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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틀간의 여행이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입니다. 섬은 아직도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건성건성 둘러보는 여행이었다면 그 중 인상적인 거 하나쯤 가슴 속에 담고 자유로울텐데요. 제주는 나를 포로로 잡고 놓아주지 않는군요. 내가 섬이 되어 버린 섬,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다녀온 사람들의 느낌은 아마 거의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환상적인 바다 그리고 육지와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 맞습니다. 제주도는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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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무속이야기 둘째 날]사방이 신당 천지이더라

지난 1월에 이어 2월 26~27일 진행된 제2테마는 '제주 사람들의 민간신앙과 무속이야기'였습니다. 언뜻 주제만 보면 일반인들에게는 재미는 없고 의미만 남을 것 같은 주제였지만 둘 다 만족시켜준, 제주도의 겉과 속을 들여다 본 특별하고도 독특한 여행이었습니다.

국회문화정책포럼과 풀빛문화연대가 주최하고 김재윤 의원실이 주관한 제주생태문화여행은 3월부터는 달마다 2회씩 총 8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한 여행이었는데 주최측이 준비를 잘 하여 아주 원활하게 진행됐으며 제주 현지의 칠머리당굿 전수자 정공철 선생을 비롯한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의 황평우 소장, <전국의 기도터와 굿당>의 저자이자 굿 연구가 김덕묵 선생 등 전문인이 동행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송씨할망과 강씨하르방이 별거하고 있는 굿당은 담으로 경계가 쳐져 있다.
ⓒ 진홍
제주비행장에서 버스를 타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여느 여행과 달리 멋진 풍경이 아닌 제주 서북쪽에 위치한 애월읍 상귀리 '황다리궤당'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신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제주는 무려 1만8000신들이 있다고 합니다. 신이 깃들고 머문 곳인 신당이 지천에 있는데 현재도 300여 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신당은 천장이 용암벽과 동백나무로 둘러싸인 높이 4~5m 정도의 신비스런 동굴입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송씨할망'을 모신다는데 아이를 낳게 하고 잘 보살펴 주는 산육신으로 농경신입니다. 반면 고기를 먹는 육식의 신, 즉 사냥, 목축을 관장하는 남신들은 비린내를 풍긴다 하여 쫓겨나 '바람 아래 좌정'하게 된 신으로 이곳의 '강씨하르방'은 안방이 아닌 바깥방에 별거한다는 흥미로운 전설이 깃든 곳입니다.

여자가 안 자리를 차지하여 남자를 내쫓은 경우인데 아마 출산과 양육 그리고 농경의 중요성이 어느 지역보다 절실했던 제주도의 지역 특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딸 모두 할망 성을 따라 송씨라 해 모계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르방은 담 바깥쪽 작은 동굴에 좌정해 있습니다. 그래서 정월 초이레 날 굿을 할 때만은 할망 곁으로 불러 같이 대접한다고 합니다.

할망도, 돌담도 정겨운 제주

"할머니, 구경 왔수다."
"볼 것도 엇신디(없는데). 들어왕 봅서."
"고맙수다. 우리 고찌온(같이 온) 사람들 돌담이엉(돌담이랑) 마당이엉 앙끄래(안채) 밖끄래영(바깥채랑) 고찌강(같이) 부꾸다(보겠습니다)."


▲ “볼 것도 엇신디 들어왕 봅서.” 할머니! 허락없이 촬영해서 죄송합니다.
ⓒ 진홍
하가리 잣동네를 갔을 때 걸어 나오는 할머니에게 일행 중 한 분이 인사하고 구경 좀 하겠다고 하는 토박이 소리 같은데 통 뭔 소린지 몰라 나중에 옮겨 적은 것입니다. 말은 잘 못 알아먹었지만 할머니도 돌담도 모두 온화하고 정겹습니다.

잣동네라고 하여 잣나무가 많은 줄 알았더니 돌담이 온 동네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마치 자그마한 성처럼 생겼습니다. 길도 밭도 집도 통시(돼지 키우는 변소)도 장독대도 온통 돌입니다. 제주에는 바람과 여자와 돌이 많다더니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잣'이란 성(城)의 옛말로 돌로 쌓아올린 담장을 뜻합니다. 조선조 때 방목하는 말에 의한 밭농사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중간산에 쌓은 성이 잣성인데 고도별로 나눠 상잣, 중잣, 하잣이 그것입니다.

▲ 제주의 전통적인 돌담과 띠 지붕. 거센 바람 때문에 집줄로 하나하나 묶어놓았다.
ⓒ 진홍
돌담은 우선 바람과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날짐승이나 외적을 막아주고 마을과 마을 또는 이웃과 이웃을 구분 지웁니다. 그런데 어느 집이고 대문이나 사립문이 없습니다. 잣마을의 돌담은 모두 직선이 아닌 곡선입니다. 세차게 불어오는 태풍과 '맞짱(?)' 뜰 수는 없기에 곡선으로 부드럽게 바람을 얼러주는 오랜 삶의 지혜가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공항을 나설 때 눈발이 비치더니 제법 펄펄 눈이 내립니다. 그래도 봄을 알리는 돌담 밑 동백나무는 살포시 꽃망울로 먼 데 손님들을 반기고 복사꽃은 더 하얗게 웃습니다. 그래서인지 질투하듯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 제주바람이 얄밉게 보입니다.

하가리에서 조금 올라가면 상가리입니다. 상가리 오당빌레 송씨할망당은 나주기민창 전설과 관련된 뱀신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제주에 칠 년 가뭄이 들어 백성이 모두 굶어죽을 판인지라 제주목사의 명을 받고 당시 대선주였던 안씨는 창고에 쌓인 돈을 몽땅 싣고 쌀을 사러 육지로 갔습니다.

▲ 굿당을 에워싸고 있는 신목이 마치 풍만한 어머니 젖가슴 같아 이채롭다.
ⓒ 진홍
마침 나주기민창에서 쌀을 구해 제주에 도착할 즈음 태풍에 배가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안씨가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빌자 거짓말처럼 배가 둥둥 떠갑니다. 알고 보니 집채만한 뱀이 빙빙 서려 물구멍을 막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곡식이 부족한 척박한 땅과 다산을 기원하는 염원이 만들어낸 전설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신당을 에워싸고 있는 신목은 마치 어머니 젖가슴처럼 풍만한 형상입니다.

오름에 오르고 바닷길이 열리고

보기엔 밋밋한 동산 같은데 그래도 산은 산인 모양입니다. 맛있게 점심 먹은 힘으로 정상까지 오르는데 자꾸 바람이 먼저 가겠다고 심술을 부립니다.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만든 말로는 '기생화산'이라고 한다는데 아주 옛날 화산 폭발로 한라산 자락에 소규모의 수많은 화산폭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생성된 것입니다.

▲ 오름에 오르는 길에 산담과 멀리 한라산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삼방산이 보인다.
ⓒ 진홍
오름에 오르는 길에 무덤들이 듬성듬성 보이다가 중간쯤엔 떼로 몰려 있는데 육지의 무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무덤마다 돌담을 쌓아 놓았는데 '산담'이라고 부릅니다. 돌담 속에서 태어나 돌담 속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돌담과 연을 맺고 있는 제주 사람들의 삶은 돌만큼이나 팍팍하지만 강인하기도 합니다.

산담은 말이나 소가 침범하는 걸 막기도 하거니와 행여 불이 났을 때 방화벽 역할도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조상의 유택에 대한 후손들의 최대 효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주변엔 그다지 돌이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큰 돌을 효심 없이는 옮기지 못했을 거니까요.

정상에 올라서니 거신인 설문대할망이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주먹으로 탁! 치니 한라산 꼭대기가 턱! 나가떨어져 생겼다는 삼방산이 바다와 따스하게 어우러져 있고 한라산은 구름과 눈 속에 갇힌 채 아직도 한겨울입니다.

오름도 화산인지라 분화구가 패여 있고 정상 너머 몇 군데에선 때 아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한라산은 분명 휴화산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식지 않은 용암 때문일까요? 그저 신기해서 머나먼 시간을 거슬러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다가 안내자의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습니다.

김이 피어오르는 건 용암이나 용천수 때문이 아니고 바깥 온도와 땅 속 온도 차이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그건 왜정 때 전쟁 준비를 위해 판 '진지동굴'로 제주의 오름 360여 곳 가운데 70여 곳에 제주도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구축했다고 합니다. 모락모락 신기하게 보이던 수증기가 상처의 '진물'로 변하고 맙니다. 제주는 이렇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곳곳에 안고 살아가고 있는 땅입니다.

▲ 조수간만의 차로 물길이 열려있는 서건도. 최근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 진홍
첫날 마지막 행선지인 서귀포의 서건도(일명 썩은 섬)에 도착하니 바람도 잦아들고 길가엔 벌써 유채꽃들이 다투어 피어납니다. 제주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건도는 조수 간만의 차로 매 10~12차례에 걸쳐 길이 열려, 걸어서 섬에 갈 수 있습니다.

서건도에서는 지난 2001년에 기원 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공열식 토기파편과 동물뼈, 주거흔적 등이 발견돼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답니다.

테마에 충실하느라 민간신앙이나 무속 등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아마 이런 행운을 못 잡았을 것입니다. 주최 측의 기획과 진행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특히 서건도로 건너갈 수 있도록 귀신같이 시간을 정확히 맞춰 놓은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명경수처럼 깨끗한 이 바다에 수십억 원을 투자하여 각종 편의시설을 조성하여 생태체험관광지로 개발한다는데 현 생태가 과연 유지될까 두렵습니다.

굿은 굿(good)이다

"아아 아하아요, 에헤에 에헤에요.
물 위에는 선왕이 놀고 물 아래는 용왕이 논다.
아아 아하아요, 에헤에 에헤에요.
오를목에는 노리사냥 내릴목에는 매사냥에 논다."


숙소인 풍림리조트 지하 '오름홀'에선 매인심방(제주에서 말하는 무당)의 춤사위와 소미(소무)의 풍악소리가 울리며 한 판 굿판이 펼쳐졌습니다. 위의 서우젯소리는 노래굿에 나오는 무가인데 토속민요로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룻밤 묵으러 왔다가 아닌 밤중에 느닷없이 굿보고 떡 얻어먹는 일반 투숙객들도 즐겁습니다. 서울 가락동에서 왔다는 김용구(65)씨는 "한국적인 전통을 지역 특색에 맞게 살리는 관광서비스를 앞으로 많이 개발했으면 한다"며 특색 있는 문화프로그램에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 전통굿을 시영하고 있는 정공철 칠머리굿 전수자.
ⓒ 진홍
중요무형문화재 71호인 제주 칠머리당굿보존회 회장이자 인간문화재인 김윤수씨로부터 10여년 째 전수를 받고 있는 정공철(45)씨가 시연하였는데 육지나 섬이나 본 굿이 끝나면 모두 하나가 되어 흥겨운 판을 벌이는 것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굿 종류나 무복은 육지와 사뭇 다릅니다.

먼저 신을 부르기 전 초감제에선 근본을 풀이한다는 본풀이에서 당신의 내력과 굿을 하게 된 연유 등을 밝히는데 이 날 심방은 생태문화관광이 무사히 끝나기를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을 부르는 신청제, 이어서 제물을 올리며 잔치를 벌이는 추물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과 인간이 동락하는 노래굿인 석살림굿 순으로 대략 구성되어 있으며 12가지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중부지방에선 무복이 20가지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섬 지방은 한두 종류로 단순하고 최영 장군이나 조상신이 등장하지 않으며 오방기도 쓰지 않는 게 특징입니다. 즉 육지의 기복신앙이 발달된 거와 확연히 비교되는 측면입니다. 또 육지에선 공통적인 저승길을 편히 모신다는 '배 가르기'가 없다고 김덕묵씨는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무속 특히 굿은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았으며 모든 생명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조심하고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생태론적인 삶 자체였습니다.

'아, 그래서 무속과 굿이 생태문화여행의 테마였구나!'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첫날 모든 일정을 마치고 뒤풀이 시간에 많은 소감들이 오고 갔는데 황평우 선생이 말한 "굿 이즈 굿"에 모두 동의합니다. 역시 '굿은 굿(good)'인가 봅니다.

'제주생태문화여행'이란?

제주생태문화여행은 새로운 관광문화자원을 발굴하기 위한 것으로, '지속 가능한 생태문화 여행' '재미 있는 여행' '여운이 있는 여행' '생각하는 여행'을 지향한다.

제주도의 생태와 문화 등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볼거리를 둘러보고 제주 사람들이 간직해온 역사와 삶을 함께 체험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다. 지난 1월 29일에 떠났던 첫 번째 여행을 시작으로 5월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계속될 예정이다.

이 여행은 모두 8개의 주제로 나누어져 있으며, 여행을 떠날 때마다 20~40여명 정도의 일반 참가자들과 함께 각계의 작가와 문화예술인, 그리고 환경생태 전문가들이 동행한다.

3월 12일경에 있을 세 번째 여행의 주제는 '작가와 떠나는 제주기행'으로 우도와 성산포 지역을 돌아볼 예정이다.

제주생태문화여행은 풀빛문화연대(이사장 황대권)와 국회문화정책포럼(회장, 국회의원 이경숙)이 공동 주최하고 문화관광부와 오마이뉴스 등이 후원하고 있다.

이 여행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신 분은 풀빛문화연대(http://www.fulbit.or.kr)나 제주생태문화여행 사이트(http://www.jejuecotour.com)를 방문하시면 된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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