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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통령 선거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다. 31년 만에 성립된 이회창·노무현 양강 대결구도는 그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특히 두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과 ‘북한 핵문제’ 등 정책대결로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어 지역대결 구도로 점철되었던 이전 선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 민주당 광주 북갑 지구당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이 이회창 후보의 선거벽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불침번을 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주빈
한나라당이 7일부터 12일까지 내놓은 논평들

그렇다고 지역대결을 부추기는 시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영남후보론’을 내세우며 영남지역 공략에 공을 들이자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평균 l일 1회 꼴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논평 등을 발표했다.

7일 황준동 한나라당 선대위 부대변인은 논평을 내서 “노란색 띠는 DJ가 '87년 후보단일화를 깨고 야권을 분열시켜 평민당을 창당했을 때 이용한 군중심리 자극물”이라고 규정한 뒤 “막대기에 노란색만 칠해놔도 호남에서는 당선된다는 힐난이 있을 정도로 지역감정 상징물이 노란색 띠”라며 ‘노란 색=DJ=호남’이라는 연상작용을 유도하며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이틀 뒤인 9일에는 조윤선 선대위 대변인이 박광태 광주시장의 부산 방문을 문제삼았다. 조 대변인은 “선거를 10여일 앞둔 시점에 현직단체장이 타 지역 기업인들을 만나 무엇을 논의했겠는가?”고 물으며 ‘관권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10일과 11일에는 이원형 원내대책실 부실장이 “호남지역의 벽보 훼손이 심각하다”며 ‘선거벽보’를 문제 삼고 나섰다. 광주지역에서 이회창 후보의 선전벽보만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1일에는 조윤선 선대위 대변인이 ‘군, 호남편중 너무나 심하다’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국방부 주요보직의 절반을 호남출신이 차지했다”고 비판했다.

12일은 한나라당의 지역대결 부추기기가 논평과 연설을 통해 동시에 이뤄진 날이다. 남경필 대변인은 ‘호남지역엔 유세 안갑니까?’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노무현 후보에게 “(호남을) 너무 믿어서 안가냐”며 계속해온 ‘호남, 민주당 몰표’주장을 은근히 이어갔다. 또 유흥수 부산 선대위원장은 이회창 후보가 참석한 한나라당 부산집회에서 “노 후보는 DJ가 내보낸 후보, 호남정권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했다.

반응하지 않는 민심, “지역감정 조장에 휘말릴 필요없다”

“선거벽보 훼손, 왜 광주만 문제 삼나?”
[인터뷰]최경주 민주당 중앙선대위 조직부본부장

▲ 최경주 조직부본부장
ⓒ오마이뉴스 이주빈
- 선거벽보 훼손방지 지침을 각 지구당에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 승패를 떠나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책동이다.

그런데 지난 11일 한나라당이 광주전남에서 이회창 후보의 벽보가 훼손되고 있다고 연 이틀 공세를 퍼부었다. 바로 확인해보니 몇몇 곳에서 이 후보뿐만이 아니라 다른 후보의 벽보도 훼손돼있었다.

우리는 이를 악용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본다. 그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 한나라당이 악용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선관위에 알아보니 광주에서 선거벽보가 훼손된 비율은 7%도 안된다. 이 수치는 다른 지역의 훼손비율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나라당은 광주와 전남을 문제 삼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야간순찰을 독려하는 것은 지나친 대응 아닌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번 벽보훼손 때도 확인했지만 누군가가 차량으로 이동하며 면도칼로 의도적으로 (훼손)했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답이 뻔한 거 아닌가.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지역감정을 조장해서는 안된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까지 각 지구당 공정감시단을 최대한 가동해 부도덕한 갈등조장 행위를 방지하겠다.” / 이주빈 기자
그러나 한나라당의 이같은 지역대결 조장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있는 듯 하다. 이는 12일 이후부터 발표된 한나라당의 각종 논평을 보면 알 수 있다. 13일부터 15일 오후 5시 현재까지 한나라당이 발표한 각종 논평은 35개.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대한 공격과 노·정 공조 비판, 북한 핵문제 해법 등이 주 내용이다.

행정수도 이전과 북한 핵문제라는 거대이슈가 지역대결 구도라는 낡은 선거구도를 잠식해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울러 한나라당의 거듭된 ‘유인’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은 호남의 반응’도 지역대결 구도를 희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다.

정치권의 지역대결 조장 논평이 연일 쏟아지고 있던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민주당시지부까지 일체 언급을 삼갔다. 괜한 지역색 자극에 유인돼서 구색을 맞춰줄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박광태 광주시장의 부산방문을 한나라당이 문제 삼던 지난 9일, 광주시청 관계자는 오마이뉴스 기자에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면서 “그런 거에 해명한답시고 말을 꺼내는 순간 한나라당의 의도에 휘말리는 꼴”이라고 무대응 이유를 밝혔다.

박미숙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간사도 “대응할 가치가 없으니까 관심도 안가진다”며 “(지역감정 선동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하면 될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같은 기류는 나이든 유권자에게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박현희(여·61)씨는 “옛날처럼 김대중이가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런 거(지역감정) 가질 이유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박씨는 “요즘 경상도도 보니까 많이 변한 것 같더라”면서 “이회창이든 노무현이든 누가 당선돼도 옛날 같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상대당 후보의 벽보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당원들이 불침번을 서고 있는 벽보 앞에서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동네 어린이들
ⓒ 오마이뉴스 이주빈
차분한 선거분위기…지역정가만 선거벽보로 신경전

광주전남을 비롯한 호남 유권자들이 97년 대선과는 달리 영남과 절박하게 대척점을 형성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광주전남의 선거 분위기는 느긋하다 못해 고요할 정도다. 수도권이나 충청권처럼 선거이슈의 한복판에 연루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정가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광주에서의 선거벽보 훼손문제를 거론한 직후인 지난 11일 이후부터 선거벽보를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돌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선거벽보 훼손 사례 등을 취합해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15일 저녁에 만난 채희철 민주당 광주 북갑 공명선거감시단장은 “3-4인 1조로 늦으면 새벽 4시까지 순찰을 돌고 있다”고 말했다. 채 단장은 “북갑 지역에서는 한나라당 주장처럼 이회창 후보의 벽보가 심하게 훼손된 곳은 없고 단지 김길수 호국당 후보의 이마에 낙서를 해놓은 사례는 몇 건 있었다”고 밝혔다.

채 단장은 “이제 사흘 정도 남았으니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 열심히 돌 것”이라며 “이회창 후보의 벽보와 한나라당 유세차량을 잘 지키는 것이 임무”라고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 구본구 한나라당 광주시선대위 조직본부장은 선거벽보 훼손 논란과 관련 “민주당이 ‘이회창 후보의 선거벽보가 훼손된 것은 한나라당 자작극’이라고 일부 언론에 밝혔는데 이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반박했다.

구 본부장은 “어느 당원이 자기당 후보의 홍보물을 훼손 하겠냐”고 반문하고 “언론을 이용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구 본부장은 또 “광주 북을 지역에서 훼손된 사례들을 취합해서 중앙 선대위에 보고했다”면서 “중앙당 차원에서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정지역을 자극하고 고립시켜서 정치적 이득을 챙긴 이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지역대결 조장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당선시킨 것은 전국 유권자의 붓뚜껑이었다. 15일 저녁, 상대당 후보의 벽보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동네 어린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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