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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시절 이문열 씨의 소설을 읽고 거의 맹인 수준이었던 한국문학에의 눈을 뜰 수 있었다. '사람의 아들', '젊은날의 초상', '레떼의 연가', '영웅시대', '황제를 위하여',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내 책상에는 출판된 이문열 씨의 소설이란 소설은 모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대중들의 기억에 가장 많은 기억을 남긴 작품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상연된 바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아닐까 생각된다.

난 오늘자(7월 2일) 조선일보에 기고된 이문열 씨의 시론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를 보고 문득 이 소설을 떠올리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알고 계신 분들이 아마 많으리라 생각된다. 시골학교에 전학간 주인공이 엄청난 카리스마와 권력을 가진 학급 반장 엄석대가 장악한 학교에서 그 권력체제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 저항하다가 결국은 엄석대에 굴복하여 권력이 하사하는 달콤함을 맛보기도 하지만, 새로 오신 선생님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권력체제와 비리를 파악하고 엄석대를 응징하고 학급을 직접 장악하여 정상적인 학교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성년이 된 주인공은 어느 날 쇠고랑을 차고 끌려가는 엄석대를 마주치게 된다.

이 소설은 당시 권력의 속성을 한 학급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절묘하게 묘사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새로 오신 선생님이 엄석대를 응징하고 반의 평정과 정의를 되찾는 장면에서는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 소설의 엄석대, 지금의 족벌언론과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엄석대(족벌언론)는 지금껏 선생님(권위주의 정권)의 비위에 맞춰 학급(여론)을 말썽과 잡음없이 잘 통제해 왔다. 그 대가로 엄석대는 학급(국민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선생님께 묵인받아 행사해왔다. 마음에 들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반원(노무현, 최장집, 황태연, 한완상 등 개인과 시민단체, 노동계)은 구슬리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고, 따돌리기도 하면서 권력체제에 편입시켰다.

그러면서 시험칠 때마다 대리시험과 부정행위(탈세와 불공정거래, 권력유착)로 항상 공부도 1등이었고(판매부수 1위) 선생님들(정치권)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 오신 선생님(김대중 정권)이 이런 엄석대의 잘못된 권력행사와 비리를 들춰내고 바로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설에서는 선생님의 강력한 응징으로 엄석대는 떠나가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현실은 다른 것인가 보다. 이 소설의 작자가 엄석대를 옹호하고 나섰으니...

이문열 씨는 이 칼럼에서 현재 언론사의 세무고발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기관사들이여, 이제라도 급제동(急制動)을 걸어라. 브레이크를 밟아라. 늦었더라도 승객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하지만 굳이 두 기관차가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권은 한 시대의 정치제도가 빚어낸 가변적 현상이지만 언론은 제도 그 자체로서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없고 정부만 있는 사회보다는 정부가 없고 언론만 있는 사회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 아니었던가."

이문열 씨는 선생님이 엄석대의 전횡을 바로잡고자 나선 것을 두 기관차의 충돌로 비유하면서 선생님보다는 엄석대를 택하고자 한다.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평생심사위원의 위촉 등 '엄석대'의 권력체제에 편입된 대가로 맛보는 혜택의 달콤함을 지키겠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러 행태를 보면 비단 이문열 씨뿐이 아니다.

TV방송토론에 출연해 느닷없이 언론사의 탈세와 불공정거래를 김정일답방문제에 슬쩍 걸치는 홍사덕 씨나, 대통령에게 언론사에 대한 너그러운 처분을 당부하는 김동길 씨나 조선일보에 등장하는 일부 논객들은 모순되고 왜곡된 사회구조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은 없다.

1년여만 더 있으면 딴 데로 전근가게 되어 있는 선생님보다는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계속 독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엄석대에게 기대고 싶은 것과 다르지 않다. 하기야 다음 선생님으로 거론되는 이회창 씨도 그야말로 확실한 '엄석대'의 편이 아닌가?

한때 문학적 동경과 찬탄의 대상이었던 이문열 씨. 그는 그냥 문학적 성취를 묵묵히 이어가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나누어주는 감투와 문화권력의 혜택에 떠밀려 이렇듯 그의 문학적 명성에 먹칠을 하는 시론은 쓰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의 화려한 수사, 풍부한 상상력과 인고의 노력 끝에 쓰여진 빛나는 작품들이 한낱 글이 주는 달콤함,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문열 씨야 말로 또 다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다음은 이문열 시론의 전문.(조선일보 7월 2일자)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지금 우리 사회는 같은 철로 위에서 걷잡을 수 없는 투지로 서로를 향해 치닫고 있는 두 대의 기관차를 보고 있는 듯한 위기감에 빠져 있다. 해당 언론사 대다수에는 파산선고나 다름없는 국세청 추징에다 사주(社主)구속을 앞두고 있는 이 나라의 언론과, 그런 조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듯한 이 정권이 그러하다. 

때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둘 다 져서 함께 다치고(兩敗俱傷) 같이 끝장을 보는 것(同歸於盡)도 좋은 전략 ·전술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마주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는 그럴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뒤의 객차에는 양쪽 모두 많은 국민들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사태의 본질이나 원칙론적 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방법론과 절차에 대한 시비조차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근래 몇 년처럼 정치적 수식어와 화장술이 발달한 적도 없었으며, 홍보의 탈을 쓴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소수에 의한 다수 사칭 여론조작, 그리고 논의를 앞세운 언어적 폭력이 공공연하게 자행된 적도 없었다. 

논리는 오래 전부터 무력해졌고, 대중의 이성은 혼란에 빠졌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것은 이미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느 낌이다. 혁명이 일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는 것은 패퇴한 세력의 잔여 에너지와 승세를 탄 세력의 농축 에너지가 모두 극대화한 상태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런 혁명의 비극적 소모를 피하기 위해 모색 된 것이 점진적 변혁 혹은 개혁일 것이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선택한 것은 후자로 보인다. 

야구를 예로 들어 경박해 보이지만,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고의사구(故意死球)로 노태우 정권을 걸러보냄으로써 시간을 벌어 양측의 에너지가 함께 약화되기를 바랐다. 패퇴한 쪽의 잔여 에너지가 유혈의 역전(逆轉)을 기도함으로써 생기는 비극적 소모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래도 간간이 떠돌던 쿠데타설은 그 잔여에너지의 작동을 느끼게 했다. 92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권은 처음 패퇴해 가는 세력의 구원투수 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게 위장이었다 하더라도 이 정권보다는 대항 세력시절의 농축 에너지가 많이 희석되었을 것이라 여겨 다음 선택으로 삼았다. 

그리고 97년 이 정권이 출범했을 때 나는 10년의 세월을 믿었다. 그 완만한 변혁의 기간에 구체제의 잔여 에너지나 대항 세력의 농축 에너지는 거의 소진되었거나 함께 만들 미래에의 이상으로 순화되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 사회는 더욱 분열되고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제는 모종의 머지않은 폭발을 예감케까지 한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은 이번의 충돌이 바로 그 기폭제가 되는 것이다.이 정권과 언론을 중심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힘들이 급속하게 재편되고 결속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아직 검찰과 법원의 판단이 남은 상태에서 그걸 바로 여당의 정권 재창출 음모로 단정하고 사생결단으로 나오는 야당에서도 단순한 정략 이상 어떤 방향의 사회력 결집이 느껴진다. 어쩌면 지난 10년 우리 사회는 순화되고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유예해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두려운 자문(自問)이 일기도 한다. 

기관사들이여, 이제라도 급제동(急制動)을 걸어라. 브레이크를 밟아라. 늦었더라도 승객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하지만 굳이 두 기관차가 충돌로 승패를 가름해야 한다면 나는 언론쪽의 승리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권은 한 시대의 정치제도가 빚어낸 가변적 현상이지만 언론은 제도 그 자체로서 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없고 정부만 있는 사회보다는 정부가 없고 언론만 있는 사회를 선택하겠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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