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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측은 17일 새벽 3시 20분경 서울시내 보급소직원 등 200여 명을 동원, 실력행사를 했다.

농성 6일째 정부와 경영주에 항의하여 투쟁을 계속해오던 기자 및 사원들은 새벽 5시 전에 모두 쫓겨났다. 해가 아직 뜨기 전의 어둠 속에서 기자들은 흐느껴 울면서 사외로 나왔다.

천관우 씨 등이 그들을 끌어안듯이 맞아주었다. 그 뒤 그들은 '몸은 비록 회사를 떠났어도 자유언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사히신문, 1975년3월17일)

ⓒ 오마이뉴스 손병관
얼음장같은 침묵이 강요되던 유신독재의 절정기에 터져나온 동아일보 기자들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1974년)은 이듬해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방송 PD, 아나운서 등 자사 직원 114명의 강제 해직으로 귀결됐다.

비판적인 언론인들의 해직에 맞서 본사에서 제작 거부 농성에 가담했던 사원들은 강제해산 다음날인 3월18일 신문회관에 모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www.donga1024.or.kr)를 결성했다.

동아투위가 결성 37주년을 맞아 펴낸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갈 거야!>(월간 말 펴냄)는 10.24 선언에서 동아투위 결성에 이르렀던 과정, 그리고 비판적 언론인들의 해직 후 '정상화'된 동아일보가 유신, 5,6공권력과 유착한 내력들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동아투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7명의 글들로 구성된 책은 다양한 주제를 여러 가지 형식으로 담은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지만, 정작 이 책의 백미는 본문 곳곳에 소개된 당시 독자들의 격려광고이다.

동아일보 기자 200여 명이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를 가진 지 두 달여만에 박정희 정권의 압력을 받은 광고주들이 무더기로 동아일보 광고를 해약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광고해약 사태는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공보처의 발뺌에 대해 뉴욕타임스가 '귀신과의 싸움'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던, 동아일보의 경영 위기는 놀라운 기적으로 이어졌다.

국민들의 뜨거운 격려와 지원의 글이 기업체의 광고가 빠져나간 하얀 지면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원로언론인 홍종인 씨가 1974년 12월30일자에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사에 실려야 할 신문 광고에 대한 강제 해약은 일시적으로는 어떤 힘의 작용으로 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감히 해서도 안될 심히 위험한 권력 자신의 자해 행위"라고 경고했다.

이듬해부터는 신민당과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격려광고가 이어졌고, 1월7일부터는 일반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본격적으로 게재됐다. 하루 350건씩 약 5만 건이 폭주한 격려 광고는 5월8일 아무 설명 없이 지면에서 사라지고, 닷새 후 정부는 이른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책제목으로도 차용된 "동아! 너마저 무릎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라는 이대생 명의의 격려광고(1975년1월18일)는 당시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절절한 기대를 표현했고, 이에 대해 '마산에서 13인의 一女, 小丈夫들 일동' 명의의 광고(1975년2월5일)가 "동아가 쓰러지면 진짜 이민갈 거라는 아가씨에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거라고 전해주고 싶습니다"라는 화답 광고를 내기도 했다. "재벌의 아내였다면 좀더 큰 지면을 샀을 텐데"(1975년2월8일)라는 '전남여고 7회 4인' 명의 광고는 점심값 등의 쌈지돈을 털어 광고비를 보낸 서민들의 바람을 담고 있다.

책에 소개된 격려 광고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명사들의 이름도 눈에 띈다. 당시 가택 연금 상태에서 정치 활동이 제한된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동아를 지킵시다"(1975년3월8일)라는 광고를 냈고, 고 문익환 목사가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기 위해 자신의 첫 논설집 출판을 서두르기도 했다. 친일파 논쟁 속에 얼마 전 타계한 시인 서정주도 병상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1975년1월13일)라는 짧은 제목의 광고를 실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와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의 대량해직이라는 타협점에 도달했고, 75년 7월 중순경 광고해약 사태도 해결됐다. 75년4월18일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언론 자유 수호의 실천'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국제신문발행인협회로부터 언론자유 황금펜상을 수여받기도 했지만, 영광의 순간에도 해직언론인들의 수난은 계속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이후 자유언론실천선언과 백지 광고 사태를 자사의 언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추켜세웠지만, 정작 선봉에 섰다가 핍박당한 해직언론인들의 고통은 애써 외면했다.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해직언론인들은 해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거리 시무식'을 갖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대량해직 사태 이후 안종필, 이부영, 김종철, 성유보, 이태호, 임채정, 정연주 등의 기자들이 줄줄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동아방송의 한 아나운서는 신원조회 지연으로 출국이 저지돼 미국에 거주하는 배우자가 죽은 지 1년 반만에 출국하기도 했다.

18일 저녁 7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창립 27주년 기념식 겸 출판기념회를 가지는 동아투위(위원장 조성숙)는 그 동안 정부로부터 동아투위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받는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지만, 대량해직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해직자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동아일보와 여전히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25주년을 맞은 지난 99년 발표한 성명서에서 "25년 전 오늘, 동아일보 편집국에 메아리쳤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아직도 역사에 멍에처럼 남아 있는 불행했던 과거의 상처가 하루 빨리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성유보 씨는 책에 실린 '자유언론실천운동과 언론의 과제'라는 글에서 "총칼로 민주헌정을 전복하려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할 경우 한국의 언론사주들은 자신의 운명을 걸고 맞서 싸울 자세가 되어 있는가? 기자들은 국민의 편에 서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세로 충실하게 취재보도를 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동아일보의 현주소는 업계 매출 3위로의 위상 추락과 김병관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이 세금 포탈 및 회사 공금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징역 3년6개월 및 벌금 45억 원)를 선고받은 것으로 상징된다.

"동아! 너 삐딱하면 알지", "동아야, 배부른 부자유보다는 배고픈 자유가 더 가치 있다"라는 독자들의 일갈에 기자들의 대량해직으로 화답한 동아일보. 내달 6일로 '82세 생일'을 맞이하지만, 동아일보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 광고 탄압 · 격려광고 · 동아투위
동아일보 격려광고의 사회적 의미 - 임동욱(광주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동아일보 광고탄압 해제와 경영진의 변절 - 주동황(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자유언론실천, 그 격동과 시련 - 이태호(동아투위 위원)

2부 - 동아를 통해 본 한국언론의 어제와 오늘
박정희 정권의 언론정책과 동아 광고통제 - 김진홍(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동아! 너는 그때 무엇을 했는가 - 정정일(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신문모니터위원회 회원)
자유언론실천운동과 언론의 과제 - 성유보(사단법인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3부 - 동아투위를 기억하며
그때의 흥분 아직도 생생 - 홍건표(AP통신 동경 특파원)

일본에서 온 편지
일본 시민들의 동아일보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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