고향 집도, 가족들도, 주변 지인과 친구들까지도 전부 다 알고 있는데. 소중한 사람들까지 다치게 하면 어쩌지?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의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정말 정말 행복해서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기를..." (책 <다 이아리> 226p~228p)
이 같은 공포를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그는 "데이트폭력 범죄는 일반 폭력사건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죗값을 받게끔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무거운 죗값이 필요하다고 밝힌 이유는 간단했다. '데이트폭력 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서 보복의 위험도도 높고, 아주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신체 뿐 아니라 내적인 외상도 크게 받으며, 피해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무거운 범죄"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및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중점으로 법이 만들어졌으면 한다"라며 "한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에 동의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피해자는 죄책감에 순간 망설이게 되는데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지 않으면 그런 문제는 없어지고 가해자는 응당한 죗값을 받게 될 것이다, (새로 만들어질 '데이트폭력 관련 법'에는) 반의사불벌죄를 적용 제외를 명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작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에 관해서도 법안이 생겨야 한다, 지금의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했을 때 과태료가 나올 뿐이지 실질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라며 "가해자가 접근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강력한 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아리가 건네는 위로 "당신의 소중한 선택들을 응원하겠습니다"
이 작가는 피해자를 향한 왜곡된 시선도 거둬주길 부탁했다.
그는 "피해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고 책임을 돌리는 2차 가해를 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라며 "실제로 겪어본 사람들은 데이트폭력은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주 서서히 피해자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천천히 감정과 내면을 갉아먹다가 나중에는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걸 안다"라고 전했다.
더불어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은 깊은 내상을 남겨서 그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항상 그 늪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라며 "그러니 피해자에게 왜 너는 피해자답지 못하냐고, 왜 다시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냐고, 수많은 '왜'를 갖다 붙이며 피해자를 어떤 프레임에 가두려고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가 인스타툰을 통해, 인터뷰를 통해 다른 피해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결국 하나였다. "네 탓이 아니"라는 위로다.
"아픈 기억들을 혼자 안고 오느라,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못할 일들을 담아 두느라 끙끙 앓아왔을 당신에게. 정말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끔찍한 기억은 아마 머릿속에서 다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흉터도 사라지지 않겠지만, 이제는 따스하고 행복한 기억들만 차곡차곡 쌓여서 그 위를 덮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는 날들보다 현재의 행복한 기운에 흠뻑 물드는 날들이 더 많아졌으면 해요. 저는 언제나 당신 편에 서있을 거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인데요, 당신이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순간과 소중한 선택들을 응원하겠습니다." ◆
발행일시 : 2020.11.23 07:1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마이뉴스
취재 이주연, 이정환
조사 이지혜, 박지선, 한지연
개발 이기종 / 디비서비스 디자인 이은영 / 웹기획 공명식 / 총괄 이종호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Designed and built by Studio Velcro
판결문 108건을 분석했다
[형량 분석] 죽도록 때렸지만... 살인 고의 없으면 5.4년
[인터뷰] 여성들이 느끼는 정의와 불의
[직무유기] 112 신고 후 48시간 안에 숨진 여성들
[살인의 전조] 19명은 살 수 있었다
[처벌불원] 그렇게 6명이 죽었다
[신고를 안하다] 그녀는 608호에 갇혀 있었다
[국가의 의무] 그를 풀어줘선 안 됐다
[합의금] 형량 23년 줄이는데 얼마 들었을까
[인터뷰] "일단 맞아야, 경찰은 여자를 지킬 수 있다"
이아리 작가가 건네고 싶었던 메세지는 결국 하나
10년 동안의 '여성 살해 보고서'
상해치사 8년, 살인 8년은 같은 숫자가 아니다
에필로그 : 피해자 달력
댓글3
댓글3
원고료로 응원하기
본문듣기 등록 2020.11.23 07:14 수정 2020.11.23 07:1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 독립편집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