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실내 공사를 앞두고 있는 교회 건물(중앙). 배수로 공사현장은 건물 뒷편(산밑)이다. 오른쪽 아랫 부분이 학살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 심규상


<2신> "공사 80% 진척됐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형무소 수감자 및 보도연맹 관련자 등 3천여 명이 집단 학살됐던 현장 위에 교회 건축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관련 유가족 및 시민단체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유가족 및 시민단체들은 이 건물이 조립식으로 지어지는 바람에 10월 말에 건축이 시작돼 불과 2주만에 80%에 가까운 공정을 보일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전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소속 위원 6명은 지난 16일 오후 비상 대책회의를 열고 대전 동구청을 항의 방문한 뒤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위원들은 학살현장인 골령골에 건축허가를 내준 것은 반인륜적인 조치라며 공사중단, 현장보존, 유골수습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전 동구청 도시개발국장은 "학살현장인 골령골과 관련된 진행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구청의 또 다른 관계자는 "법적 하자가 없어 건축허가를 내줬고 이미 건축공사가 준공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공사중단 조치는 어렵다"고 말했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연대회의'도 17일 억울한 4.3사건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대전시 동구 '골령골'학살터에서의 건축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연대회의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대전 동구청이 4.3사건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대전형무소로 끌려 갔다가 학살된 도민 300여명 등 모두 3천여명이 묻혀 있는 골령골에 건축허가를 내주고, 작업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유골들이 방치되게 한 것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연대회의는 이어 정부와 대전시, 제주도 당국에 '골령골에 대한 건축공사를 즉각 중지하고, 현장 보존 및 유골 수습대책을 세울 것' 등을 촉구했다.

'제주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연대회의'의 경우 제주도민 300여명이 1950년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음을 뒷받침하는 수형자 명부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 골령골 학살현장은 아직까지 별다른 조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17일 오후, 현장에는 유골이 드러난 부근에 노끈을 두르고 추가 배수로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 응급조치에 나선 흔적이 보였지만 여전히 인부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또 부근에는 여전히 건축자재가 쌓여 있다.

지난 10월 말부터 시작된 이 공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80%에 가까운 공정을 보이고 있는 이 건물(면적 198㎡)은 교회로 쓰여질 예정이며, 당초 건축허가는 주택건물로 받아 놓은 상태이다.

실제로 현장에 지어지고 있는 건물은 주택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고 외관상 교회건물과 흡사하다. 더구나 현장에서 만난 인부들도 이 건물이 교회인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인부들 모두가 교회신도라고 말했다.

건축주는 공사시작 전 개장신고를 하지 않았고 현재까지 유골발견 신고 등을 하지 않은 상태다.

배수로를 파기 위해 파헤친(폭 1m, 깊이 1.5m, 길이 40-50m) 곳에는 그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수습을 했음에도 유골들이 다시 드러나 있었다. 17일 오후 현장을 찾은 기자의 눈에 곳곳에 박혀 있는 머리뼈, 치아, 잇몸, 다리뼈 등으로 보이는 20여점의 유골 잔해가 추가확인됐다.

대전지역 시민단체와 대전지역 유가족, 제주4.3사건 희생자 유족 등은 19일 산내 현지를 둘러보고 동구청 항의시위에 나설 계획이다.


<1신> 발 끝에 밟히고 채이는 '사람의 뼈'

▲공사현장에서 끝없이 발견되고 있는 피학살자들의 뼈. ⓒ 심규상
발 아래를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순간 움찔 놀라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틀림없는 사람의 뼈였다. 엉거주춤 뒤걸음질했다. 이미 유골은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있었다.

이럴 수가? 주위가 온통 유골천지다. 이미 인부들의 작업화에 밟혀 하얗게 가루가 된 유골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포크레인에 의해, 삽날에 의해, 쪼개지고 찢어지고 부서진 것으로 보이는 유골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인부들 수십여 명이 유골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없이 건물을 짓기 위해 분주히 오고 가고 있다. 건축물은 터파기는 물론 이미 지붕이 올려져 있었고 이제 막 막바지 실내 공사로 접어들고 있었다.

산 아래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배수로로 보이는 깊고 넓은 골이 파헤쳐져 있다. 길이가 언뜻 봐도 족히 60m는 돼 보였다. 혹 유골들이 밟힐새라 조심조심 그곳으로 향했다.

잘려진 흙더미 언저리에 허연 무엇이 아슬하게 얹혀 있다. 일곱 여덟개의 치아가 고스란히 박혀 있는 유골의 잔해였다. 골 아래에는 뽑혀져 흘러내린 치아 세 개가 널려 있었다. 포크레인 삽날에 잘려 일부가 드러난 나무가지를 당겨 보았다.

쑥 뽑혀 나오는 나무가지도 사람의 뼈였다. 그 옆으로 두개골로 보이는 뼈가 잘리고 부서져 있다. 서너 조각씩 우수수 쏟아져 내린 유골의 잔해도 있었다. 여기저기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유골이다.

2001년 11월 14일 오후.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산 아래로 엷게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유골이 널려 있는 10m 우측면에는 큼지막한 표지석이 서 있고 '집단학살지'라는 글귀와 '1950년 6.25 발발직후인 7월 초... 최소 3천 명 이상의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끌려와 총살돼 이곳에 묻혀 있다'는 세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입구에는 '여기는 산내 집단학살지입니다'라는 안내판이 새겨져 처음 찾는 사람일지언정 이곳이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 심규상


1950년 7월 초, 군-경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총살된 당시 대전지역 보도연맹 관련자 및 대전형무소 정치범 등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암매장지. '민간인 학살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는 2001년 11월, 이렇게 유골마저 만신창이로 쪼개지고 부서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건축허가를 내준 대전 동구청 관계자는 "이곳이 정확히 유골이 매장돼 있는 지역인지 알지 못했고 설령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유지인 이상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전참여자치연대 금홍섭 국장은 "지난 해 안내판과 표지석을 설치한 이후 매년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고 동구청 관계자들이 행사 참관을 해 왔다"며 "유골 매장지인 줄 몰랐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50년 전 군.경에 의해 총살된 유골은 관련법상 처리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건축허가시 검토대상에조차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산내학살 유가족모임' 위원들은 현재 망연자실해 있다. 산내현장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가족모임 송영길 대표는 공사 현장 부근에 널부러져 부서진 유골을 부여잡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송 씨는 "반백 년 맺힌 한으로 가슴이 썩어 문드러졌다"며 "살기 위해 숨어 살아오다 이제사 진실만이라도 밝혀지게 될까 기대를 갖고 있는 터에 무심한 자치단체에 의해 유골이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현장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진저리를 쳤다.

1950년 전쟁통에 군-경에 의해 집단 총살된 사람들. 그들은 반백 년이 지난 오늘 건축공사로 인해 파헤쳐져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백년 전과 반백년 후의 우리 사회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주검에 '색깔'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동안 뭇사람의 죽음에 그만큼 초연해진 때문일까?

한편 유가족들은 16일 오전 11시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관할 행정기관인 동구청측의 무성의를 규탄하고 공사중단, 현장보존, 유골 수습 등을 요구하기로 했다.

대전 형무소 학살 사건은 지역민들간 공공연한 비밀로 구전되어 오다 지난 1월, 해제된 미국비밀문서의 공개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는 50년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 관련자, 민간인 등 최소 3천여 명이 국군과 경찰에 의해 골령골로 끌려가 총살당한 후 집단 매장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심규상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