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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 이종호
학창시절, 성적이 떨어졌다고 매를 드는 야만적인 선생들이 있었다. 떨어진 등수만큼을 매의 숫자로 환산하는 어처구니없는 담임도 있었고 자기 과목에서 70점 이하의 점수를 받은 학생 전원을 매타작하는 끔찍한 선생도 있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라고 믿는 선생 나름의 단순한 논리 때문에, 죽어라 노력을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까지도 매타작을 당해야했다.

늘 전교 1-2등 하는 아이들 중 일부는 70점을 맞지 못해 앞으로 끌려나가 매맞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험전날 좀 덜 놀거나 잠을 줄여서 조금만 열심히 하지, 왜 저렇게 매를 맞을까. 친구를 얕잡아봐서 그렇다기보다 딱한 마음에 드는 생각일 것이다. 자기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그렇다. 머리가 좋아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잘나오거나 머리는 평범하지만 노력하나만큼은 비범하다고 믿고 있는 이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생각이다.

요즘 ‘연정론의 전도사’가 되어 연정론의 본질과 노대통령의 선지자적(先知者的) 혜안을 설파하고 있는 유시민 의원은 자신이 말하는 진의를 금방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못내 딱하고 답답한 모양이다. 전교 1등 하는 학생이 70점을 못 받아 매를 맞는 학생을 보는 눈길이다. 그래서일까. 예전보다 더 날카롭고 단호하며 냉소적이다. 김어준의 노 대통령에 대한 어법을 흉내내 먼저 밝혀두건대, 나 유시민 좋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좋다. 하지만 연정론과 관련된 최근 유시민의 말과 행동은 별로 안좋다. ‘지적 권위주의’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다.

'노 대통령의 대변인' 유시민 의원의 '지적 권위주의'

‘지적 권위주의’란 매사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원래 권위주의란 게 수평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축으로 이루어진다. 논리적 설득의 측면에서는 유시민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논리를 내 논리에 종속시켜야 속이 후련한 것처럼 보인다.

‘지적 권위주의’ 성향이 있는 이들에게 ‘앎(知)’은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매사 ‘너 그거 알아?’ 하며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따지기 좋아하고 상대의 이해력을 끊임없이 저울질한다. ‘지적 권위주의’는 ‘앎’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경향성이다. 논리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므로 대개의 경우 합리적이지만 권위주의적 색채가 짙어지면 제3자를 무시하거나 냉소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앎’을 최종 결론으로 미리 단정하고 논의를 시작하기 때문에 토론이 아닌 설득이 된다. 일방적, 배타적 논의다.

며칠 전 <100분토론>에 출연한 유시민에게 시민논객이 노대통령의 연정론은 ‘겉옷을 먼저 입고 그 다음에 속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격’이라며 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시민은 논리적 근거가 없는 일종의 인상비평에 어떻게 대답하느냐며 연정론의 실체를 재차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 명료함과 심플함이라니. 나는 그 순간 사람들이 왜 유시민을 ‘똑똑하다’고 평가하는지 똑똑하게 알았다. 동시에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듯한 유시민의 특성도 새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유시민처럼 당대 최고수급의 설득논리와 표현력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시민 혼자만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입을 다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논리성이 실체적 진실을 알려주는 알파와 오메가도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요소의 전부도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의 90%는 언어적 요소가 아닌 비언어적 요소에 의한 것이다. 말의 내용 그자체 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얼굴표정, 말의 억양, 손짓, 몸짓 등의 비언어적인 요소를 통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인지, 또는 진실한지 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게 되며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지난 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선 것도 명징한 논리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상식적 판단과 그에 대한 순한 믿음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논리적 설득에 의한 행동도 아니었다. 짐승처럼 손과 발이 들려 밖으로 끌려 나가면서 ‘이건 아니야’라고 울부짖던 당시의 유시민 의원은 전혀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마치 내 자신이 철저히 짓밟히고 있다는 생각에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동물적 본능이자 민심이었다.

국민은 기본적으로 핵심권력과 떨어져 있는 집단이다. 권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내부 권력집단들과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논리적 정교함이 없어서 얼핏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권력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가짐으로 해서 생기는 객관적 시각과 직관, 상식적 의미의 현실감각은 놀랄만큼 정확할 수 있다.

▲ 지난해 3월 2일 대통령 탄핵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과 경위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던 우리당 의원들을 끌어내자, 유시민 의원이 "의회폭거"라며 울부짖고 있다.
ⓒ 이종호
국민들과 '선지자게임'을 벌이는 사회자로 보여

요즘 유시민은 연정론과 관련해 국민들과 ‘선지자(先知者) 게임’을 벌이는 사회자처럼 보인다. 노대통령이 선지자인지 아닌지 맞춰보자는 듯 하다. 자신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 심정적으로는 안 내키지만 국정최고 책임자로서 역사를 걱정하는 대통령의 진정성과 혜안을 믿고 또 따라야 한다는 게 유시민의 요지다. 마치 계시록의 말씀을 유시민 특유의 논리성으로 재구성하여 들려주는 형국이다. 그 과정에서 선지자의 말을 금방 알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민심’을 어리석고 딱하게 여기는 듯한 발언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연정론과 관련해 부정적 국민여론을 거론하는 야당을 향해서 여론조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지 말라는 훈계도 튀어 나온다. 아무도 여론조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지 않는다. 다만 선지자의 논리로 헌신짝처럼 내팽겨쳐도 될만큼 ‘민심’이란 게 단순하고 가볍지 않다는 사실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똑똑한’ 유시민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자신의 논리적 완결성에 집착하느라 정작 그 논리가 이바지해야 할 최종 목표에 대한 국민들의 부적절한 느낌과 불편한 심정을 애써 외면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손석춘의 지적처럼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를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하는 언론인이나 지식인까지 싸잡아 ‘지적 만족감’ 따위로 규정하는 유시민의 태도는 수긍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독선적으로 느껴진다. ‘지적 권위주의’의 한 부작용이다. 연정론의 문제점을 특유의 화법으로 지적하는 노회찬 의원에 대해 ‘이건 그렇게 재미있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반론을 펴는 유시민의 모습은 고리타분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노회찬 의원은 재미있게 말한다고 해서 핵심을 놓치는 사람이 아니다. 쉽게 말하는 거지 개그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을 향해 비장한 톤으로 독수리 5형제처럼 자신의 논리를 강조하는 태도는 전혀 유시민답지 않다.

최근 대통령 측근들의 언행이 단호하고 여론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도 그런 비장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홍보수석은 ‘대통령은 21세기에 있고 국민들은 아직 독재시대의 문화와 지도자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신임 비서실장은 취임 일성으로 ‘쓴소리를 가장해 쏟아내는 왜곡과 비판에 결코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며 17년 간을 노대통령과 일해왔다는 전 후원회장은 ‘사람들이 대붕의 뜻을 너무 모른다’고 한탄한다.

물론 그 선두에는 유시민이 있다. 유시민은 최근에 자신을 가리켜 ‘노무현 대통령의 대변인’이라고 부른다는 시중의 평판에 대해 ‘사람들이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듣기에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나선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엉뚱한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선지자를 자처하는 노대통령과 ‘선지자 게임’을 주도하는 유시민이다.

정작 엉뚱한 것은 국민들이 아니라 대통령과 유시민 의원

지역구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다. 당위명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법론에 관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지역구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부당하다. 또 노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에 대통령직을 걸었지만 누구는 통일기금 조성에 또다른 누구는 부패한 과거사와 단절하는 문제에 올인할 수도 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고, 결정적이지 않은 사안이 있는가. 그럼에도 다른 문제들을 거론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대통령이 결정한 의제만을 선지자의 논리를 앞세워 최우선적으로 수용하라는 태도가 국민의 처지에서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그런 불편한 마음들을 엉뚱한 소리로 치부하여 유시민이 단호하고 적확한 논리로 조목조목 공박한다면 당해낼 재간은 없다. 그런 유시민의 모습은 어느 소설의 한 대목처럼 휴가길에 오른 군인들이 탄 기차에서 공수부대원 서너 명이 일반사병 수백명이 타고 있는 객차 몇량을 단번에 장악해 자신들의 휴가비를 걷어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지금 노대통령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유시민은 혼자 온 국민을 상대로 논전을 벌여도 전혀 밀리지 않고 외형적으론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만큼 유시민의 논리적 내공은 탁월하다. 하지만 탁월한 설득논리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한다.

몇 년 전 나는 유시민에 대한 인물평전을 쓰면서 “저는 언제나 '올바른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는 그의 칼럼 한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시민이 말하는 ‘나의 생각’에 기꺼이 동참할 마음이 충만하다. 대부분의 경우 유시민의 ‘나의 생각’은 ‘올바른 생각’일 가능성이 높은 쪽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연정론과 관련한 유시민의 ‘나의 생각’은 ‘동떨어진 생각’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연미복을 차려입었는데 옷의 뒷솔기가 크게 터져 있다면 미처 보지 못한 당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은 상식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유시민’이라도 옷맵시에만 신경쓰느라 정작 뒷솔기가 벌어진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면(나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유시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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