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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의 세계최고층 빌딩 건설 발표로 초고층 빌딩에 대한 환경과 교통문제가 또 다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잠실 롯데월드의 야경.
ⓒ 롯데그룹

"나의 가장 큰 죄는 고층 건물을 지은 일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계획가이며 건축가였던 독시아테스(그리스)는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고백했다. 그는 왜 '죄'라고 여겼을까.

독시아테스는 고층건물이 도시 경관을 해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 사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높디높은 철근 콘크리트 건조물이 그동안 인간이 쌓아왔던 가치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재벌기업 가운데 하나인 롯데그룹이 깜짝 놀랄 만한 자료를 언론사에 배포했다. 내용은 서울 잠실의 제2 롯데월드 부지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112층 규모(555m)의 초대형 빌딩을 짓겠다는 것이다. 롯데쪽은 9월중으로 송파구에 이같은 내용을 담은 지구단위계획안을 낼 예정이다. 이미 허가난 36층 규모의 롯데월드의 설계를 변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환경단체와 일부 건축전문가 등은 현재 잠실일대의 아파트 재건축과 맞물려 롯데 건물까지 들어설 경우 사상 최악의 교통과 환경 파괴로 이어져 인간다운 삶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공군 등 군 당국도 항공기의 안전 비행을 위해 불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몇층요?

"몇층요?"

이 말부터 돌아왔다. 지난 11일 오전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잠실 롯데월드 건너편에서 이동식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아무개(48, 여)씨의 말이다.

간단한 음료수와 버스 표 등을 팔고 있는 그에게 112층 건물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는 아직 생소하다. 상상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언뜻 사람들이 저쪽에 큰 빌딩이 선다고 하던데, 112층이라구? 그게 얼마나 큰 거여?" 김씨는 되물어 왔다. 기자가 건너편 롯데호텔보다 너댓배 이상은 될 것이라고 하자, 눈이 동그라졌다.

"어마어마하겠네. 아니, 그러면 사람들도 많이 다니겠네. 근데 지금도 저렇게 차들이많아서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라며 말끝을 흐린다. 솔직히 그는 주변이 크게 바뀌면 혹시 자신의 가게가 철거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녹아 있다.

롯데월드 건너편 잠실 주공 5단지를 비롯해 인근 주민들도 이곳에 112층짜리 초대형 빌딩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에 아직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 롯데는 최근 잠실에 지상 112층(555m)의 세계최대규모 빌딩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빌딩 조감도.
ⓒ 롯데그룹
5단지 김정란(35, 주부)씨는 "제2 롯데월드 공사가 몇 년전부터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전 신문 보고 112층 빌딩을 짓는다고 해서 놀랬다"면서 "여기 아파트들도 재건축 한답시고 고층으로 올린다고 하는데 그런 큰 건물까지 들어오면, 글쎄 살기가 어떨지…"라며 걱정 섞인 투로 말했다.

바로 옆 공사현장은 의외로 조용하다. 세계 최고의 빌딩이 들어설 공사 현장답지 않게 덤프트럭이나 요란한 굴착기계 등의 소음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현장관계자는 "현재 건물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터파기'공사가 진행중"이라며 "진척도는 약 15%정도"라고 말했다. 112층 빌딩에 대해, 그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서 "현재 공사는기존 허가받은 규모대로 공사가 진행중이고 변경된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었다"며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80세 신격호의 꿈, 공사는 이미 시작됐다

'잠실 롯데월드'가 서울의 명물이 된지는 오래다. 그곳에 가면 하루라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롯데 호텔을 비롯해, 백화점, 그리고 동쪽 석촌호수 위에 떠있는 메직아일랜드 등 테마공원을 가진 롯데월드까지. 이곳에 들어서면 다른 곳으로 옮길 엄두도 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해마다 수 백만명의 인파가 몰려든다.

하지만 이곳이 올해로 나이 여든에 접어든 신격호 롯데 회장의 '꿈'은 아니다. 건너편 '제2롯데월드' 부지가 '꿈의 장소'다. 행정구역상 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신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겠다'는 꿈이 있다.

<월간조선> 2001년 1월 신년호에서 신 회장은 자신의 '꿈'을 자세히 내놓았다. 잡지는 "신 회장이 인터뷰 도중에 에펠탑을 닮은 높이 500m짜리 건물, 유럽풍의 유리성, 인공화산 등 환상의 세계가 그려진 설계도면을 보여주었다"고 적고 있다. 1년 8개월이 지난 지난달 말, 롯데쪽은 사실상 이 도면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신회장의 말이 이어진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 없지 않습니까. 세계 최고의 그 무엇이 있어야 외국사람들이 즐기러 올 것 아닙니까. 세계 최고 건물이란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좋은 광고 선전이 되지요. 무역센터도 될 수 있고 위락시설도 될 수 있는 그런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서울에서 그럴수 있는 자리로서 적합한 곳은 잠실이라고 봅니다."

사실 제2 롯데월드 건립은 이미 지난 1988년 1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롯데쪽은 서울시로부터 2만6550여평의 노른자위 땅을 819억원에 사들였다. 상업지역으로 잠실 부도심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의 땅값은 현재 평당 2500~35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땅값만 1조원이 훌쩍 넘는다.

이같은 노른자위 땅에 롯데는 당초 104층짜리 건물을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난 98년 서울비행장의 고도제한에 막혀 현재의 36층짜리로 건축허가를 받았다. 롯데쪽은 올해로 5년째 터파기 공사만을 해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초고층 빌딩 발표로 현재 진행중인 잠실 공사가 사실상 112층을 위한 공사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98년이후 만 4년동안 해온 공사치고는 진척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롯데쪽에서 일단 36층으로 건축허가를 받아놓고 고층 빌딩 건설을 위한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지난 2000년에는 송파구에서 롯데쪽에 공사 진척률이 매우 낮아 위장공사를 펴고 있다는 판단, 종합토지세를 크게 높여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사실상 수년동안 국내에서는 36층으로 여겨져왔던 제2 롯데월드가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최고 높이의 빌딩을 위한 공사가 진행돼 오고 있다는 것이다. 공사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 롯데 신격호 회장
ⓒ 롯데그룹
교통·환경 최악- 높이에 대한 환상보다 인간적인 건물을

이같은 신 회장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롯데의 야심찬 계획이 실제로 옮겨질 지는 아직 미지수다. 정부의 엄격한 교통과 환경영향 평가 등 각종 심의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주민을 비롯해 국방부 등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도 필수적으로 거쳐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직 뚜렷이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곳도 없다. 환경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건축전문가, 그리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냉담하다.

무엇보다 환경시민사회단체와 건축전문가들은 "경제와 개발, 상징의 논리로 인간다운 삶을 누릴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파괴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도시개혁센터 관계자는 "잠실네거리 일대는 서울에서도 최악의 교통혼잡을 보이는 곳 가운데 하나"라며 "현재의 교통량 등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 하루 24시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루고 있는 상황에서 112층 빌딩은 생각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경실련은 이어서, 인근 잠실 주공과 시영아파트 등의 재건축 추진으로 지역 전체가 고밀화되고 있는 추세에서 112층 건물이 가져올 교통량 증대, 조망권 침해 가능성 등 여러 문제들이 신중히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환경운동연합 김동현 사무국장(강동송파)은 "36층짜리 건물에 대한 교통 대책을 놓고 주민과 4년동안 실랑이를 해왔지만 아직 결정이 나지도 않았다"면서 "교통과 환경 등의 문제가 나올 것이 뻔한 상태에서 정부가 허가를 내준다면 주민들의 커다란 반발에 부닥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하대 구영민 교수(건축공학과)는 "왜 100층이 넘는 빌딩을 짓는가에 대한 답부터 해야한다"면서 "단순한 실용성과 경제성이외 해당 기업의 부(富)나 국가를 나타내는 상징에 더 큰 무게를 두고 빌딩 건설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어서 "고층빌딩에 대한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면서 "인구밀집과 자동차 등 교통량의 필연적인 증가는 기본이고, 이에 따른 비인간화된 환경에 대한 개선 대책부터 면밀하게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고 건물이 신축될 때 경제는 망한다고?

▲ 2001년 세계무역센타 붕괴 현장
"마천루가 들어선 곳에 파멸이 뒤따르고, 세계 최고 건물이 신축될 때 경제는 망한다?"

지난 99년 2월 이코노믹 리뷰지에 마천루건설과 경제침체의 함수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바 있다. '오만의 초고층-경제파멸의 신호(The height of Hubris-Skyscrapers mark economic bust)'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독일의 투자회사인 드레스너 클라인보르트 벤손사의 연구 결과를 담고 있다.

지난 100년간 경제, 금융위기는 마천루 건설과 상당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형빌딩의 역사를 보면 대체로 경기가 좋아질 때 공사를 시작해, 완공될 때쯤이면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뉴욕에 싱거빌딩(180m)과 메트로폴리탄생명빌딩(217m)이 세워지면서 세계최고 높이의 빌딩기록이 경신될 때인 1908, 1909년 사이 미국에는 금융 위기가 왔다. 또 1920년 후반 세계 대공황 때 크라이슬러빌딩(324m)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387m)이 세워졌다.

또 1972년 시작된 오일쇼크와 미국 경체 침체 때는 지난해 9·11 테러로 사라진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424m)와 시카고 시어스타워(449m)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난 97년 준공된 현존 최고의 빌딩인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타워(452m) 역시 공교롭게도 동남아시아 금융위기를 몰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어두운 구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건설공사로 인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상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사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1929년 대공항 이후 100만명의 실업자를 구제하고 미국의 경제부흥에 엄청난 공헌을 한 '후버댐(1931∼1935)',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은 '파나마운하(1914)',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1974)'등이 그 좋은 예다.

롯데 신격호 회장은 2006년까지 한국에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을 짓겠다고 공헌한 상태다. 과연 아직까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제2 롯데월드(555m)'가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지, 아니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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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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