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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장작더미 쌓인 듯, 차곡차곡 쌓여 있는 유골들.
ⓒ 김호경
6·25 전쟁 발발 직후 경남 마산 삼진 일대에서 경찰들이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뒤, 매장한 증거가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다 제15호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세상에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전쟁 발발 52년만에 유골이 발견된 곳은 마산 진전면 여양리 옥봉마을 소재 일명 '산태골'로 불리우는 산기슭의 20평 남짓한 고추밭.

고추밭 주인인 박모(56세)씨는 지난 4일 아침 8시 30분경, 수확을 위해 부인과 함께 찾았다가, 섬뜩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빨갛게 영근 고추 밑으로 허연 바가지와 함께, 나무토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새하얀 조각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던 것.

이를 본 박씨는 순간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들었던 "6·25 발발 직후, 산태골하고 도둑골에 보도연맹 연루자 200명을 총살해 집단으로 매장했다"는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박씨는 즉시 이 사실을 진전면사무소에 신고했고, 이를 계기로 어른들의 진한 막걸리 냄새와 함께 나돌던 '학살 집단 매장'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52년만에 햇빛 본 200여 피학살자 유골

▲ 진전면장과 마을 이장이 약식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 김호경
6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 유족회' 조현기 집행위원장과 함께 찾은 현장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토석과 함께 나뒹굴고 있는 유골은 '맺힌 한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니면 언젠가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서일까' 52년 전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깨끗한 상태였다. 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산사태 발생 지점은 마치 나무장작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 유골이 매장되어 있었다.

갓난아기 마저...'경악', '분노'

▲ 담배값만한 유골도 발견되어 갓난아기 마저 매장한 의혹을 갖게 한다.
ⓒ 김호경
특히 이날 발견된 유골중에는 갓난아기 것이 분명한 유골도 있어 현장을 찾은 취재진과 유가족 협회 관계자를 경악케 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아기가 죽으면 묻는 아기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으나, 유골이 삐죽이 나와 있는 매장 지점 외에는 산사태가 발생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학살 당시 함께 매장된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

조현기 집행위원장은 "거창 양민학살 유골 발굴 당시에도 초등학교 배지와 이름표가 발견된 적이 있다"며 "이곳에서도 등에 업힌 갓난아기와 함께 매장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산사태로 발견된 유골 7구는 이 마을 이장과 주민들에 의해 52년간 차가운 땅속에 있다 초가을 푸른하늘을 볼수 있었다.

전국을 고통의 도가니로 몬 태풍 '루사'가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준 호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풍 영향이 아니었다면 이 유골들은 영원히 소문과 구담으로만 남았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피학살자 대부분 진주서 끌려온 보도연맹 연루자

▲ 52년 동안 땅속에 묻혔던 유골을 수습하는 촌로.
ⓒ 김호경
이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6·25 발발 직후, 200여명 가량의 민간인을 태운 트럭 수십대가 여양리로 들어와 산태골과 도둑골 폐광에서 총살한 후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유가족회 조 집행위원장도 "당시 진주 교도소와 마산 교도소에서 끌려온 사람 2천여명이 마산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일대에 매장 당한 사실이 당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져 왔다"며 "다행히 이번 태풍으로 그 증거가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말했다.

조 집해위원장에 의하면 이곳 여양리 산태골과 도둑골 폐광에 200여명, 비실 폐광에 수 백여 명이 집단 매장되어 있다는 것.

학살현장서 살아나온 젊은이 다음날 총살당해

취재팀은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측과 함께 산태골과 도둑골 폐광에서 매장 부역을 했다는 박 모옹과 단독인터뷰 도중 충격적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경찰이 집단학살 장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사람을 체포해 그 다음날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총살해 매장했다는 것이다.

▲ 학살 당시 현장을 목격한 박진규(80세)옹이 피학살자 유족회 조현기 집행위원장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김호경
부인과 함께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옥담 마을 회관 도로 위에서 이번 태풍으로 쓰러진 논에서 가까스로 쓸어모은 이삭 정리를 하고 있던 박 옹을 만나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담았다.

-(유족회 조 집행위원장) 역사의 진실을 손주들에게 옛날 이야기 들려주시듯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 학살과 매장한 일자가 언제였습니까.
"38선이 무너진 직후였으니까 6월인가 7월촌가 그럴거야. 당시 장마 때라 비가 억수로 왔지 아마."

-(우리뉴스 기자)총살은 어디서 했습니까.
"매장된 산태골과 도둑골에서 했다. 군복을 입은 경찰(당시 전투경찰은 군복을 착용했음)이 총으로 사살한 뒤, 마을 구장과 지서를 찾아 매장 지시를 하고 사라졌다."

-학살된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오는 것을 목격했는지요.
"추럭 4대가 왔다. 트럭 한복판에 사람들을 몰아 넣고 총을 든 경찰이 양쪽에 지켜서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일어서라고 말을 했는데, 못 일어서자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사정없이 갈기더라."

-왜 못 일어섰는지요.
"가까스로 일어선 것을 보니 밧줄로 굴비 엮듯이 묶어 놓았더라. 그러니 일어설 수가 있었겠나."

-경찰이 그 사람들을 끌고 온 게 몇시쯤이었고, 몇 명이었습니까.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였고, 사람 수는 경찰 말에 의하면 200명이라고 하더라."

-어디서 끌려 온 사람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뒤에 들은 얘긴데, 진주서 왔다고 하더라."

-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흠. 3명이 살아다는데, 한 사람은 내가 확실히 안다."

▲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다시 붙잡혀 총살당한 유모씨가 매장된 장소.
ⓒ 김호경
-좀 상세히 설명해 주시죠.
"산태골과 도둑골 폐광에 매장한 그날 저녁쯤이었을 거야. 시체더미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여항초등학교 옆집에 숨어들었다가 주민들이 신고해서 잡혔지. 그리고 그 다음날 도둑골 폐광 밑에서 총살당했고 내가 흙을 덮어줬지."

-어르신이 현장에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요.
"매장한 다음날 점심때쯤 지서 순경이 점심을 준비해서 도둑골 폐광 밑으로 가져오라고 해서 갔지. 가보니 그 사람이 있더라. 기골이 장대한 20대 후반쯤으로 보였지. 순경이 하는 말이 곧 죽을 사람인데 밥을 안먹여 보낼 수 있나 그래서 밥을 시켰다고 하데. 그런데 그 젊은 양반 참 대단하더구먼."

-'젊은 사람이 대단했었다'고 기억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곧 죽을건데 밥이 넘어 가겠소. 그런데 그 사람은 밥 한 그릇 꿀먹 듯 먹더라고. 그리고 순경이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고 물으니 '내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100년 이내 나와 함께 땅으로 들어갈 인민들이 불쌍하며 집에서 못죽고 객사한 것이 억울할 뿐'이라며 '나는 3대 독자니 얼굴엔 총을 쏘지 말라'고 부탁까지 하고서는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를 3번 외치고는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에 엎드렸고, 순경이 발포하자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지."

-그 젊은 사람과 순경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참!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성이 '유(柳)씨'고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다고 하더라. 총살한 순경은 노 순경이라고 지금도 살아 있을 거다."

-혹시 끌려온 사람중에 여자나 어린 아기가 있었는지요.
"글쎄. 나는 못봤다. 내가 본 사람은 주로 건장한 남자였다."

-혹시 그날 이후, 유가족들이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 지요.
"전쟁 끝나고 2년인가 3년인가 지난 뒤, 부녀자들이 찾아와 매장 부근에서 술을 치고 대성통곡을 했지. 한 2년 전인가도 그 사람들이 왔지 아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온-오프라인 우리뉴스(http://www.urinews.com)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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