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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서 사용된 '한국의 수구세력' 혹은 '수구세력'이라는 표현은 ▲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에 ▲ 정치, 경제, 사회 등 한국의 각 분야를 지배한 핵심 세력으로서 ▲ 민족분단 및 사대외교를 지향하다가 ▲ 국제적 탈냉전 무드와 국내 민주화 과정 속에서 권력을 잃은 뒤에 ▲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기 보다는 과거의 권력을 되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 경제 민주화 및 통일이라는 시대의 개혁적 흐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일부 세력을 가리킵니다. -<기자 주>)

박정희 독재시기에 사회적으로 부각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신라 화랑정신이다. 박정희 정권은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이어받아 새 역사를 창조하자"고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음은 박정희 작사·작곡 <나의 조국> 3절이다.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 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그럼, 여기서 말한 '화랑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수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온 승려 원광(圓光)이 지었다는 세속오계(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가 과연 신라 화랑도의 정신이었을까?

특정 조직의 슬로건만 갖고는 그 조직의 정신을 규명할 수 없다. 어느 조직이든 간에 슬로건이 화려하지 않은 조직은 없기 때문이다. 특정 조직의 진정한 정신을 규명하려면, 그 조직이 수행한 객관적 성과를 바탕으로 거기서 주관적 정신을 도출해 내어야 한다.

인간의 외부적 행위는 내부적 정신의 표출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강조한다 하여 그 사람이 사랑을 중시하는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입으로는 사랑을 강조한다 하여도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 정신에는 사랑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라 화랑 출신들이 실제로 어떤 정신을 갖고 있었는가를 규명하려면, 세속오계 같은 '립서비스'를 분석할 게 아니라 그들의 실제 행위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수구세력을 대표하는 집단들 대체 어떤 이유에서 신라 화랑도 정신을 그렇게 숭상하게 되었는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화랑정신을 숭상하는 진정한 이유는 자신들과 신라 화랑 출신들 사이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자신들과 공통점이 많은 화랑 출신들을 띄워 줌으로써 무언가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려 했던 게 아닐까.

수구세력은 왜 신라 화랑정신을 숭상했나

그럼 국내 수구세력과 신라 화랑 출신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양자(兩者) 사이의 정신적 공통점은 대략 3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두 집단의 객관적 행위에서 드러난 주관적 정신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수구세력 집단과 신라 화랑 출신들은 사대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수구세력이 얼마나 사대주의적인가는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문제나 한미동맹에 관한 발언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웅변하고 있다. 여기서는 신라 화랑 출신들이 어떤 면에서 사대주의적이었는가 하는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수나라가 남북조 분열을 통일한 589년 이후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화두는 '중화패권주의 강화'였다. 5호 16국 시대 및 남북조 분열기의 중국은 주변 이민족들에 대해 강력한 대외정책을 구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주변 이민족들을 아예 중국의 군현 체제 속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추진한 이 새로운 국제체제는 군현제적 국제관계, 도호부적 국제관계, 기미부주 국제관계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한나라 무제 때의 강력한 대외정책을 복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한나라 무제 시기에 고조선을 멸망(BC 108년)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것처럼, 고구려 등의 영역에 수나라·당나라의 행정기구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높은 단계의 중화패권주의'에 정면 대항한 것이 고구려라면 이에 적극 순응한 것이 신라였다. 그리고 그 신라는 화랑 출신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인 670년부터 신라가 당나라에 대항하였다고는 하지만 735년에 나당관계가 정상화된 이후로 신라는 당나라 주도의 국제체제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신라 화랑 출신들은 당나라에게 사대하고 수구세력 집단은 미국에게 사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집단은 정신적 공통점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랑의 민족분열주의와 수구세력의 그것

둘째 수구세력들과 신라 화랑 출신들은 민족분열주의를 공유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미국·일본과 연대하여 북한을 붕괴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핵문제·탈북자문제 등에서 민족과의 공조(민족공조) 대신에 외세와의 공조(외세공조)를 추구하고 있다.

이 점은 신라 화랑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도 중원에 진출하기는커녕 나라마저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신라 화랑 출신들의 민족분열주의 때문이었다. 당시 화랑 출신들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협공함으로써 민족공조보다는 외세공조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서토(西土)의 꿈을 지니고 있던 고구려는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라의 견제로 인해 끝내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수백 년간 요동(만주)을 지배하고도 요동 바로 옆에 있는 중원을 끝내 정복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남쪽 신라·백제의 견제가 없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하겠다. 이처럼 화랑 출신들은 민족이라는 큰 틀을 인식하기보다는 정권이라는 '우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민족 강역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하였다.

이처럼, 신라 화랑 출신들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협공하였고 한국 수구세력 집단은 미·일과 연합하여 북한을 포위·압박하려 한다는 점에서, 두 집단은 정신적 공통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도사관의 과거와 현재

셋째, 수구세력과 신라 화랑 출신들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 수구세력이 일제 식민주의에 영향을 받은 반도사관을 갖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 화랑 출신들은 어떠한가?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화랑 출신들이 대동강 이남 지역의 통일에 만족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적대관계였던 나당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명확히 드러난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가 본색을 드러내자 신라는 당나라에게 약속(영토분할) 이행을 요구하면서 670년부터 백제 주둔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악화한 양국관계는 73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럼 이때 신라는 무엇 때문에 당나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한 것일까?

733년 발해가 반격 차원에서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자, 나당연합의 필요성을 인식한 신라는 당나라를 도와 발해의 남쪽을 협공해 주었다. 당나라는 그런 신라에게 '답례' 한 가지를 했다. 당나라 황제인 현종이 신라에 준 선물은 대동강 이남이 신라 영토라는 점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었으나, 양국 간에는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당나라는 발해 협공을 목적으로 신라에 영유권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관계는 다시 정상화되었다. 여기서 양국관계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 주도의 중화패권주의에 순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동강 이남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당나라의 역내 패권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 만족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고구려를 제외한 삼한(三韓)이라는 비좁은 인식의 틀에 갇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겨우 삼한 지역만 차지해 놓고 자신들이 통일을 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고구려)을 통일한 게 아니라 상대방을 없앤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인식한 '민족적 자아'의 범주가 대동강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화랑정신 계승, 다시 생각해봐야

수구세력과 신라 화랑 출신들은 사대주의·민족분열주의·반도사관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사대주의·민족분열주의·반도사관이 이제까지 대한민국을 망치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해 온 점을 생각해 볼 때, 소위 화랑정신이라는 것은 '오늘에 이어받아 영원토록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경건한 것이 못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후손에게까지 물려준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토록 지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다음 역사적 과제인 자주와 통일을 성취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신라 화랑정신을 기억 속에서 지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새로운 단계의 역사적 과제를 성취하려면, 화랑이 아닌 또 다른 역사적 존재를 본보기로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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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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