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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영화라면...김지우 삶의 세 장면

# 1 하얀 교복 적시던 붉은 코피

때: 1980년 가을 전주 기전여고
주연: 김지우. 김환생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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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지우.
ⓒ홍성식
80년 서울의 봄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해 가을 열린 전라북도 전주에서의 전국체전. 전주의 여고생들이 모두 동원돼 '매스 게임'을 펼친다. 열 일곱 소녀들의 영혼은 자유로웠지만, 아무도 '이런 파쇼적인 행사는 싫어요'라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 '매스 게임'이 가상했던지 체전을 관람한 전두환이 전주 여고생 모두에게 만년필 한 자루씩을 하사(?)한다. 만인지상에 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의 선물. 교사들은 감동하는 척이라도 안 할 수 없다. 기전여고 2학년 김지우가 지목된다. "전주의 여고생 대표로 네가 대통령 각하께 감사하다는 편지를 써라."

바로 그 봄에 있었던 광주에서의 참극을 선배들을 입을 통해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던 이 맹랑한 꼬마소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한다. "저는 전두환 씨에게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 이런, '각하'께 '씨'라니. 게다가 '감사할 게 없다'니. 어느 선생님의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소녀의 뺨을 올려붙인다. 하얀 교복으로 떨어지는 붉은 코피.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교내 백일장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경희대'와 '동국대' 등 각 대학의 고교생 대상 백일장을 휩쓸던, 교사들에 의해 기전여고 선배인 <혼불>의 최명희에 곧잘 비견되던 이 어린 소녀 '김지우'는 결심한다. "학살자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나 쓰게 만든 소설 따위를 다시는 쓰지 않겠다."

저물 무렵. 김지우를 딸인 양 아끼던 문예반 지도교사 김환생이 울고 있는 소녀를 불렀다. "지우야 미안하다. 다 우리가 못난 탓이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리를 이해해라." (암전).

# 2 트럭에서 수박을 던지던 그 해맑던 청년

때: 1999년 4월
주연: 김지우. 수박농사 짓는 청년

금융회사에 나가던 남편은 결혼 8년만에 명예퇴직 했다. 여의도 집을 경매로 넘기고 쫓기듯 옮겨온 경기도 일산. 저녁 찬거리를 사러 주엽역 인근의 시장으로 향하던 김지우는 보았다. 자기가 직접 기른 수박을 트럭에 싣고 와 도매상에 넘기며 햇살처럼 밝게 웃는 농사꾼 청년을.

김지우는 생각했다. '아, 내가 바랬던 삶이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니었던가. 꼭 자신이 쏟아넣은 노동만큼만 아름다워지는 삶.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데, 왜 나는 그렇게 안락한 삶에만 골몰했던가? 이제 나도 저 청년처럼 웃고 싶다. 그러려면...'

바로 그 다음날 그녀는 일산문화학교 소설반에 등록한다. 애꿎은 글재주가 감수성 예민한 소녀의 교복을 코피로 물들게 했던 그때로부터 꼭 19년. 김지우는 다시 소설이 가진 매력에 홀린 듯 빨려든다. 여고시절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를 읽고는 가지기 시작했던 소설에 대한 경외감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넉 달. 김지우는 모 신문사 신춘문예 본심에까지 오른다. 숨겨두었을망정 포기하지는 못했던 문학에의 열정은 19년간의 긴 절필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암전).

# 3 <창작과비평>에서 걸려온 전화...이제 소설은 내 희망

때: 2000년 9월
주연: 김지우. 현기영(소설가). 최원식(평론가).

소설을 재개한 지 여덟 달만에 쓴 <눈길>.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은 요사이 독자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좀더 여성적 시각을 가지고 써봐라"며 투고를 말렸다. 누군가는 "요새 잘 나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무국적의 애매모호함을 사용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집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지우가 굽힐 리 없었다. "만약 그렇게 쓸 거라면 안 쓰겠어요."

발표 예정일이던 9월25일까지 연락이 없었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남편이 그녀를 달랬다. "네 신념을 믿고 쓴 작품이잖아. 이틀만 더 기다려보자."

87년 결혼 이후 민중문학과 민중미술과 운동권노래만을 최고로 알던 그녀에게 순수문학과 유럽의 현대미술과 클래식음악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남편이었다. 술 때문에 무던히 김지우를 애간장을 태웠지만 함께 한 12년의 세월에 애증(愛憎)의 교차는 당연지사.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웬수'인 남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9월27일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합니다." 1980년 가을로부터 2000년 가을까지.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문학이 다시금 김지우의 '희망'으로 귀환하던 순간이었다.

심사위원이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현기영과 평론가 최원식은 "농촌정서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능수능란하게 구사되는 남도 사투리의 구수한 맛과, 토속어에 실려 교류되는 밑바닥 인생들의 풋풋한 인심 묘사는 이 작품을 함께 투고된 다른 어떤 것들보다 돋보이게 하는 힘이다"며 <눈길>을 평해 김지우의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암전).

38살에 나이트클럽을 처음 간 여자...김지우가 생각하는 문학은

11월7일 인터뷰가 있기 전까지 기자는 김지우를 그저 서른 여덟 나이가 돼서야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을 가본 순진한 아줌마 소설가 정도로, 올 봄 '박정희기념관 건립반대 문인 1인 시위'에 김지하와 이경자를 격려하러 시청 앞으로 나와 "(박정희기념관 건립 계획은)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아직도 80년대의 심경으로 살아가는 기이한(?) 386세대 정도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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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가지지 못하고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집' 한 채...
ⓒ홍성식

그러나, 인터뷰가 있은 그날 밤과 다음 날 그녀의 소설 3편을 몰아 읽고는 깨달았다. 김지우란 사람은 '삶'과 '작품'이 같은 길을 달리는 이 시대 보기 드문 작가란 걸. 그녀 문학의 핵심어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가없는 '연민'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연유하는 '휴머니즘'. 김지우가 말한다.

"어릴 땐 엄마가 시장에 데리고 다니질 않으려고 했어요. 때묻은 수건을 머리에 맨 좌판 할머니만 보면 '엄마, 저 할머니 물건 다 사줘'라며 떼를 썼대요.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나만 예쁜 옷 입고 자가용 타고 다니는 게 막연하나마 미안했던 것 같아요. 그 버릇은 여전해요. 요새도 시장가면(웃음)... 이제 시작하는 작가로서 건방진 얘기 같지만 내 소설도 그래야 한다고 믿어요. 주변에 산재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스스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그려내고 싶어요. '집'을 가지지 못하고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집' 한 채 지어주는 것. 그들이 잃었던 희망을 돌려주는 것. 그게 문학의 역할 아닐까요?"

그런 까닭에서였을까. 김지우의 두 번째 작품 <물고기들의 집>(<작가> 2001년 여름호 수록)에서 "약에다 소금 쳐달라는 년은 시상천지에 너 밲이 없을 거다. 그냥 마셔. 눈 딱 감고"라고 며느리를 책하는 시어머니의 욕설 섞인 대사에서도, 세 번째 작품 <디데이 전날>(<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 수록 예정)에서 감옥에서 출옥할 아들의 장사밑천을 대주려고 자신의 팔을 부러뜨려 달라는 칠순 자해공갈단 노인의 "자네가 기러믄 내레 내일 죽는 길밖에 없어야 야...이 보라우 내레 죽는 꼴을 보가서?"라는 갈라진 외침에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이 읽힌 것은. 그렇다. 가난하다고 피붙이에 대한 사랑을 모르겠는가? 소외됐다고 삶마저 내칠 수야 있겠는가?

고집과 자존심, 스스로 만족하는 소설 쓸 터

일견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도 입말의 능란한 구사와 또래 작가들과 변별되는 질박한 문장의 사용이라는 형식만으론 김지우의 소설을 규정하지 못한다. 접근하려는 주제와 사용하는 소재, 등장인물까지도 이전의 30대 작가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김지우의 소설.

일단 그녀의 소설엔 '오피스텔' '혼자 사는 전문직 여성' '컴퓨터로 사이버섹스를 벌이는 연인' '현란한 도시의 네온사인' 등 90년대 이후 범람해온 '사소설'의 주요 요소들이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다. 그 요소들도 분명 한 시대를 대표하는 코드이기는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등단작을 포함한 세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여지는 '가난한 자들이 가꾸어 가는 희망'이란 주제의식은 그녀의 고집스러움과 문학에 대해 품고있는 경외감과 자존심을 읽게 해주는 동시에 향후 김지우의 작업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그녀의 자존심과 고집을 보여주는 일화가 둘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들이 자꾸 '그 거 엄마가 써준 거 맞지?'라며 절 의심하는 거예요.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상장을 찢어버렸어요. 의심받는 건 싫었거든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80년이었죠. 광주항쟁이 있은 다음 주에 학교에다 대자보를 써 붙였어요. 나중에 발각이 나서 결국은 아무 것도 못했지만. 절 아끼던 선생님이 불러 '대자보 안 썼다고 그래라. 안 그러면 퇴학될 거야'라더군요. 근데 그게 너무 비겁해 보였어요. 끝까지 '내가 썼다'고 고집을 세웠죠."

82년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다'라는 자존심과 '혼자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이 가치 있다'는 곧은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눈만 뜨면 최루탄이 터지고, 전투경찰의 진압봉이 대학 안에서도 휘둘러지던 시절. 김지우는 이 아픈 현실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전주 팔복동에 차려진 '한바라'라는 야학의 교사로도 일했고, 민중불교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군사독재의 실체를 알고서도 침묵하는 것은 청년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고, 후배들까지 이런 고통 속에서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전두환 방일반대 시위 때 끌려가던 친구들과, 농촌봉사 활동을 가면 길을 막아서며 '빨갱이들아, 우리 마을에서 나가라'고 고함치던 이장님이 아직도 기억나요.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불행하고 아픈 시절이었죠."

젊은 시절 책읽기에서도 김지우의 고집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가 애착을 가졌던 작가는 송기숙, 현기영, 조정래, 김남주, 김하기, 방현석, 정도상 등이다. 한 사람 빠짐없이 언필칭 '사실주의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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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후일담소설과 사소설이 등장하고부터는..."
ⓒ홍성식
"90년대 후일담소설과 사소설이 등장하고부터는 책을 별로 읽질 않았어요. 다 읽고 난 후에 밀려오는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라는 허무감을 견디기가 힘들었거든요. 요샌 어떤 걸 읽냐고요? 여전히 같아요(웃음). 송기숙의 투철한 작가의식과 현기영의 탁월한 문학성은 아직도 내 문학의 채찍이죠. 김남주의 시들도 마찬가지고. 최근엔 이승우도 좋아졌어요."

"그래서 그 지독한 고집스러움을 재료로 어떤 소설을 쓸 거냐"고 물었다.

"대학 3학년 때 농활을 갔었어요. 뻘논에서 모내기를 하는데 힘이 없는 탓인지 한 걸음도 옮겨놓을 수가 없었어요.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니 나가라고 그러더군요. 나와서 못줄을 잡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동네 청년이 묻더군요. '재밌어요?' 웃으며 답했죠. '네 재밌어요.' 돌아온 대답이 내 가슴을 철렁 내려 앉히더군요. '당신에겐 재밌는 놀이지만 우리한텐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말..."

"머리로만 이해하던 농민의 삶과 농민문학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이었는지 알았죠. 어떤 소설을 쓸 거냐구요? 바로 그 청년의 이야기요. 인간과 땅, 인간과 세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부조리를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여전히 척박한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는 내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소설말이에요."

몇 가지 남은 이야기들

엄마를 닮아서일까. 김지우의 딸 백록담(11세)도 글을 곧잘 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파주 '보광사'에 가서는 "무너지는 강물, 무너지는 바람, 무너지는 하늘, 무너지는 가슴"이라는 말로 김지우를 놀라게 하더니 작년엔 문광부와 여성부가 주최한 <남녀평등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이 어린 딸은 엄마처럼 문학 외적인 이유로 문학에 절망하지 않기를.

김지우는 한국사회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젊은 사람들이 너무 자기애에만 매몰돼 있어 안타까워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꾸준히 생겨날 거고,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휴머니즘은 존재하겠죠.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은 바로 이 '사람에 대한 사랑' 아닐까요?"

지난 해 봄 설거지하다 깨먹은 찻잔을 사러 시장엘 간 적이 있다. 마포 아현시장 초입에서 병아리를 팔던 할머니. 열 살이나 먹었을까. 하얀 얼굴의 계집아이가 병아리가 아닌 주름진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엄마, 할머니 불쌍해. 이거 사 줘"라고 젊은 여자의 치맛단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고집스런 휴머니스트' 김지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3호선에서 기자는 문득 그 봄날을 다시 떠올렸다. 연민과 사랑은 어떻게 틀린가?

그러니 그대여 "내가 죽으면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와 신중현의 '노래 테잎'을 함께 묻어다오"라는 말은 한참 뒤로 미루고, 지금은 선천적이라 할 당신의 연민과 사랑으로 '집'없는 '길' 위의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을 소설을 써주길. 그래주길. 20년 세월을 뛰어넘어 끝끝내 소설로 돌아온 고집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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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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