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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


내 편지는 언제나 당신을 향하게 되는군요.
당신에겐 어쩌면 모질고 잔인한 일일 수도 있는데, 지난 10년의 정 때문인가요, 당신이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인가요? 결국은 다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마네요.

금요일 새벽 4시, 비라도 내릴 것처럼 낮게 하늘이 내려앉은 서울을 빠져 나와 남쪽으로 달려 왔습니다. 더디게 오고 있는 봄을 기다리다 못해, 그를 만나기 위해 남도로 내려왔지요.

해마다 3월이면 노란 산수유 꽃이 온 마을을 덮는다는 구례군 산동면에 들렀더니 산수유는 아직 일러 피지 않았더군요. 섬진강을 끼고 돌아 승주 선암사에 들러 대웅전 뒤편으로 막 몸을 푼 어린 매화꽃을 보고,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를 거쳐, 남해 금산으로 왔습니다.
산장에 짐을 풀고, 바위에 기대어 앉아 몇 점의 불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내려보고 있다 문득 당신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1월이었나요? 내가 당신에게 전화를 해 울던 날.
당신은 퇴근 후 바로 나를 만나러 와 주었지요. 언제나 내가 힘들 때는 달려와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다시 깨달아야 했지요.
어쩌면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여전한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당신을 불러 실패한 사랑을 이야기하다니...

ⓒ 김남희
돌이켜보면, 지난 두 달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새삼 아득해져 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 사람의 마음 역시 변하는 거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갔던 시간이었지요.
짧았던 사랑을 떠나보내고, 저리는 통증을 참느라 가슴을 움켜쥐고 웅크려 있던 날들이었습니다.

사랑은 내게 가을날 짧은 햇살처럼 왔다가, 모든 것을 쓸어버린 후 지나가는 여름날 폭풍우처럼 가버렸네요.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빠르게 달아오르고 식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는 걸 나의 얘기로 아프게 확인해야 했지요.
지난 두 달간 내가 가장 열심히 들었던, 들을 때마다 눈물 흘리곤 했던 노래가 지오디의 "왜"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웃을까요?

지난 번 당신을 인사동에서 만나 술 한 잔을 나눌 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라고 묻는 내게 당신이 그랬지요.
"스스로를 되찾고 싶다면 준비해 온 여행을 떠나고,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다면 여기 남아 그를 기다려야겠지"라고.

그날.
떠난 사람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를 보며, 당신은 마음 아파했지요. 그때 당신이 했던 말들 중에 내 가슴을 쳤던 말.
"겨우 그런 놈 만나려고 날 버리고 갔니?"

그래요.
제 상황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겁한 놈이라고,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내 편을 들어주었지요. 그런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는 행동들을 그가 내게 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를 원망하기도 했구요.
아무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두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결국은 서로를 더 힘들게 한 그를 미워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그를 떠나지 못하게 잡았던 건 다름 아닌 나였고, 어쩌면 그는 나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는 걸...

ⓒ 김남희


당신, 지금 마음이 끌리는 누군가가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 당신도 알겠지요.
살면서 마음대로 안 되는 것 하나가 어딘가로 쏠리는 마음 다잡는 일이라는 걸.
내가 그를 향한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한 것처럼, 그도 다른 사람을 향한 그의 마음을 어쩌지 못한 것일 뿐이겠지요.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기 때문인가요?
그래서 나도 똑같은 상처와 고통을 겪는 거라고, 어느 날 당신에게 전화를 해 "나... 벌 받나봐"라고 울먹였지요.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제게는 처음이었습니다.
나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 일은.

당신이 아는 것처럼 언제나 나를 중심에 놓고 살아왔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그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내 꿈과 희망, 욕심까지도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영화나 소설 속, 혹은 현실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헤어져 줄 것을 요구하는 데도 그를 놓아주지 못하는 여자들을 접할 때면 "빈 껍데기를 끌어안고 뭐하는 바보같은 짓이야?"라고 중얼거리며 그녀들의 삶을 비웃곤 했습니다.

ⓒ 김남희


하지만 이제는 그 마음들을 알 것 같습니다.
비록 마음 떠난 빈 몸일지라도, 그 빈 껍데기마저 보내야 한다면 마지막 선택은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내가 겪고난 후에야 알아버린 거지요.

그를 사랑하니까 그가 가고픈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향해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면,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모든 다짐들은 사라져 버리고,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끔씩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욕심이었던가요?

사랑은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거라는 것을, 그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하지 못했지요.
당신이 내게 했던 그 일들을 저는 하지 못했던 거지요.

ⓒ 김남희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고, 아직 가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 하는 당신의 여자친구 얘기를 하며 당신이 그랬잖아요. 나와의 실패한 사랑때문에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밀어주고 지켜볼 거라고.

이제야 말하지만, 실패를 겪고도 그 실패로 인해 꼬이거나 모나지 않은 당신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내게 인생의 큰 스승입니다.

그가 책임감과 연민, 동정심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로 내 곁에 머무르고 있던 그때.
날마다 거짓말이 늘어가고, 점점 잔인해져 가는 그를 보면서도, 그 감정의 찌꺼기에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당신은 이해할까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견디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그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던 날들...

그 길었던 싸움터에서 결국 패배하고, 그 패배를 인정하고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건, 보지 않았으면 나았을 그의 면들을 다 보아 버린 후였지요.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 본 후라, 더 이상은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제서야 체념이 되더군요.

이렇게 될까봐 사람의 마음 따윈 믿지 않으려 했는데...
누구에게도 마음의 문 열지 않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간결하고 단순하게 혼자 가고 싶었는데...
삶은 뜻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걸 이런 식으로 다시 확인해야 하다니, 얼마나 더 잔인한 얼굴을 제게 들이밀 수 있는 게 인생일까요? 도대체 언제쯤 슬픔에도 내성이 생겨 웬만한 상처에는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을까요?

어차피 떠나려 했던 길을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잠시 지체했던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길떠남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아직 접지 못한 사랑을 차마 두고 갈 수 있을지, 그 길 위에서 다시 쓰러지지나 않을지 두려워 짐을 꾸리지 못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던, 그래서 삶의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 내리기도 했던 날들...

다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흘러야 했고, 그 시간동안 당신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의 마음을 참 많이도 아프게 했지요.

ⓒ 김남희
유난히도 눈이 많던 지난 1월과 2월, 창가에 이마를 대고 서서 "봄이 올까?"스스로에게 묻고는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산을 오르다 옷 다 벗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너도 견디고 있니?" 말을 걸며, 어차피 삶은 견디고 기다리는 일의 연속일 거라고 중얼거리곤 했지요. 그때 제 산행은 길고 느린 걸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척대다 결국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혼자 지리산을 올랐지요. 화엄사에서 노고단 지나 벽소령, 세석, 장터목,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오던, 그 춥고 외롭고 바람 불던 길 위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내게는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남아 있지 않나...
이 산 위의 모든 길 위에 그와 함께 한 행복했던 추억들이 묻어 있는 것처럼, 서울이라는 도시 골목마다, 내 작은 집 여기 저기에도, 아름다운 한반도 곳곳에도, 그와 함께 웃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는 거.
그 기억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거 아닌가...하는 생각.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갖지 못했을 행복한 시간들이 내 곁에 머물렀으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웃어 주는 것만 같고, 지상에 머무는 모든 작고 어여쁜 존재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살아있음이 감사하고 눈물겹던 날들이 나에게 왔었으니까...
그 추억만으로 나는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른 해를 넘게 살아오면서 언제나 내 안에 나 밖에 없었던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마음 한 자리 비워 놓는 법을 배우고, 나 아닌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내게 온 가장 큰 축복이 아니었나요?

이제 이 따스한 봄날에 내가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는, 나도, 그 사람도, 그가 사랑하는 이도, 상처를 극복하고 건강하게 스스로를 회복하며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김남희


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좀더 일찍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집착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치게 하고 마음 아프게 했던 일, 모질게 쏟아부었던 말과 행동들, 용서해 달라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먼길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이렇게 서성이고 있는 것은 당신의 말처럼 그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한 번 떠난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는 걸요.
다만, 지치고 흔들린 몸과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조금 더 숨을 고르고 있는 것뿐이지요.

당신이 내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며, 그건 조금의 거짓이나 자기 위안이 섞이지 않은 제 진심입니다.
오히려, 내게도 목숨 걸어 지키고 싶었던 사랑이 머물렀음을 감사하고 싶은 걸요.
비록 실패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으로 인해 한 번도 본 적 없던 스스로의 낯선 얼굴을 대면해야 했으니, 결국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제 좁은 이해의 폭이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사랑같은 건 이제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고 되뇌어 보지만, 교통사고처럼 예고도 없이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저는 또 어쩔 수 없이 치이고 말겠지요. 다만 그때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모습만은 다시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이제는 아니까요. 설혹 그 사랑에 다시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때는 조금 더 빨리 추스리고 일어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 김남희
대숲을 술렁이게 하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들려옵니다.
5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벌써 사위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해돋이를 보러 방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배낭 속에 넣어온 시집들을 뒤적여 봅니다.
지난 여름 당신에게 보냈던 김용택 시인의 '사랑'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의 제 마음 같아 눈물이 나네요. 사랑을 보내는 이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하고, 건강하게 정리된 시는 어디에도 다시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사랑도 그렇게 건강하게 갈무리되리라 믿어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때쯤이면 저는 아마도 환하게 웃고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당신의 몸과 마음 함께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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